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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철 — 재즈 뮤지션·프로듀서
가사가 없는 재즈는 곧잘 삶의 배경 음악이 된다. 자연스럽고도 무던하게 귓바퀴를 감아오던 멜로디가 문득 푸근하다고 느낄 때, 신난다고 느낄 때, 감미롭다고 느낄 때 곡 제목과 앨범을 찾아보곤 하는데, 나는 그렇게 자주 윤석철트리오를 만났다. 곡 소개에 깃들어 있는 문장문장을 읽으며 선율이 훨씬 입체적으로 들려온다는 걸 깨달은 어느 날, 재즈 클럽에서 라이브를 듣곤 확실히 알았다. 재즈는, 무언가 다르구나. 그 ‘무엇’을 알고 싶어서 윤석철을 찾았다. 재즈의 둘레를 거닐며 중심을 만들어 가는 그에게서 숨김없는 재즈의 말간 민낯 이야기를 듣는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와, 여기 건반이 정말 많네요.
장비에 욕심이 점점 더 커지고 있어요(웃음). 건반을 사고 나면 조금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지고, 열심히 하다 보면 새 장비에 욕심이 생기고… 하나씩 모으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재즈를 기반으로 곡을 만들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음악 하는 윤석철입니다.
“음악 하는 윤석철”이라는 말에는 윤석철트리오, 안녕의온도, 작곡자, 프로듀서 역할이 모두 담겨 있을 텐데요.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소개도 조금씩 달라질 것 같아요.
윤석철트리오는 제가 주축이 되어 재즈 연주곡을 만들고 셋이 함께 연주하는 팀이에요. 반면 안녕의온도는 윤석철트리오의 베이시스트가 곡을 만들고 저는 키보드 연주자로 함께하는 팀이죠. 때때로 노래도 부르고요. 다른 아티스트와 함께할 때는 주로 작·편곡에 참여하면서 프로듀서 역할을 맡고 있어요.
윤석철 하면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재즈를 떠올릴 거예요. 재즈와의 첫 만남 이야기부터 들어보고 싶어요.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아보면 ‘그게 재즈였구나.’ 싶은 순간이 있었어요. 어린 시절 가족 나들이를 갈 때면 아버지가 차에서 척 맨지오니Chuck Mangione의 [Feels So Good] 앨범을 자주 들으셨어요. 유명한 앨범이라 들으면 누구든 ‘아, 이거!’ 하실 거예요. 트레디셔널한 재즈 음반이라기보단 소프트 팝 계열인데, 그 앨범을 듣고 좋다고 생각한 기억이 나요. 베이스라는 게 어떤 악기인지도 모를 때인데 그 퉁기는 음을 입으로 부르고 다녔어요. 이것저것 골고루 듣던 아버지 덕분에 루이 암스트롱 베스트 앨범도 일찍 접하게 됐죠. 그때 제가 좋아하던 음악이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재즈더라고요.
재즈와 만난 데는 아버지 영향이 컸군요.
아버지는 어릴 때 가수가 꿈이셨대요. 여러 이유로 꿈은 접게 됐는데, 그 덕에 제가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좋아해 주셨고 응원도 받았어요. 그때만 해도 흔쾌히 허락하는 집이 많지 않았거든요. 대체로 등짝 스매싱(웃음).
스스로 음악을 선택해 들을 나이가 됐을 땐 어떤 음악을 좋아했어요?
저는 라디오를 듣던 세대라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나 〈이적의 별이 빛나는 밤에〉,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 등을 자주 들었는데, 그땐 좋은 노래가 나오면….
공테이프에 녹음하셨군요!
어? 맞아요!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군요(웃음). 라디오에서 나온 노래들을 녹음해서 만든 저만의 믹스 테이프를 선생님 몰래 듣곤 했어요. 공테이프에 녹음한 음악만의 맛이 있지 않나요? 요즘엔 음악을 다시 테이프로 듣고 있는데 감회가 새롭고 같은 곡도 다르게 들려요. 그때는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패닉, 전람회, 이상은, 토이 같은 뮤지션을 좋아했어요.
재즈는 우연히 배우게 됐다고 들었어요. 학원 선생님이 ‘재즈 좋아하는 아이’라고 오해하는 바람에 재즈 피아노에 입문하게 됐다고요.
중학생 때 반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기로 하고 악기를 배우자며 같이 음악 학원에 갔어요. 그 당시 저는 작곡가가 꿈이었기 때문에 건반을 배우다가 작곡을 해보면 어떨까 싶었는데요. 소통에 착오가 있어서 선생님이 제가 재즈를 좋아한다고 오해하시는 바람에 얼떨결에 재즈 피아노 선생님께 가게 됐어요. 그때 처음 재즈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됐는데 제가 좋아하던 음악과 비슷한 느낌이 있더라고요. 그때 마음이 동해서 재즈 피아노를 시작하게 됐죠.
오해가 아니었다면 재즈와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네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보다 더 잘나가지 않았을까요(웃음)? 워낙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재즈가 아니더라도 음악은 했을 것 같은데, 결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더 잘됐을 거라는 이야기는 농담이지만 알 수 없는 일이죠. 지금보다 잘 안됐을 수도 있고, 상상도 못 할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어느 인터뷰에서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접했어요. ‘둘의 대화’ 곡 소개에도 “왜 그때 그런 말을 한 걸까 왜 그때 그 사람은 그런 말을 한 걸까”라는 문장을 적어두셨던데, 말하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생각나는 대로 일단 뱉고 보는 편이어서 말하고 난 다음에 후회할 때가 많아요. 지금은 인터뷰니까 제 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랑 함께 있을 땐 말수가 적은 편이에요. 후회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단속하는 면도 있고요.
레코딩하실 때도 절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고요. 음악으로 기록하는 건 말로 남기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예술 활동은 대체로 비슷할 것 같은데,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글도 작은 아이디어와 영감에서부터 확장되는 창작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음악도 마찬가지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악기와 멜로디가 한꺼번에 떠오르는 건 아니기 때문에 살을 붙이는 과정이 필요해요. 저는 특정 멜로디가 떠오르면 먼저 휴대폰으로 음성 녹음을 해요. 파편을 기록해 두는 거죠. 그 파편을 바로 꺼내서 작업해 볼 때도 있고, 몇 년간 묵혀둔 걸 꺼내서 살을 붙이기도 해요. 녹음해 둔 멜로디에서 ‘뭔가 만들어 볼 수 있겠다.’ 하는 느낌이 ‘팟!’ 하고 찾아오면 그때 음악으로 발전시키고요. 입을 열면 바로 할 수 있는 말하기와는 시간적인 면이 조금 다르다고 봐요.
멜로디를 녹음한다니까 보컬이 있는 음악부터 떠오르는데요. 재즈에서 멜로디는 어떤 식으로 녹음하게 되나요?
저는 연주자여서 보컬 멜로디보다는 연주 멜로디가 익숙한데요. 음… 보컬 멜로디보다 조금 더 리드미컬하죠. ‘뚜룹뚜스르르땁따~’ 이런 식으로 재즈의 스캣처럼 녹음해요. 녹음된 음성은 저만 아는 신호여서 이걸 곡으로 만들려면 피아노로 먼저 그 멜로디를 연주해 봐요. 가끔 오래전에 녹음한 멜로디를 꺼내보면 생소하기도 하고, ‘이게 뭐지?’ 싶을 때도 있거든요. 그런 멜로디는 아무리 만져도 만족스러운 음악으로 만들기 어려워요. 아직 때가 안 된 멜로디인 거죠. 그런 멜로디는 다시 묵혀두고 ‘팟!’ 하는 순간이 올 때를 기다려요.
음악 만들 때 가치관이나 취향을 많이 투영한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의 음악 기록을 통해 내 취향의 변화를 체감하기도 할 것 같아요.
그럼요. 사람은 그때그때 생각이 달라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저도 취향이나 가치관에 변화가 있었어요. 저는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마흔이 되는데, 최근에는 나이 먹어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청춘이 끝나가고 있다는 걸 실감하는 때죠. 올해 8월에 발매한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에도 그런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제 인생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담아 만들었거든요. 이전에는 제가 즐거워하는 것, 혹은 주위에서 발견한 친근한 소재들로 음악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제 이야기를 조금 더 많이 담게 됐어요.
어떤 의미에서 청춘이 끝나간다고 느꼈어요?
단순히 나이에서, 숫자에서 오는 감각이에요.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보통 마흔이 될 때 여러 생각이 든다고들 하더라고요. 저는 서른이 될 때 정말 신났거든요. 오히려 20대 땐 30대가 빨리 되고 싶었어요. 20대는 스스로 조금 어리다고 생각했고, 어딜 가도 어리다는 이유로 제대로 인정을 못 받는 것 같았거든요. 어리숙한 분위기를 빨리 지우고 싶었죠. 30대가 되면 독립도 하고,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서른이 됐을 땐 정말 좋았어요. 실제로 30대엔 연습을 많이 하고, 활동도 풍성하게 했어요. 음악도 수월하게 만들었고요.
근데 마흔을 앞두고부터 제 몸이 예전 같지 않더라고요. 물리적으로 몸 상태가 달라지니까 약간의 위기감이 찾아왔어요. 한두 군데씩 아프고, 고장 나기 시작하고, 회복 속도도 더뎌졌는데요. “늙어 죽을 때까지 음악 하면 행복할 것 같다.”는 선배 뮤지션들 말이 그저 바람인 줄 알았는데,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체감하게 됐어요. 실제로 음악에 매진하다 생을 마감한 뮤지션들이 얼마나 몸 관리에 철저했는지 조금이나마 알아가고 있죠. 몸뿐만 아니라 생각도 그래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보수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깨닫는데, 스스로 ‘나 지금 꼰대 같은데….’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런 걸 깨달으면서 모든 게 조금씩 조심스러워지더라고요. 요즘은 제 변화와 문제 상황을 잘 헤쳐 나가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요. 이 생각이 앞으로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제가 하는 생각들을 깨부수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지금 하는 생각을 담은 곡이 아니라 깨부수는 곡을 원하시는군요.
네. 음악에 지금 제 생각들은 안 담고 싶어요. 제가 원하지 않는 저를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요. 오히려 제 생각을 깨뜨리고, 규율과 통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윤석철트리오는 팀명처럼 트리오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트리오란 “미니멀한 체계에서 최선의 인터플레이를 할 수 있는 포맷”이라고 소개하신 적이 있죠. 트리오 구성에 관해 조금 더 이야기해 주실래요?
재즈에서의 트리오는 드럼, 베이스 같은 최소한의 리듬 세션과 피아노, 딱 이렇게 셋으로 이루어져요. 재즈 편성에서 가장 미니멀한 구성 중 하나죠. 인터플레이는 순간순간 즉각적인 연주에 서로 반응하는 걸 의미하는데요. 재즈는 다른 음악에 비해 즉흥적인 장르예요. 대중가요만 해도 일종의 규칙이 있어요. 벌스가 끝나면 스네어가 세 번 들어오고, 그때 히트가 들어오고 그다음 하이햇이 들어오고… 하는 식으로요. 반면 재즈 트리오는 그렇지 않아요. 원래는 여덟 마디로 구성된 곡이어도 네 마디만 하고 싶다면 즉흥적으로 바꿀 수 있죠. 함께 연주하는 사람들은 바뀐 연주에 맞춰 연주하면서 약간 변주된 흐름을 만들어 가요. 예컨대, 제가 구성에 없던 ‘따따다다단’을 즉흥적으로 연주한다면 다른 멤버들이 이를 파악하고 ‘따따다다단’ 리듬이 연상되게끔 즉석에서 다른 연주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인터플레이는 재즈 음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예요. 알고 들으면 재즈가 훨씬 재미있고, 라이브에서도 인터플레이를 찾아내는 재미가 있죠.
인터플레이를 잘하기 위해서는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합이 잘 맞아야 할 것 같아요.
특히 합이 잘 맞는 사람들이 있어요. 대화가 잘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무조건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만이 좋은 건 아니에요. 제가 A를 연주했을 때 이를 캐치하고 바로 따라와 주는 연주자가 있는 반면, A를 연주했을 때 ‘지금 여기서 A를?’ 하는 생각으로 F로 나아가는 연주자도 있거든요. 정답이 있다기보단 스타일이 다른 거여서 연주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취향이 갈릴 수 있어요. 전자가 조화로운 느낌이라면 후자는 실험적인 느낌을 주죠. 어떤 연주든 나름대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합이 잘 맞는 연주가 좋은 건 아니에요. 적절히 섞어가며 연주하는 편이 저는 좋더라고요. 합이 잘 맞는 연주자와 함께하는 건 편안하고 연주가 매끄럽지만 계속 이어지다 보면 도태될 우려가 있어요. 하나에 함몰되기 쉽고요. 반면, 자기주장이 센 연주자와 함께하다 보면 간혹 의견이 안 맞을 때도 있지만 저도 제가 추구하는 바를 한 번 더 생각하면서 새롭게 나아갈 수 있어요. 여러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을 계속해서 경험해 나가고 싶어요. 윤석철트리오는 오랫동안 함께하면서 합이 잘 맞춰진 팀이어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유연한 시각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윤석철트리오는 “재즈에 힙합이나 일렉트로닉과 같은 장르를 결합한다.”고 자주 소개되죠. 2022년에 발매한 EP [익숙하고 일정한]에는 국악 요소도 결합했는데, 이러한 시도에 관해 들어보고 싶어요.
재즈는 예부터 본연의 것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것과 퓨전 하는 식으로 발전해 온 장르예요. 앞으로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요. 새로운 시도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정체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다른 시도를 해보려고 해요. 재즈 트럼펫 연주자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도 70년대부터 재즈와 전자 사운드로 퓨전 재즈를 선도해 왔는데요. 그러한 정신을 이어가는 게 재즈 연주자로서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재즈가 다른 장르에 비해 퓨전에 열려 있다 보니 힙합, 일렉트로닉, 국악 같은 요소를 결합하는 게 특이해 보이겠지만, 사실 재즈 역사를 살펴보면 제 명함으로 내밀긴 좀 머쓱해요(웃음). 또한 재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장르라고 생각하는데요. 과거에 만들어진 재즈 음악이 지금도 활발하게 연주되고,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예요. 지금 제가 만든 음악이 미래엔 과거가 되어 연주될 수 있도록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면서 헤리티지를 쌓아가고 싶어요. 그럴 수 있는 열린 장르가 재즈이기도 하고요.
윤석철트리오의 곡 소개를 읽다 보면 눈앞에 한 장면이 펼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거대한 이상이나 목표보다도 사소한 경험이나 장면이 담겨 있어서 좋더라고요.
저는 큰 이상이나 원대한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편은 아니어서 음악을 만들 때 주로 제 주변을 관찰하곤 해요. 누군가와 대화 나누면서 느낀 것, 발견한 것들로 생각하는 편이죠. 그러다 ‘아!’ 하는 느낌과 함께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 곡으로 만들 준비를 해요. 녹음해 둔 멜로디를 듣다가 ‘팟!’ 하는 느낌과도 비슷하죠. 얼마 전에도 이것저것 상상하다가 ‘이거 진짜 재미있겠다.,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뭐더라, 진짜 재미있었는데.
따로 기록해 두진 않나요?
원래는 기록하는데 상상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이야기는 놓칠 때도 있어요. 아, 정말 재미있는 상상이었는데 까먹다니(웃음). 하지만 분명히 다시 생각날 거예요. 영감을 받은 장면이라면 돌아 돌아 다시 제게로 올 테니까요. 그때는 정말 음악으로 써봐야겠죠.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에서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 이야기도 보이는 것 같아요. ‘오일장’ 같은 곡이요.
― ‘오일장’ 곡 소개 전문
어릴 땐 지금보다 훨씬 쾌활했어요. 지금은 크게 표현할 일도 잘 없고, 내성적으로 변하면서 SNS에 뭔가를 쓰는 일도 줄었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곡에 제 이야기를 담는 일이 더 많아졌는데, 모든 게 직접 경험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특히 ‘오일장’은 제 과거 경험이라기보단 제목을 정하면서 상상한 이야기죠. 다섯 박자로 진행되는 곡이라 오일장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됐고, 멜로디가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여서 오일장이란 단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곡 소개는 사족을 붙인다는 느낌으로 상상해서 쓴 거고요. ‘오일장’은 음악이 먼저 나오고 제목과 이야기를 입힌 경우지만, 반대 경우도 있어요.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는 제목이 먼저 정해지고 음악이 나온 곡이었죠.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라는 문장이 마음에 와닿아서 이 문장을 곡에 써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잘 어울리는 멜로디가 나와서 곡 제목으로 쓰게 됐어요.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어도 앨범 곳곳에 크고 작게 윤석철이 숨어 있군요. 2019년에 발매한 [SONGBOOK] 이야기도 해보고 싶은데요. 윤석철트리오 1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앨범이었죠. 벌써 15년 차 팀이 됐지만, 음악 기록이 10년이 됐을 때 감회는 또 새로웠을 것 같아요.
재즈는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변하는 지점이 많은 장르예요. 그래서 [SONGBOOK]에는 이전 앨범 곡들을 다시 연주해서 재수록하기도 했는데요. 재즈 앨범에는 기존에 발표한 곡을 새롭게 녹음해서 수록하거나 라이브 버전을 녹음해서 넣는 등 같은 곡이 여러 번 수록되는 일이 많아요. 같은 곡이어도 어디에서, 어떤 컨디션으로 연주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거든요. 재녹음이 윤석철트리오만의 특별한 시도는 아니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느냐에 따라서도 연주가 달라지기 때문에 저희에겐 지난 곡들을 돌아보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어요.
즉흥성이 두드러지는 장르라 연주할 때마다 달라지기도 하겠군요.
그렇죠. [SONGBOOK]에 실린 ‘Not Yet’은 정규 1집 [Growth]에 수록된 곡인데요. 1집 발매는 2009년이었지만 첫 녹음은 2006-2007년 즈음이었으니 [SONGBOOK]에 재수록할 당시 10년이 훌쩍 넘은 곡이었어요. 그 당시 제가 보기엔 애송이 시절이라(웃음) 아쉽다는 생각이 있어서 조금 더 다듬어서 재녹음하게 됐는데요. ‘Not Yet’처럼 아쉬워서 다시 녹음한 곡도 있지만, 조금 다른 편곡으로 녹음해 보고 싶은 욕심나는 곡도 있었어요. [SONGBOOK]은 그간 쌓아온 우리 곡들에 새로운 시도를 하며 만들어 간 앨범이어서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걸 새삼 실감한 작업이기도 했어요.
이번 호 주제어가 ‘기록’인데요. 저마다 기록의 방식은 다를 거예요. 글, 사진, 그림, 영상 등 다양할 텐데 음악으로 기록하는 건 어때요?
음악이라고 해서 다른 장르로 기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아요. 재즈 음악으로 한정해서 생각해 보면, 특징적인 점은 연주의 가능성이 아주 많고 정답이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 솔직하게 지금의 나를 기록할 수 있다는 거예요. 같은 음악이라고 해도 대중가요라면 추후 수정하거나 다듬어서 곡을 만드는 게 가능한데요, 재즈는 즉흥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수정할 수가 없거든요. 연주한 그대로 기록돼 버리는 장르죠. 그래서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해요.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에 수록된 ‘말 없는 사람’이 그런 경우인데, 녹음할 때 감기 기운도 있고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거든요. 힘이 하나도 없어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시작했으니 끝을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간신히 마쳤어요. 사실 나중에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녹음했는데요. 집에 와서 들어보니까 생각보다 연주가 좋더라고요. 그다음 날 다시 한번 녹음했는데, 이전 연주를 이길 수가 없었어요. 컨디션이 안 좋다 보니 조금 릴렉스하게 연주됐는데 ‘말 없는 사람’이란 곡의 테마와도 잘 어울리는 결과가 나왔어요. 처연한 분위기가 잘 표현된 것 같아서 아프길 잘했다 싶기도 했죠(웃음).
재즈는 순간에 솔직한 장르로군요.
곡을 만들 때도 그렇지만 특히 잼 세션 때 도드라지는 특성이죠. 잼은 따로 합을 맞추거나 연습해 보지 않고 무대에 올라 즉흥 연주를 극대화하는 연주를 뜻하는데, 말이 아니라 연주로 대화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재즈 뮤지션에겐 굉장히 필요하고, 소중한 연주죠.
석철 씨는 클럽 에반스에서 주기적으로 잼 세션을 진행하고 있죠. 즉흥적인 만큼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정말 많죠. 한번은 무대 뒤편에서 아마추어 재주 연주자들의 잼을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연주를 하다가 틀렸어요. 재즈에는 정답이 없다고 했지만 특정 곡을 연주할 때는 주어진 형식이 있거든요. 이를테면 ‘어텀 리브스Autumn Leaves’나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 같은 음악을 연주한다고 하면, 정해진 큰 틀은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 틀렸을 땐 빠르게 다른 연주자들이 거기에 맞춰 연주를 바꾸거나 틀렸다는 걸 인지하고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연주자 중 누구도 틀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어요. 한 사람이 틀리니까 또 다른 사람이 틀리고, 또 다른 사람이 틀리고… 연쇄적으로 틀린 연주가 이어지면서 모두 다른 데를 연주하기에 이르렀죠. 재즈 뮤지션들은 무대 뒤편에서 “어떡해, 누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즐거워하면서 “망했다!” 하면서 웃기도 하고…. 저는 마음속으로 “제발 맞춰줘!” 하고 간절히 바랐어요. 그런데 무대 뒤편과는 달리 관객분들은 집중해서 연주를 듣고 계시더라고요. 하드 리스너라면 알아챌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으니까요. 결국 연주자와 뮤지션, 관객이 전부 다른 상태로 무대를 보게 됐는데 그 풍경이 재미있더라고요. 결국 어느 순간 한 연주자가 잘못된 걸 캐치하고 조율한 덕분에 연주는 잘 마무리됐어요. 연주가 제자리를 찾아갈 때 뒤에서 뮤지션들끼리 “파이팅!” 하면서 응원하던 게 떠오르네요(웃음).
윤석철트리오도 벌써 15년이 됐고, 잼 세션도 800회를 넘어섰어요. 좋아하지 않으면 이렇게 긴 시간 이어오기 힘들 거라 생각하는데요. 음악 하는 원동력을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하시던데, 석철 씨가 생각하는 즐거움은 어떤 의미예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순수한 즐거움, 둘째는 즐겁다고 생각하는 즐거움이에요. ‘즐겁지 않더라도 즐겁다고 생각하면 즐겁다, 기쁘다고 생각하면 기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하다.’는 생각으로 자기 최면을 거는 거죠. 재즈는 순수하게 즐거워서 시작한 거지만 직업이 된 이상 매일 즐거울 수만은 없거든요. 일로 대하게 되면 몸도, 마음도 지치는데 즐겁다고 생각하면서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과 일에서 오는 괴리를 최대한 줄이고 있어요. 그럴 때 진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요.
즐겁게 음악 하는 모습은 유튜브 채널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어요. 유튜브〈윤석철(Yoon Seokcheol)〉채널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볼까요?
인터뷰에서 유튜브 이야기를 하려니까 새삼스럽네요(웃음). 유튜브가 막 부상할 때 주위에서 유튜브는 무조건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채널을 만들게 됐어요. 저만의 B급 감성을 담은 콘텐츠를 업로드했는데, 지금은 일의 연장이라기보단 하나의 SNS처럼 사용하고 있어요. 직접 해보니까 콘텐츠 하나를 만드는 데 엄청나게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전문 유튜버가 되려던 건 아니었지만, 하다 보니 유튜브로 작업하는 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확실히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고, 발표하고, 앨범을 만드는 사람인 것 같아요. 지금은 앨범 바깥에서 곡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싶을 때 유튜브를 소통 창구 중 하나로 사용하고 있어요.
〈거침없이 하이킥〉의 한 장면 ‘호박고구마’를 재즈로 풀어낸 ‘1분 재즈’ 시리즈나 게임 ‘동물의 숲’ 오프닝 연주 영상 보면서 기획이 참신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어서 기획과 촬영, 편집이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더라고요.
1분 재즈 시리즈도 처음 했을 땐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콘텐츠 길이가 점점 짧아져서 뭐든 틱톡이나 릴스로 30초, 15초 길이로 보여주곤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재즈를 줄여서 보여주는 데 회의감이 생기더라고요. 몇 초 안 되는 짧은 영상 하나에도 엄청난 정성이 들어가는데 제가 열과 성을 쏟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짧은 호흡은 제가 추구할 방향이 아니란 생각도 들었어요. 오히려 콘텐츠를 만들어 보면서 음악 만드는 데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됐죠. 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텐데 경험하고 나니까 저한테 맞는 기록 방식은 음악이란 걸 확신하게 됐어요.
석철 씨는 원래 작곡을 하고 싶었다고 했죠. 왜 연주자보다 작곡에 더 매력을 느꼈어요?
어릴 때는 연주자라는 건 서너 살부터 피아노를 친 영재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고 여긴 거죠. 저는 제가 하는 생각,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기록하고 싶던 건데요. 그러려면 작곡가가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막연하게 작곡가가 멋있다는 생각도 자주 했고요.
다른 아티스트 곡 작업도 하고 있으니 두루 꿈을 이루신 거네요. 다른 아티스트 곡 작업 땐 “아티스트를 돋보이게 하고 그 사람의 생각을 얼마나 이끌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작업하신다고 들었어요. 어떤 의미에선 공동 기록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맞아요. 다른 아티스트와 작업할 때는 우선은 상대방이 잘하는 장르를 이해하는 데 먼저 초점을 맞춰요. 잘 아는 아티스트의 작업을 맡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충분히 음악을 듣고 가사를 음미해 보려고 해요. 음악적인 요소를 먼저 이해하고, 기능적으로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율해 나가죠. 이전 곡들의 작·편곡가는 누구인지도 살펴보고요. 그러고 나서 아티스트와 대면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삶의 궤적이 어떻게 흘러온 걸까 상상도 해봐요. 최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취향을 파악하고, 음악을 통해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도 알아가는데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욱 그 사람다운 음악이 나오는 것 같아요. “끝내주게 해줘.”라고만 이야기해도 어떤 걸 원하는지 알 수 있는 친한 아티스트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진지하게 그 사람을 알아가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오해 없이 효율적이고 순조롭게 작업할 수 있거든요.
지금까지 해온 음악, 다른 아티스트를 위한 작업 그리고 앞으로 해나갈 음악들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기록물이 될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음악 기록을 남기고 싶어요?
저는 여전히 옛날 음악을 많이 들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분도 있고, 슬슬 생이 저물어가는 뮤지션도 있죠. 제 음악도 그렇게 쭉 이어지다가 자연스럽게 저물어가면 좋겠어요. 윤석철이란 사람을 속속들이 알진 못하더라도 후대의 누군가가 제 음악을 계속 들어주었으면 싶죠. 제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제 음악은 계속 남아서 “2000년대 한국 재즈 신에 윤석철이란 뮤지션이 있었대.” 하고 누군가 제 곡을 연주한다면, 정말 행복할 거예요.
이 인터뷰도 윤석철이란 뮤지션에 대한 기록물이 되겠죠.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이야기를 남겨 주신다면요?
윤석철트리오는 올해 연말 공연을 앞두고 있어요.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를 온전하게 소개하는 자리가 될 예정인데요. 무대에서 연주하는 건 앨범과 또 다른 느낌이 있기 때문에 한 번쯤 라이브를 들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연말 공연을 잘 마치고 나면 윤석철의 2024년을 잘 보내주는 데 집중하려고요. 아직 계획한 건 없지만 내년에는 지방에서도 공연을 조금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이번 앨범이 나온 이후에 지방에 계신 분들과 제대로 만날 일이 없었거든요. 몇 차례 공연을 하고 나면 다음 앨범을 구상하게 되겠죠?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다음 앨범에 수록할 곡들을 만들어 나가려고요. 오늘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건 조금 나중 일이 될 것 같지만요(웃음).
재즈를 가까이 두지만 친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얕게는 듣지만 깊게는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히 재즈를 좋아하고 있다. 이참에 한 발짝 다가가고 싶은 맘에 대화를 나눈 다음 날 윤석철에게 넌지시 메시지를 보냈다. “재즈 입문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앨범 있나요?” 금세 답장이 도착한다.
1. Bill Evans, [Alone](1968)
“재즈를 처음 시작했을 무렵, 처음 구매한 앨범 중 하나입니다. 첫 감상은 ‘우와, 뭐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였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진가를 알아간 앨범이죠. 정말 좋은 앨범이에요.”
2. 칸노 요코(작곡가), 〈카우보이 비밥〉 OST
“저의 올타임 베스트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의 사운드트랙은 칸노 요코라는 작곡가가 만들었는데요. 학생 때, 재즈를 열심히 배워서 〈카우보이 비밥〉 OST 같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음악을 만들면 정말 멋지겠다고 생각했어요. 최근에는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서 다시 정주행했는데 음악이 또 다르게 들리더군요.”
3. Bala Desejo, [Sim Sim Sim]
“브라질의 4인조 그룹이 2년 전 발매한 음반인데 최근에 정말 많이 들었어요. 브라질 음악의 현재를 알 수 있는 앨범이라고 생각해요.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듣자마자 매료되어서 여기저기 전파하고 있습니다. Bala Desejo가 내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열심히 홍보할 거예요!”
에디터 이주연 (산책방)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