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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끄 상뻬
주변인을
그리는 주변인
장 자끄 상뻬
여행을 하거나 산책을 할 때, 모르는 집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 숙소는 창문을 열면 맞은편 집의 창문 보이는 곳이 좋고, 저녁나절 길거리를 거닐 때면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불빛 너머의 일상을 상상해보는 일이 즐겁다. 그렇게 걸으며 상상에 빠질 때 나는 삽화가 한 명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도 나처럼 걸으며 혹은 집 안 소파에 앉아 이런 상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주변을 둘러본다.
상뻬만큼의 거리
나는 사람들의 수줍은 태도를 대할 때마다 아주 깊은 인상을 받곤 했다. 특히 진정으로 고통을 겪어 본 사람들의 수줍음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자기 나라에서 추방당한 외국인들은 자기들이 살아온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아마 그와 비슷한 이유로 나도 내 삶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글쓰기가 아니라 데생을 선택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 즐거움을 경계한다. 데생에서는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 《속 깊은 이성 친구》 출간 후 1991년 12월 26일 <리베라시옹> 인터뷰 중에서
어딜 가나 눈에 띄지 않고 숨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무언가 특별해 보이지만, 사실 세상에는 눈에 띄는 사람보다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이 산다. 반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를 좋아하는 수줍은 남자애, 자전거 타는 법을 모르는 자전거 수리공, 먼 객석의 면봉 같은 관객과 그들에게도 면봉처럼 보이는 오케스트라의 어떤 단원. 자신을 드러낼 줄 모르거나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 장 자끄 상뻬는 그런 이들을 그린다. 상뻬는 자신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수많은 사람 속에 있다. 게다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가 고독한 사람들을 위로한다고 말한다. 사실 따져보면 그는 타인의 우스꽝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비아냥거리는 쪽에 가까운 데도 말이다.
그림이나 사진을 볼 때면 가끔, 작품을 그리고 찍은 사람이 어디쯤 있는지 찾아볼 때가 있다. 상뻬는 그림 속에 있는 이들과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상뻬의 그림을 볼 때면 거대한 축구 경기장의 맨 끝 좌석에 홀로 앉아 있거나, 화려한 파티가 이루어지는 홀의 커튼 뒤에 살며시 숨어있는 그의 모습을 함께 상상하게 된다.
어쩌면 사람들은 상뻬가 가진 거리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당신을 긍정하고 싶은 마음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다만 나는 당신의 주변에서 어정거리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거리를. 사실 나조차도 나를 마음속부터 깊이 이해하는 사람보다(사실 별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정 거리에서 꾸준히 바라봐주는 사람을 더욱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자기 자신을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옷차림은 늘 단정하고, 약속 시각엔 늦은 적이 없으며, 세금도 어김없이 내는 남자. 그러면서도 노상 자기는 주변인이라고 말하는 남자.’ 그래서 내게 상뻬를 좋아한다는 말은 상뻬가 가진 ‘주변인의 거리’를 좋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용히들 해! 고집부려도 소용없어. 네 녀석들이 엊저녁에 내 안경을 깨트렸으니, 물놀이는 꿈도 꾸지 마.
『파라마치』, 1959
다들 같은 말을 해.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친구들, 가족, 정신과 주치의, 하나같이 같은 말만 하는거야.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하도 그러니까 내가 주눅이 들어서 의욕이 싹 사라졌다니까!
내가 보기에 ~것 같다
L 어린 시절, 아니 청소년 시절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사람은 어른이 되어도 어렸을 때 됨됨이를 그대로 간직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S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한답니까? 난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경계합니다. 정말이지 단정적인 사람들을 대단히 경계해요.
– 장 자끄 상뻬, 《상뻬의 어린 시절》 중에서
가끔 ‘어른’이라 불리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나는 그들이 인생 전체를 지배하고 휘두르고 말 몇 마디로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본다. 누군가는 신념 혹은 아집이라고도 하는 말들. 하지만 나는 몇 명의 ‘어른’을 만난 후에 그 몇 마디가 대단하면 대단할수록,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믿고 또 믿을수록 위험한 건 아닌지, 그 말이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할 때 성질이 변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됐다.
장 자끄 상뻬는 “내가 보기에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책임하고 성의 없게 들리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신하지 않는 그의 말이,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이 마음에 든다.
‘저는 광범위하게 편협한 사람입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는 길은 40대의 참을 수 없는 그 중후한 멋이 빨리 찾아와주는 거야.’, ‘난 내가 좀 평범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좀 천재적이었으면 해.’ 상뻬의 사람들은 오락가락한다. 두 발은 누구보다 현실에 담그고 있으면서 거창한 꿈과 이상을 바라다 자주 넘어진다. 그들은 인간적이라서, 너무나도 인간적이라서 아름답다. 어른들의 말에서 평생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거대한 마음을 배운다면, 나는 상뻬가 그린 그림 속의 사람들에게 가끔 등짝을 세게 맞거나, 혹은 어딘가에서 세게 맞은 등짝을 위로받는 것 같다.
유년이 그러모은 근사한 기억들
L 당신 그림엔 또 나름대로의 욕망을 가진 어린이들도 등장합니다. 스스로 외톨이라고 느끼는 아이들, 주어진 장소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 그 그림들은 당신이 살아온 과정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만…….
S 네, 그럴 수밖에 없겠죠. 어느 정도는, 그렇죠. 어느 정도는 말입니다. 그런 내가 아주 재미나게 생각하는,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현상이 있더라고요. 아주 희한하기까지한 현상이죠. 아주 가혹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조차 과거를 회상할 때면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되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렇죠, 맞아요……. 어떻게 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기분 좋은 추억을 그러모으게 될까요? 정말 근사하죠!
– 장 자끄 상뻬, 《상뻬의 어린 시절》 중에서
장 자끄 상뻬는 1932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아들을 얼싸안아 주는 친구 엄마들을 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졌던, 크리스마스에 선물 사줄 돈이 없을까 부모를 걱정했던, 싸움이 잦아든 평온함으로도 만족했던, 수영 시합에 갈 기찻삯이 없어 신부님의 자전거를 빌려 45킬로미터를 달렸던 아이였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법을 알려준 유년이었지만 그 시절의 아름다운 순간을 잊지 않고 그려내는 상뻬를 생각하며 몇 사람의 근사한 유년을 모았다.
지금은 여든넷인 어린 시절의 장 자끄 상뻬
“아, 거리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도시 변두리 외곽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도시를 아주 좋아했죠. 아, 그래요. 도시를 정말 좋아했어요! 불빛…… 혼잡, 자동차,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여자들, 하이힐 소리, 이런 모든 것이죠.”
사춘기 중학생이었던 스물일곱 이현아
“어릴 때 집 앞에 가로등이 있었어요. 시골이라 그랬는지, 해 질 무렵이면 직접 나가서 불을 켜야 했어요. 배전반을 열고 스위치를 올리면 되는 단순한 일이었죠. 그 일은 제 담당이었고 조금은 귀찮아하면서도 옆집 애에게 뺏길까 봐 거르지 않았어요. 푸르스름하게 번지는 하늘과 등 밑으로 바글바글 달려드는 날벌레 떼를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져요. 걔들한테도, 동네 사람들한테도 이제 저녁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거든요.”
여덟 살엔 샬롬음악학원에 다녔던 최지영
“초등학교 1학년 때 피아노 학원에 다녔어요. 제 나잇대 여자애들은 다 피아노 학원에 다녔죠. 원장선생님은 무서웠지만, 젊고 예쁜 여선생님이 있었어요. 이름은 은주쌤. 어린이들은 예쁜 사람을 좋아하니까 은주쌤이 하는 건 다 예뻐 보였어요. 소라색 두꺼운 목폴라 니트, 작은 링 귀걸이, 곱창 헤어밴드와 청바지…. 가끔 은주쌤이 원장선생님 눈을 피해서 조그맣게 저를 불러서 300원이었나, 동전 몇 개를 쥐여주면서 캔커피 좀 사다줄 수 있느냐고 물었죠. 아마 자리 비우기가 힘들었겠죠. 커피는 마시고 싶고 원장선생님 눈치는 보이고. 은주쌤과 내가 합심해서 몰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게, 은주쌤의 소소한 일탈을 돕는다는 게 되게 큰일처럼 느껴졌어요. 나는 왜 그게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가끔 피아노 학원을 생각하면 그 선생님이 떠올라요.”
여섯 살에는 김해에 살았던 서울살이 7년 차 김지은
“여섯 살 때였나. 작은 점방이 있었어요. 그 앞에 제가 좋아하는 오락기 두 대가 있었고요. 그날도 점방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오락하는데 주인아줌마가 뒤에 와서 노란 고무줄로 제 머리를 묶어줬어요. 사실 저는 머리카락이 걸리는 노란 고무줄을 싫어했지만, 그럴 때마다 어쩐지 가만히 있었죠.”
장 자끄 상뻬의
이야기를 듣는 방법
01 상뻬의 어린 시절
장 자끄 상뻬 지음 | 미메시스
장 자끄 상뻬와 전 〈텔레라마〉 편집장 겸 대표 마르크 르카르팡티에가 나눈 대화를 담은 책이다. 결코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유년을 보낸 그가 붙잡고 있는 몇몇 조각들, 그리고 현실에서 도피하며 상상했던 ‘자기도 모르게 행복해지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유년기의 기억을 투영한 듯한 그림 총 2백여 점이 함께 실려 있다.
02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지음 | 열린책들
햄은 햄 제조의 귀재인 프로냐르의 이름으로 불리고, 안경은 안경점을 경영하는 비파이유로 불리는 마을. 자전거는 수리공의 이름인 ‘따뷔랭’이라 불린다. 하지만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 바로 자전거의 어떤 문제라도 척척 고치는 그가 사실은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는 것.
03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장 자끄 상뻬는 무명인 시절부터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 세월이 흐른 뒤 상뻬는 쥐스킨트가 쓰면 삽화를 그리겠다고 제안했다. 쥐스킨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상뻬가 좋아하는 피아노, 자전거 등을 생각하며 글을 썼다. 텅 빈 배낭을 지고, 긴 지팡이를 손에 쥐고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걸어 다니는 좀머 씨를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다.
04 돌풍과 소강
장 자끄 상뻬 지음 | 미메시스
2013년 프랑스에서 초판 발행된 상뻬의 화집이다. 일상의 한 토막을 포착한 듯한 그의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보기 보다 생각날 때마다 아무 데나 펼쳐놓고 보는 것이 좋다. 돌풍처럼 불어쳤다가 소강하는, 인간 내면의 동요와 평안을 담은 99점의 그림이 실려있다.
에디터·포토그래퍼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