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도 웃을 일은 있을 거야

몸과 인문한, 브리짓 존스의 일기

T H E R E W I L L B E
A L A U G H I N G
MATTER IN HELL

지옥에서도 웃을 일은 있을 거야

날씨가 추워질수록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듯 마음이 허해진다. 나는 그럴 때면 코믹한 책을 보는데, 생각보다 큰 효과가 있다. 낙엽 굴러가는 소리에도
눈물이 나는 이 계절, 웃을 일이 없다면 『몸과 인문학』, 『브리짓 존스의 일기』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웃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좋은 약인지 몸소 알았으면 한다. 대신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는 피해주길. 혼자 피식피식 웃다간 어떤 취급을 받을지 모르니까.

브리짓 존스를 처음 만난 건 스물다섯 살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3년 사귄 남자친구에게 차였다. 그러고 나서 줄줄이 거지똥닦개 같은 놈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았다(고 나는 말하지만 그 쪽이 보기엔 나야말로 거지왕 김춘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나는 내 인생의 바닥에 있었다. 말했다시피 세 남자에게 연달아 차였고, 반 백수 상태였으며, 매일 아침 TV는 야멸찬 목소리로 전국의 청년 실업자 수를 읊으며 나를 깨웠고, 나는 침대에서 울며 기어 나와 술에 취해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거의 매일을 수영장 바닥을 기는 기분으로 살았고, 거의 매주 내가 느낄 수 있는 좌절감과 모멸감의 워스트 1, 2, 3 리스트를 갱신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도무지 이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올 길은 없어 보였다. 그 시점에 누군가가 내게 그 책을 추천해 주었다. “한번 읽어봐, 정말 웃겨.” 그때까지 나는 어떤 책을 ‘웃기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나 지식의 보고여야 했지, 웃겨서는 안 되는 거였다. 『유머 대백과』 같은 걸 빼놓고 말이다. 아무튼 그게 신기해서 나는 그 책을 사서 읽었다. 그리고 그때 내 인생에는 한 줄기 빛이 비쳤다고나 할까.

정신병자처럼 전화기만 노려보며 쉬지 않고 음식을 집어먹는 걸로 이틀을 날려 버렸다. 왜 그는 전화를 걸지 않았을까? 왜? 나하고 도대체 뭐가 안 맞는 거지? 전화를 걸지도 않을 거면서 뭣 때문에 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한 거지? 그리고 전화를 확실히 걸려고 했다면 왜 주말에 걸겠다고 했을까?

헬렌 필딩, 『브리짓 존스의 일기』

그 웃기는 책 속에는 고상이나 떨면서 사람 기죽이는 잘난 여자가 아닌, 나와 비슷한 위기를 겪고 있는 부족한, 몹시 부족한 여자가 있었다. 전화하지 않는 남자 때문에 몇날며칠을 머릿속으로 온갖 장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몸무게 0.5킬로그램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자기계발서와 연애지침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마음은 자신감과 자기비하 사이에서 널을 뛰며, ‘천하의 바람둥이조차도 나에게만은 다를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가졌다가 결국 이용만 당한 후에 걷어차이고, 이상 속의 자아와 진짜 자아를 구분하지 못해 늘 사고만 치는 여자, 브리짓 존스 말이다.

밤마다 책을 붙들고 미친 여자처럼 낄낄대며 웃었다. 웃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마치 내 인생을 보면서 웃고 있는 기분이었다. 코미디 영화를 보면, 배우가 심각하고 진지하고 절박할수록 관객은 더 많이 웃게 된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여자,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 표현을 빌리자면 팔자 사납고 박복한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보니 나는 그저 세상에서 가장 모자라고 어리석고 궁상맞은 여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공동 탈의실이 싫다.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면서 슬그머니 상대방의 몸매를 쳐다본다. 자기가 어느 모로 보나 빼어난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은, 미소를 띠고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춤을 추거나 거울 앞에서 모델 같은 포즈를 취하면서 “나 좀 뚱뚱한 거 같지 않아?” 하고 엄살 섞인 질문을 해댄다. 그들이 으레 하나씩 달고 다니는, 뭘 입어도 하마 같아 보이는 뚱보 친구에게.

헬렌 필딩, 『브리짓 존스의 일기』

이 책의 묘미는 이런 솔직함에 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거의 비슷하다. 남들 앞에서는 턱을 치켜들고 어깨에 힘을 주지만, 집에 돌아가 혼자 있을 때는 혹시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관용, 인류애, 이타심이 아니라 지극히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눈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지금 할 일을 언제나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물론,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오늘은 지방덩어리 속으로 다이빙하기를 매일 반복한다. 

헬렌 필딩은 우리가 남에게 감추고 싶은 이런 결점과 속마음, 속물근성 같은 것들에 성급하게 메스를 들이대거나 경멸하는 어조로 훈계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그 못난 모습들을 유쾌하고 발랄하게 묘사하는데, 결국 그것들이 웃기다 못해 때로는 귀엽기까지 한 ‘인간미’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동의보감과 사주명리학 등의 고전을 통해 현재의 삶을 탁월하게 진단하고 처방하는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몸과 인문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머의 기예’를 터득한 이들은 결코 자신의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지독한 상황에서도 그 지독함에 휘둘리지 않고 생을 경쾌하게 변주한다. 

고미숙, 『몸과 인문학』

유머감각이라는 건 자신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다. 내 가장 못난 면까지도 받아들이고 내보일 수 있는 용기와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힘과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안타까운 여자, 박복한 여자,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웃긴 여자’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

자기계발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멋진 여자가 된 후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환생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목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가장 못난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험난한 여정의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다. 사실 우리의 결점들은 반질반질한 액정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눈에 띄는 자잘한 생활 기스 같은 것들이다. 좀 거슬리기는 하지만, 인간미의 방증이다.

니체가 말했던가.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라고. 왜냐하면, 단 한 번도 자기에 대한 탐구를 시도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앎이란 인식론, 존재론 같은 특정과목의 이름이 아니다. 어떤 공부를 하건 그것이 온전히 자기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고미숙, 『몸과 인문학』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읽고 치열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거친 후에 나는 다시 태어났다. 물론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고, 오만과 편견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비웃을 수 있는 유머감각이 생긴다고 해서 갑자기 나 자신이 미칠 듯이 사랑스러워진다거나,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해줄 멋지고 돈 많은 변호사가 짠하고 나타나는 건 아니다.

그저 인생이 전보다 조금 가벼워진다. 그리고 내가 전보다 조금은 덜 미워진다.

당황하지 말자. 나는 확신에 차 있고, 민감하고 포용력 있는 견실한 여성이다. 나의 자신감은 일의 성취 자체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나온다. 나는 확신에 차있고 민감하고… 오, 맙소사. 소용없다. 난 수영장과 냉장고를 뒤섞어 놓은 것 같은 바깥 세계로 나가고 싶지 않다. 

헬렌 필딩, 『브리짓 존스의 일기』

어쨌든 중요한 건 이거다. 어떤 때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사람 같겠지만, 따지고 보면 지옥에서도 웃음거리는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 웃음거리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일 뿐이다. 그러니 지옥에 떨어져도 유머감각만 잃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버텨나갈 수 있다. 또 누가 알겠는가. 악마와 농담 따먹기라도 하면서 돈독한 친분을 쌓게 될지.

지금도 내 책장에는 가장 눈에 잘 띄고, 가장 손에 잘 닿는 곳에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꽂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정말이다. 음, 가끔 무시당하고 싶지 않을 만큼 잘난 사람들이 집에 올 경우에는 그 책을 안으로 슬쩍 밀어 넣어 잘 안 보이게 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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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혜인

글 한수희 사진 김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