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솔한 찰나가 기록되는 장르

윤석철 — 재즈 뮤지션·프로듀서

가사가 없는 재즈는 곧잘 삶의 배경 음악이 된다. 자연스럽고도 무던하게 귓바퀴를 감아오던 멜로디가 문득 푸근하다고 느낄 때, 신난다고 느낄 때, 감미롭다고 느낄 때 곡 제목과 앨범을 찾아보곤 하는데, 나는 그렇게 자주 윤석철트리오를 만났다. 곡 소개에 깃들어 있는 문장문장을 읽으며 선율이 훨씬 입체적으로 들려온다는 걸 깨달은 어느 날, 재즈 클럽에서 라이브를 듣곤 확실히 알았다. 재즈는, 무언가 다르구나. 그 ‘무엇’을 알고 싶어서 윤석철을 찾았다. 재즈의 둘레를 거닐며 중심을 만들어 가는 그에게서 숨김없는 재즈의 말간 민낯 이야기를 듣는다.

재즈는 연주의 가능성이 아주 많고 정답이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 솔직하게 지금의 나를 기록할 수 있어요.
즉흥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녹음하고 나면 
하나하나 수정할 수가 없어서
연주한 그대로 기록되는 음악이기도 하고요.

돌아보니 재즈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와, 여기 건반이 정말 많네요.

장비에 욕심이 점점 더 커지고 있어요(웃음). 건반을 사고 나면 조금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지고, 열심히 하다 보면 새 장비에 욕심이 생기고… 하나씩 모으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재즈를 기반으로 곡을 만들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음악 하는 윤석철입니다.

 

“음악 하는 윤석철”이라는 말에는 윤석철트리오, 안녕의온도, 작곡자, 프로듀서 역할이 모두 담겨 있을 텐데요.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소개도 조금씩 달라질 것 같아요.

윤석철트리오는 제가 주축이 되어 재즈 연주곡을 만들고 셋이 함께 연주하는 팀이에요. 반면 안녕의온도는 윤석철트리오의 베이시스트가 곡을 만들고 저는 키보드 연주자로 함께하는 팀이죠. 때때로 노래도 부르고요. 다른 아티스트와 함께할 때는 주로 작·편곡에 참여하면서 프로듀서 역할을 맡고 있어요.

 

윤석철 하면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재즈를 떠올릴 거예요. 재즈와의 첫 만남 이야기부터 들어보고 싶어요.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아보면 ‘그게 재즈였구나.’ 싶은 순간이 있었어요. 어린 시절 가족 나들이를 갈 때면 아버지가 차에서 척 맨지오니Chuck Mangione의 [Feels So Good] 앨범을 자주 들으셨어요. 유명한 앨범이라 들으면 누구든 ‘아, 이거!’ 하실 거예요. 트레디셔널한 재즈 음반이라기보단 소프트 팝 계열인데, 그 앨범을 듣고 좋다고 생각한 기억이 나요. 베이스라는 게 어떤 악기인지도 모를 때인데 그 퉁기는 음을 입으로 부르고 다녔어요. 이것저것 골고루 듣던 아버지 덕분에 루이 암스트롱 베스트 앨범도 일찍 접하게 됐죠. 그때 제가 좋아하던 음악이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재즈더라고요.

 

재즈와 만난 데는 아버지 영향이 컸군요.

아버지는 어릴 때 가수가 꿈이셨대요. 여러 이유로 꿈은 접게 됐는데, 그 덕에 제가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좋아해 주셨고 응원도 받았어요. 그때만 해도 흔쾌히 허락하는 집이 많지 않았거든요. 대체로 등짝 스매싱(웃음).

 

스스로 음악을 선택해 들을 나이가 됐을 땐 어떤 음악을 좋아했어요?

저는 라디오를 듣던 세대라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나 〈이적의 별이 빛나는 밤에〉,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 등을 자주 들었는데, 그땐 좋은 노래가 나오면….

 

공테이프에 녹음하셨군요!

어? 맞아요!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군요(웃음). 라디오에서 나온 노래들을 녹음해서 만든 저만의 믹스 테이프를 선생님 몰래 듣곤 했어요. 공테이프에 녹음한 음악만의 맛이 있지 않나요? 요즘엔 음악을 다시 테이프로 듣고 있는데 감회가 새롭고 같은 곡도 다르게 들려요. 그때는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패닉, 전람회, 이상은, 토이 같은 뮤지션을 좋아했어요.

재즈는 우연히 배우게 됐다고 들었어요. 학원 선생님이 ‘재즈 좋아하는 아이’라고 오해하는 바람에 재즈 피아노에 입문하게 됐다고요.

중학생 때 반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기로 하고 악기를 배우자며 같이 음악 학원에 갔어요. 그 당시 저는 작곡가가 꿈이었기 때문에 건반을 배우다가 작곡을 해보면 어떨까 싶었는데요. 소통에 착오가 있어서 선생님이 제가 재즈를 좋아한다고 오해하시는 바람에 얼떨결에 재즈 피아노 선생님께 가게 됐어요. 그때 처음 재즈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됐는데 제가 좋아하던 음악과 비슷한 느낌이 있더라고요. 그때 마음이 동해서 재즈 피아노를 시작하게 됐죠.

 

오해가 아니었다면 재즈와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네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보다 더 잘나가지 않았을까요(웃음)? 워낙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재즈가 아니더라도 음악은 했을 것 같은데, 결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더 잘됐을 거라는 이야기는 농담이지만 알 수 없는 일이죠. 지금보다 잘 안됐을 수도 있고, 상상도 못 할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어느 인터뷰에서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접했어요. ‘둘의 대화’ 곡 소개에도 “왜 그때 그런 말을 한 걸까 왜 그때 그 사람은 그런 말을 한 걸까”라는 문장을 적어두셨던데, 말하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생각나는 대로 일단 뱉고 보는 편이어서 말하고 난 다음에 후회할 때가 많아요. 지금은 인터뷰니까 제 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랑 함께 있을 땐 말수가 적은 편이에요. 후회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단속하는 면도 있고요.

 

레코딩하실 때도 절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고요. 음악으로 기록하는 건 말로 남기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예술 활동은 대체로 비슷할 것 같은데,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글도 작은 아이디어와 영감에서부터 확장되는 창작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음악도 마찬가지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악기와 멜로디가 한꺼번에 떠오르는 건 아니기 때문에 살을 붙이는 과정이 필요해요. 저는 특정 멜로디가 떠오르면 먼저 휴대폰으로 음성 녹음을 해요. 파편을 기록해 두는 거죠. 그 파편을 바로 꺼내서 작업해 볼 때도 있고, 몇 년간 묵혀둔 걸 꺼내서 살을 붙이기도 해요. 녹음해 둔 멜로디에서 ‘뭔가 만들어 볼 수 있겠다.’ 하는 느낌이 ‘팟!’ 하고 찾아오면 그때 음악으로 발전시키고요. 입을 열면 바로 할 수 있는 말하기와는 시간적인 면이 조금 다르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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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산책방)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