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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고, 비워지고 다시 채워졌던 영화 속 집의 시간들.
〈미나리〉는 1980년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온 한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이 미국 남부 아칸소의 황량한 벌판까지 밀려온다. 부부에게는 의젓한 첫째 딸 앤과 심장이 약한 아들 데이비드가 있다. 가족이 새 삶을 시작한 곳은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넓은 들판 한가운데 놓인 트레일러다. 바퀴 달린 집,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집.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의 임시 거처이자 마지막 선택지다.
제이컵은 아칸소를 “미국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라 부르며, 광활한 풀밭에 한국 채소를 심어 농장을 꾸리려 한다. 그 선택은 생계를 위한 판단이자,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반면 모니카에게 이 집은 불안의 집합체다. 문조차 제대로 달리지 않은 트레일러, 병원까지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 심장이 약한 아들을 떠올릴수록 마음은 좀처럼 놓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이 집에 또 다른 변화가 찾아온다. 부부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제이컵이 모시자고 제안했던 장모 순자가 집에 도착하면서다. 영어가 더 익숙한 데이비드에게 ʻ한국 냄새’가 나는 할머니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다. 쿠키를 굽지도 못하고, 욕을 하고, 미국 할머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순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순자는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서로의 안위를 살필 여유조차 없던 집에 숨 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순자와 데이비드는 장난을 치고, 갈등하고, 함께 뛰며 서서히 가족이 되어간다. 그녀가 데이비드를 데리고 가 근처 물가에 심어 놓았던 미나리처럼, 집은 조금씩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라나기 시작한다. 순자의 실수로 그간 재배해 온 농작물과 꿈을 모두 잃은 밤, 가족은 트레일러 거실에 처음으로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한다. 마치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되어주는 것처럼. 내일의 고난을 알면서도, 이곳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발 디딜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영화 말미에 제이컵과 데이비드는 할머니가 심어둔 미나리 밭으로 향한다. 잿빛으로 내려앉은 상실 위에서도, 물가 곁 에서 조용히 뿌리를 내린 미나리를 보며 제이컵은 말한다. “알아서 잘 자라네. 데이비드, 할머니가 좋은 자리를 찾으 셨어.” 낯선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미나리처럼, 어디에 심기든 살아남아 결국 자라나는 것, 그것이 미국에 서 자신만의 집을 찾아다니던 한 가족이 선택한 방식이다.
미소는 햇빛이 겨우 스며드는 단칸방에 산다. 겨울이면 여러 겹의 옷을 껴입어야 버틸 수 있는, 춥고 허름한 공간이다. 가사도우미로 하루를 이어가며 그는 위스키 한 잔과 담배, 오래된 연인 한솔과 보내는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그러던 어느 날, 월세 인상과 담뱃값 인상 소식이 동시에 들려온다.
가계부 앞에 앉아 계산하던 미소는 뜻밖의 결론을 낸다. 집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자신의 취향을 희생하는 대신, 잠시 ʻ여행길’에 오르기로 한다. 그렇게 미소는 대학 시절 밴드 동아리 친구들의 집을 하나씩 전전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선물로 줄 계란 한 판을 들고 최소한의 짐만 챙긴 채 길에 나선 미소가 마주하는 것은, 기억 속 친구들과는 다른 현재의 얼굴들이다. 회사에서 몸을 혹사한 채 링거를 맞으며 하루를 버티는 문영, 시부모의 눈치를 보며 가사 노동에 매인 현정, 실패한 결혼 이후 홀로 남은 아파트에서 밤을 견디는 대용. 겉으로 보기엔 ʻ집이 있는 삶’이지만, 저마다의 사정으로 고달픔과 애환이 가득하다. 미소는 집이 있음에도 결코 안정적이지 않은 삶의 여러 단면을 마주한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집은 대저택에 사는 정미의 집이다. 과거에 미소에게 도움받았던 일을 떠올리며 정미는 그를 기꺼이 맞이하지만, 가정을 이룬 정미의 남편과 함께한 식사자리에서 뜻밖의 일이 생긴다. 과거 밴드를 함께하던 시절을 언급한 미소의 말이 남편 앞에서 곡해되고, 정미는 이를 바로잡지 못한 채 불안에 휩싸인다. 결국 그 균열은 미소를 이 집에서도 떠나게 만든다.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어진 미소는 다시 서울의 집들을 찾는다. 그에게 필요한 건 ʻ빛이 드는 큰 창’ 하나뿐이지만, 서울에서 그런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미소가 감당하기 벅찬 보증금과 불안한 조건을 전제로 한다. 이 도시에서 집을 갖기위해서는 자신을 지탱해 온 기준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다시 깨닫는다.
그 집에 머물던 여름밤처럼 문득 떠오를 때마다, 그들은 그리워하고 후회하며, 쓰리고도 반짝거리던 그 계절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결국 미소는 한강 변에 텐트를 친다. 빚 없이 살겠다는 자신의 기준을 지키면서도, 원하는 위스키와 담배도 내려놓지 않는다. 집 없이 사는 삶이 분명 ʻ스탠더드’한 선택도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ʻ유니크’하게 여겨질 일이지만, 미소는 안다. 텐트 천장에 매단 작은 랜턴의 빛이,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는 것을.
재개발을 앞둔 반지하 집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짐이 모두 빠진 방을 한참 둘러보던 옥주는 아버지의 재촉에 차에 오른다. 더는 머물 수 없는 집을 뒤로하고 남매는 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 집으로 향한다. 부모의 이혼, 불안정한 생계 그리고 할아버지 집으로의 이사까지, 옥주의 삶은 늘 어른들이 정한 방향으로 옮겨 다녔다.
할아버지 집은 도시 외곽의 오래된 2층 단독주택이다. 낡은 가구와 전축, 재봉틀과 벽시계, 텃밭의 채소와 포도나무가 남아 있는 이 집은 이전에 살던 공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품고 있다. 남매는 이 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낸다. 콩국수를 먹고, 모기장을 치고, 마당과 방 안을 오가며 낯선 공간에 조금씩 몸을 익힌다.
이곳은 옥주의 가족뿐 아니라, 결혼 생활의 균열을 안고 돌아온 고모까지 모여드는 임시 거처가 된다. 여름방학 동안 집은 모두의 피난처로 기능하지만, 할아버지의 병세가 깊어지면서 생긴 돌봄의 문제는, 어른 남매가 집을 팔고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는 선택을 고민하게 한다. 그 고민을 들은 옥주는 “할아버지 집에 우리가 얹혀 있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그 말 뒤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할아버지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장례 이후 고모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옥주의 가족은 할아버지 집으로 다시 온다. 할아버지 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의미로 머물 수는 없다.
저녁을 먹다 말고 옥주는 처음으로 쏟아내듯이 운다. 할아버지를 상실한 슬픔 속에, 미처 말로 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함께 터트렸을 것이다. 멀어질수록 선명해지는 엄마의 부재, 처음 겪는 애틋한 사랑의 실패와 어린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느꼈을 무기력함까지.
옥주와 동주 그리고 아빠와 고모. 어린 남매와 어른 남매 모두에게 이 집은 각기 다른 이름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해 여름이 오래 붙잡고 싶은 시간은 아니었을지라도 쉽게 잊히지는 않을 듯하다. 각자의 마음에 남은 미완의 감정들이 그 집에 머물던 여름밤처럼 문득 떠오를 때마다, 그들은 그리워하고 후회하며, 쓰리고도 반짝거리던 그 계절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글 황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