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관찰

여행을 떠나기 전엔 반드시 계획을 짠다. 걸음 수까지 계산해서 분 단위로 계획하는 게 취미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그 안에 유명한 식당이나 인기 있는 카페는 없다. 남들 다 하는 건 안 하겠단 심술은 아니지만, 굳이 사람 많은 델 갈 필욘 없잖아.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건 뭐지?

부지런한 상인들과 아침을

초량 초량전통시장

부산역에서 내려 가장 먼저 마주하는 동네, 초량동. ‘풀밭의 길목’이라는 뜻을 가진 이 동네는 오래전부터 교통의 요지 기능을 해왔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부산에서 육로 통행을 하려면 초량동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데,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부산에 오기 위해, 또 부산을 떠나기 위해 초량동을 거쳐간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부산 역 앞 호텔에 짐을 맡기고 초량동 산책을 나섰다. 벌써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 거리는 깜깜하지만 이 앞엔 사람이 많고 조명도 밝다. 부산역 건너편은 한밤에도 붉다. 차이나타운과 텍사스거리가 펼쳐진 까닭이다. 부산 현지인과 막 도착한 관광객,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여행 온 외국인이 뒤섞인 길목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경험할 수 있는 동네다. 밤이 늦어 간단한 산책으로 초량동과 인사를 나누고 객실에 들어와 내일을 그리며 잠든다.

이른 아침 체크아웃을 하면서 배낭을 맡길까 하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왔다. 고작 1박인데도 무게가 꽤 되어 어깨가 아프다. 걱정과 불안이 많은 사람은 가방이 무겁다고 했나. ‘이거 필요할지도 몰라, 저것도 가지고 가야겠는데?’ 도대체 내 걱정과 불안의 규모는 얼만한 걸까. 

목적지는 바로 그 아케이드 초량전통시장. 직관적이고 친숙한 이름이다. 항상 시장 근처에 살아와서인지 시장은 늘 반갑다. 비슷해 보이는 시장이지만 동네마다 조금씩 다른 표정을 지녔기에 더더욱 그렇다. 부지런한 상인들이 아침 일찍부터 시장을 열고 있다. 이미 준비를 마친 상인도 있고, 이제 막 도착한 싱싱한 작물을 진열하는 상인도 있다. 흙 묻은 작물의 생김새가 친숙하다.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한 모양, 제 색을 간신히 지닌 채 흙빛을 띤 모습. 채소의 거칠거칠한 얼굴이 일상 살림을 다 지고 부산에 온 내 모습과 닮아 있는 것 같다. 채소들처럼 단단하고 듬직한 마음을 가져야지, 생각하면서 아침 시장에 슬그머니 편입한다.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파란색 ‘빠께스’와 적갈색 고무 ‘다라이’에 반가움을 느끼고, 브로콜리를 “버러코리”라고 적어둔 누군가를 남몰래 귀여워한다. 꽃무늬 앞치마에 꽃무늬 고쟁이 바지, 꽃무늬 티셔츠까지 입은 어느 상인은 늘 앉는 (듯한) 의자에 앉아 멀거니 어딘가를 바라보는데, 그런 무료한 일상이 내 눈엔 한없이 정겹고 푸근하다. 어느 시장에나 있는 색동 파라솔. ‘역시 이런 풍경이 좋구나.’ 나도 모르게 읊조리고 있다. 부산에 와서 아침 시장을 둘러보는 마음, 아직 문을 채 열지 않은 시장을 거니는 동선. 그런 게 나는 좋았다.

평산옥

어디로 갈까, 하다가 지도 애플리케이션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름 ‘평산옥’에 가보기로 했다. 수육 1만원, 국수 3천 원, 열무국수 4천 원. 메뉴는 이게 다다. 두 사람이 방문해 모든 메뉴를 다 먹고는 엄지 손가락을 번쩍 치켜들고 나왔다. 이 금액에 이 맛이라고? “또 올게요!”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A. 부산 동구 초량중로 26 
O. 월-토요일 10:00-20:00, 일요일 휴무

질서 없음의 아름다움

영도 흰여울문화마을

부산 여행을 계획한 사람들의 여행 수첩을 흘끗 보고 싶다. 대부분 사람이 영도를 가고 싶은 동네로 꼽았을 것이고, ‘흰여울문화마을’에 들르고자 바삐 걷지 않을까. 바닷길과 가파른 절벽 길을 따라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집과 여러 예술의 흔적을 고루 마주할 수 있는 곳. 좁은 골목길 안쪽엔 자그마한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영도는 피난민의 삶으로부터 시작된 곳이다. 지금은 마을 주민과 함께 문화마을공동체 흰여울문화마을을 조성하여 계단 전체를 잇는 페인팅이나 벽면 가득 그려진 그림들을 마주할 수도 있다. 골목 사이사이 바다를 바라보는 카페나 사진관 등이 들어서 관광객이 점점 많아지는데, 여전히 이곳엔 평범한 집에서 살고 있는 거주민이 있다.

영도에서 찍어온 필름을 스캔했다.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닌데, 그 안에 남아 있는 건 온통 자그마한 삶의 흔적이다. 사소하고 소소한 장면을 보려고 떠난 여행은 아닌데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도 작은 것들을 좇고 있었다.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기 전에 5초 정도 멈추고, 여행 온 사람들 사진을 바지런히 남겨주면서 관광객 사이사이를 요령껏 거닐었다. 그러면서 자꾸 골목으로, 더 가파른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엔 이런 풍경들이 있었다. 오래된 집 창문과 모서리가 닳은 벽돌, 빛바랜 낡은 스티커, 누군가 떼려고 노력한 흔적. 그 앞에 늘어선 초록색 장독이나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아슬아슬하게 늘어선 꽃나무 화분, 가느다란 간이 계단에 묶여 있는 하얀 천, 구조물에 묶인 스카프, 스쿠터 한중간에 놓여 있는 달마 인형, 바다를 보며 앉아 있던 공사장 인부(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규칙 없이 놓여 있는 장식물이나 살림살이를 볼 때 자꾸 웃음이 났는데, 영문은 모르겠다. 그저 아름답다고, 여기가 좋다고, 연거푸 읊조리면서 흰여울문화마을의 문화가 비단 영화나 그림 같은 장르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영도에 사는 커다란 강아지가 집에서 나와 주인과 함께 걷는다. 바닷길을 따라 걷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지금도 서울 어딘가에서, 경기도 어딘가에서, 인천 어딘가에서 강아지와 걷고 있을 친구들을 생각했다.

손목서가

부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안녕하세요.” 조용히 인사를 하고 2층에 자리를 잡은 뒤 1층 서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언제나 마음에 드는 책이 꼭 있다. 대형서점에서라면 눈에 띄지 않을 그런 책들. 타카노 후미코 대담집 《나를 해체하는 방법》과 이상의 일본어 시가 실린 《영원한 가설》, 그리고 친구에게 선물할 김뉘연 시집 《모눈 지우개》를 샀다. 베일리스밀크를 한 잔 주문하고 바다를 보면서 마시는데 너무 달콤하고 향긋해서, 기분 좋게 어지러웠다.

A. 부산 영도구 흰여울길 307
O. 매일 11:00-19:00

사방이 하늘인 것처럼

기장 대룡마을

바다가 없다. 건물도 없다. 이동하는 내내 기분이 묘했다. 하늘이, 원래 이렇게 넓었나? 내 휴대전화에는 매일 같은 시각에 알람이 설정돼 있다. 알람 메모는 ‘하늘 보기.’ 의식적으로 하늘을 보기 위해서다. 대룡마을에 진입하면서부터 시야가 낯설어졌다. 높고 기다란 빌딩과 건물이 사라지고 온통 산과 들이었다. 바다도, 강도 없다. 파랑보단 초록에 가까운 너른 그 동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앞만 바라보았다. 네온사인도, 차량도, 간판도, 쓰레기도 없고 바람과 풀과 나무와 집만 있던 동네.

언젠가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마침 커다란 스케치북이 눈앞에 있어 크레파스로 그림도 그리고 색칠도 했다. 그 풍경은 서울은 아니었다. 도시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소도시, 좀더 마음껏 상상해 보자면 소도시에서도 조금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좀더 가능하다면 반나절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섬마을에서 조그맣게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 규모의 마을이 여기 있었다. 둘러보면 온통 자연이고, 몇 채 없는 집들도 가만하다. 아스팔트가 아닌 흙바닥 위에 서서 “여기 부산 맞지?” 하고 몇 번을 물었다. 평생을 아파트에서 살아와서 나는 흙이 낯설다. 그나마 어릴 땐 놀이터 바닥이 흙이었는데 다 크고 나서 놀이터에 가보니 이제 흙으로 된 놀이터는 만나기 어렵다. 그런데 대룡마을엔 오히려 아스팔트가 없다. 시멘트가 낯설다. 지나는 길에 덩그러니 놓인 평상을 바라보며 한여름에 저기서 수박 갈라 먹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과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도시 햇살은 건물에 부딪치고 차에 반사되면서 울퉁불퉁한 동선을 지니지만, 대룡마을은 해가 드는 공간이 넓고 편평해서 좋았다. 햇살도 좋겠지, 이렇게 마음껏 내리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시골이지만, 아마 나의 환상은 시골살이가 시작됨과 동시에 산산이 부서질 테지만, 지렁이도 못 보면서 텃밭을 하겠단 상상은 무모한 걸 알지만, 그래도 몇 번쯤 더 상상해 보고 싶다.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안 먹던 채소들을 지금은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잘 먹는 어른이 되었으니까, 상상이 실현될 즈음엔 지렁이를 검지와 엄지로 건져 올리는 훌륭한 시골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도는 덮고

발길 닿는 대로 아무 데나 가보면 좋겠다. 유명한 카페도, 맛있는 밥집도 있는 모양이지만 굳이 검색하지 않고 아무 방향으로 걸어보면 좋겠다. 꼭 가고 싶은 장소가 있더라도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이 작은 대룡마을에서라면, 걷다 보면 분명히 그곳에 당도하게 될 테니까. 걸으면서 우연히 무언가를 만나면 좋겠다. 그것이 기쁨이면 좋겠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음 좋겠다. 대룡마을엔 그런 게 아주 많으니까.

A. 부산 기장군 장안읍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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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