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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윤형근
진실로 서러움은 진실로 아름다움으로
화가 윤형근
1973년 만 45세부터 2007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화가 윤형근은 엄버Umber와 블루Blue를 큰 붓에 흠뻑 적셔 하얀 면포에 내려그었다. 윤형근의 그림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그가 지나온 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4년 10월, 서교동 화실에서 김환기와 자신의 작품 사이에 서 있는 윤형근의 모습.
고난의 길과 예술의 길
“나는 그 좋아야 했던 20대 청춘을 악몽 속에서 지냈다. 그래서 다사롭고 고운 색채가 잠깐 사이에 사라지고 어둡고 살거운 빛깔로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중략) 예술의 길은 고난의 길이란 것을 모르나. 그래서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쉬운 길, 가까운 길을 택하면 예술은 나오지 않는다. 먼 길, 험난한 길을 택해야 자연 예술은 향기를 피운다. 그래서 고난 속에 진리는 터득되고 마침내 표현될 따름이다.”
– 윤형근, 1986년
윤형근은 1928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45년 청주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7년 해방 후 처음 설립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이곳의 입학 시험장에서 후에 장인이 될 인물이자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그를 이끌어준 화가 김환기를 만났다. 김환기가 시험감독관이었다.) 그러나 윤형근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3년. 한국전쟁과 유신시대 등 그 사이의 시간을 채운 우리의 어두운 역사를 돌아볼 때, 그가 순탄치 않은 청년기를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윤형근의 첫 고난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시작됐다.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운동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류 조치를 당한 것으로, 이 사건으로 학교에서 제적당한다. 그 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바 빨갱이들의 정신 교육을 담당하겠다는 ‘보도연맹’에 끌려가 총살의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의 표현대로 “20대 청춘을 악몽 속에서 지냈다”. 사선을 넘나들며. 서울대학교 제적 후 홍익대학교로 편입해 1957년 만 29세의 나이로 졸업했다. 1960년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했고, 1961년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1970년대 초를 경계로 윤형근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는다. 그의 인생의 변화이자 작가로서의 변화였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통과된 와중에 1973년 윤형근이 근무하던 숙명여고에 부정입학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 교장에게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가 이튿날 중앙정보부에 잡혀갔다. 레닌 모자를 쓴다는 이유였다. 반공법 위반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한 달가량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됐고, 이후 1980년까지 파출소에 요시찰인물로 등록되어 감시당하는 생활을 했다. 그때 그의 작품들이 태어났다. 윤형근은 사회의 부조리나 자신의 억울함에 침묵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외면하지 않은 채 그림을 그렸다.
다색, 1980, 마포에 유채, 181.6×228.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엄버와 블루, 그리고 천지문
“내 그림 명제命題를 천지문天地門이라 해본다. 블루Blue는 하늘이요, 엄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天地라 했고, (내 그림의) 구도構圖는 문門이다.”
– 윤형근, 1977년
1973년 이후 윤형근은 마치 화면을 채우듯 천에 검은색 막대기를 죽 내려그었다. 윤형근 하면 떠올리는 작품들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스스로 잔소리를 싹 뺀 외마디를 그린다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의 기법과 사용하는 색채를 보면 저절로 수긍하게 된다. 그의 안에서 정제되었을 어떤 것들. 누루스름한 마포 위에 칠해진 울트라마린, 또는 암갈색은 한참을 타고 남은 나무조각 같아 보이기도 한다. 침잠하는 색채와 반복적으로 긋는 행위, 단순해 보이는 것들에서 강한 힘을 느낀다. “화가 극도로 났을 때 독한 내 무엇이 십분 화면에 배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일기를 쓰듯이 그날그날 기록해 보는 것이 내 그림이요 흔적이다.” 그의 말처럼 인생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 그리고 울분들이 그 안에 담겼을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에 직면했을 때, 그는 쓰러져 가는 검은 기둥을 그렸다.
이후 그의 작품에 문이 등장한다. 죽 내려긋던 행동을 멈추고 작품 한가운데를 그대로 비워둠으로써 문의 형상을 드러냈다. 윤형근은 당시 자신의 작품을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했다. 1977년경에 오면서 이러한 삼단 구도가 자주 등장한다. 검은 막대 사이로 보이는 밝고 텅 빈 공간, 시선은 그 공간 너머 먼 곳으로 나아간다. 문 앞에서 윤형근의 깊은 세계를 가늠해본다.
청다색, 1976-1977, 면포에 유채, 162.3×130.6cm
청다색, 1999, 마포에 유채, 182×291.5cm
어둠 앞에서
“예술은 이론을 가지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천진무구한 인품人品에서만이 영원불변한 향기로운 예술이 생성될 것임을 절감한다.”
– 윤형근, 1979년
한 남자가 있다. 커다란 천 위에 자를 대고 연필로 선을 그은다. 선 위에 테이프를 붙인다. 테이프가 만들어낸 네모반듯한 사각형 안을 물감으로 쓱 칠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다시 테이프를 떼어낸다. 윤형근의 후기 작품은 더 단순하다. 색채는 더욱더 검정색에 가깝다. 그의 그 엄격하고 거대한 어둠 앞에서, 침묵하는 그림 앞에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청다색, 2007, 면포에 유채, 162×130.5cm
“진실로 서러움은 진실로 아름다움하고 통한다.”
– 윤형근, 1988년
윤형근 전
A.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H. mmca.go.kr
T. 02 3701 9500
O. 2018년 12월 16일까지
에디터 김혜원
자료 제공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