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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메이드
주방과 갤러리에서 발견하는
레디메이드의 가치
엄마들이 정성을 쏟는 그곳이 꼭 부엌일 필요는 없다. ‘이미 만들어진 것Ready Made’의 예술적 가치에 눈 뜨는 순간, 오늘 당신이 먹고 마신 소소한 것들이 한 개인의 소중한 일상을 드러내고 반추하는 특별한 오브제가 될 것이다.
동서고금 두루 통하는
부엌의 법칙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는 A가 얘기를 꺼냈다. “도착한 그 날로 집안을 안내해 주더군. 부엌이 훌륭했어. 무슨 요리 프로그램의 스튜디오인가 했어. 꿈인가 싶을 정도로 정말 온갖 부엌설비가 다 되어 있더라고. 내가 놀라워하고 있으니 여주인이 저녁을 만들 테니 뭘 먹고 싶냐며 비프, 포크, 치킨에 양고기, 송아지고기도 있다며 먹고 싶은 고기가 있으면 말해보라는 거야. 나는 그럴싸한 요리를 만들
어 주시나 싶어 정말 감격했어. 이렇게나 환대를 받다니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거지. 그런데 정작 저녁상을 받아보니, 밑반찬까지 세트로 붙어 있는 냉동식품을 전자레인지로 ‘지잉’ 하고 데워서 내놓은 거였어.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아무튼 그 집에 묵는 1년 동안 쭉 냉동식품만 나왔지 뭐야.”
“우리 아들도 보스턴에서 홈스테이할 때 그랬대.”
“우리 딸도 버지니아 주로 유학 가서 하숙했는데 그랬다더라.” 하고 다른 두 사람도 맞장구쳤다.
“그럼 뭐하러 훌륭한 부엌을 만드는 거지?”
“손님에게 집 구경시켜주는 걸 좋아하니까.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거겠지.”
– 요네하라 마리, 《미식견문록》 중에서
러시아어 전문 동시 통역사이자 먹는 일에 남다른 일가견을 지녔던 작가 요네하라 마리의 저서 《미식견문록》 중 ‘부엌의 법칙’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자신의 경험과 지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런저런 사례들을 종합해 그녀가 도출해낸 부엌의 법칙은 다름 아닌 ‘요리 잘하면 청소를 못하고, 청소 잘하면 요리를 못한다’였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두루 통하는 것이라 말하며 급기야 아래와 같은 다양한 응용 버전까지 내놓았다.
‘부엌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요리 솜씨는 좋지 않다.’
‘어차피 실패한 요리는 손을 대면 댈수록 맛이 없다.’
‘요리 만드는 데 든 시간과 그것을 먹어 치우는 데 드는 시간은 반비례한다.’
‘열심히 만든 음식일수록 손님의 평은 좋지 않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요리하기는 좋아해도 설거지는 딱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신도 그 부류에 속한다고 고백한다. 둘 다 잘한다면 기적, 둘 다 못한다면 예외라면서. 나는 요리는 잘하지만 청소라면 으악이다. 시늉만 하는 수준이다. 청소의 달인들이 보면 혀를 끌끌 찰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설거지는 할 만하다. 나한테 설거지는 청소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이 둘은 별개의 장르인 것이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요리와 뒷정리를 거의 동시에 끝내는 편이다. 한때 요리를 업으로 삼으며 미장 플러스가 철저히 몸에 밴 탓이다. ‘셰프가 편애한 현대미술 크리에이티브’라는 카피 문구를 달고 나온 나의 최근 저서 《그림의 맛》에서도 설명했지만, ‘미장 플라스Mise en Places’란 모든 것이 반드시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뜻의 불어다. 요리 시작 전 꼭 갖추어야 할 주방의 완벽한 사전 준비를 일컫는 말로 전문 요리사들에게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만큼 중요한 개념이다.
재료 손질은 물론 서비스 시간 동안 필요할 것 같은 모든 것을 그야말로 완전무결하게 세팅해놓는 것이다. 물론 뒷정리와 설거지는 요리의 가장 마지막 단계지만 이 역시 미장 플러스의 연장선에 있다 하겠다.여하간, 내가 여기서 정작 하고픈 이야기는 설거지가 아니라 즉석식품이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키친을 갖추고도 환대의 의미로 전자레인지에 ‘지잉’ 하고 돌려 내놓은 바로 그것에 대해서 말이다.
예전에는 나도 예쁜 주방을 갖는 로망이 대단했다. 과거 나의 주방용품 덕질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금세 이 지면이 다 찰 것이다. 요네하라 마리의 ‘부엌의 법칙’에 대한 교훈을 다시 새기자. 대형 아일랜드 식탁과 최신식 디자인 조리 설비를 갖춘 북유럽 스타일의 모던한 공간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집밥을 연결 지어 생각하지 말 것. 여자가 그런 주방을 꿈꾸거나 이미 갖추고 있다 해서 요리하기를 좋아하나 보다 지레짐작하지 말 것.
엄마들이 정성을 쏟는 그곳이
꼭 부엌일 필요는 없다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 바로 해 먹을 수 있는 레디메이드 간편식이 큰 인기이자 대세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즉석식품’을 쳐보니 맞벌이 부부와 혼밥족의 증가로 간편식 시장 규모가 무려 3조에 육박했다는 기사가 바로 뜬다. 전년 대비 35퍼센트 성장으로 신제품 출시도 ‘봇물’이란다. 내년 이맘때쯤 동일어로 다시 검색해보면 그 수치는 분명 더 올라가 있을 테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은 신선하고 영양가가 풍부한 양질의 음식만 먹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또한 한 끼를 먹더라도 대충 때우기보다는 이왕 먹는 거 고급스럽고 품위 있게 먹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닌가. 이런 소비자의 욕구에 발맞추어 간편식 시장도 빠르게 진화 중이다.
간편식이라 얕보지 말라며 나온 업그레이드 버전이 ‘패스트 프리미엄’이다. 비혼인 나는 바쁘고 피곤한 엄마들이 아이들을 위해 요즘 어떤 간편식을 선호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봤다. ‘엄마들이 선택한 간편식’을 타이핑하고 엔터를 치기 무섭게 줄줄이 달려 나오는 기사들의 헤드라인은 이랬다. ‘요즘 엄마들은 밥을 하지 않는다’, ‘간편식이 어때서’, ‘주부들의 이유 있는 태업’기사 전문을 읽어보니 주부가 밥도 안 하고 대체 뭘 하느냐고 묻는 무식한(?) 이들을 교화라도 하듯 요즘 주부들이 밥 말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논리 정연하게 자세히도 적어놓았다. ‘수고스러운 조리 과정이 필요치 않은 간편식’이라는 광고 문구에 ‘음식은 정성?’ 아니냐며 딴지 거는 이들도 그 입 다물라다.
최근 한 편의점에 신제품 도시락 2종이 출시됐는데 제품명이 마음에 와 닿는다. ‘여친이 싸준 도시락’, ‘엄마가 싸준 도시락’ 비록 내 여친이 아니고 내 엄마도 아니지만 그게 뭐 중요하냐, 맛만 좋으면 됐지 싶은 뉘앙스다. 상품은 작명이 중요하니 나도 몇 개 지어봤다. 신실한 크리스천들을 겨냥해 ‘주님이 싸준 도시락’, 열렬한 불교 신자들을 위해 그들의 이상향을 담은 ‘극락전煎’(밥과 모둠전으로 구성된 도시락이다), 입맛 까다로운 미식가 코스프레 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죽기 전에 꼭 먹어보아야 할 편의점 쓰리 스타’, 혼밥 하는 외로운 기러기 아빠들을 타깃으로 ‘밤의 마트에서 혼자’(불륜 이미지가 연상돼 주부들이 싫어할 수도 있겠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사색을 즐기는 이들을 위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도시락’, 편의점 음식에 처음 입문하는 이들에게는 ‘레토르트는 처음입니다만’ 등등.
이미 만들어진 것의
예술적 가치
레디메이드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곳이 음식 업계만은 아니다. 미술계도 그렇다. 공장에서 제조된 기성품들만으로도 얼마든지 멋진 미술 전시를 꾸릴 수 있다. 덕분에 사유와 철학을 동반한 기성품들이 예술로 인정받으며 화이트 큐브로 거침없이 진격 중이다. 이쯤에서 지겹게 언급되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소변기 작품 ‘샘 Fontaine’은 거의 국민 상식 수준이니 넘어가겠다. 기념비적이지만 이미 백 년 전 작품이다. ‘작가의 생각이 곧 예술’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 지는 이미 한참 됐다.
이제 와서 레디메이드 작품들을 보고 ‘이것도 예술인가’라고 ‘또’ 질문한다면 아마 예능에서 유행하는 ‘냉동인간’ 취급을 미술계에서 받게 될 것이다. 품이 많이 드는 수작업을 계속 고수하는 이들에 대해서만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마치 진정한 예술가 취급하는 것은 대단히 시대착오적 태도다. 단언컨대 그 수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품을 대단히 들인 수작업이라 할지라도 인형 같은 작은 소품만 제작할 게 아니라면 응당 조수들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 ‘제프 쿤스Jeff Koons’는 조수들이 백 명도 넘는다. 그 외에도 조수들과 협업하거나 전적으로 조수들이 작업을 도맡아 하는 작가들도 천지다.
일전에 개념미술 작업으로 유명한 국내 중견 작가가 상업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연다고 해서 다녀왔다. 모양새가 꼭 완구인형 같은 게 단에 올려져 있어 당연히 레디메이드 작품이거니 싶었다. 그런데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핸드메이드 제작된 작품이라고 해서 조금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됐다. 아무래도 컬렉터의 구매를 유도하려면 공장의 기성품보다야 작가의 공력이 들어간 수공품이 훨씬 더 영향력을 발휘할 테니 말이다. 작품 설명 맨 마지막에 말꼬리를 살짝 흐리는 것도 난 놓치지 않고 들었다.“물론 작가님 혼자 다 만드신 건 아니고요…. 조수들이랑 같이….”
오늘 내가 그리고
당신이 마신 것들
기성품 미학의 방점을 찍는 레디메이드 예술은 회화, 조형, 퍼포먼스, 영상, 콜라주 등 전방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이 중 음식을 매개로 인간의 먹고 마시는 일에 남다른 고찰을 담은 작품들은 늘 나의 관심을 끈다. 일례로 미국 작가 더스틴 에릭슨Dustin Ericksen이 동료 작가인 마이크 로저Mike Rogers와 협업한 ‘컵들Cups’, 1995~Present은 긴 테이블 위에 온갖 빈 병과 빈 컵들을 어지럽게 올려놓은 작품이다.
작가들이 한 일이라고는 스튜디오, 강연, 전시 오프닝, 파티 등에 왔던 이들이 음료를 마시고 그대로 놓아둔 빈 컵과 빈 병들을 부지런히 주워 모은 것뿐이다. 그리고 사용자의 이름과 병과 컵들이 있던 장소, 날짜 등을 매직으로 각각 써넣었다. 개중에는 솔 르윗, 찰리 레이, 트레이시 에민, 줄리안 슈나벨, 헤르만 니츄, 리그리트 키라바니아, 마이크 켈리, 존 발데사리, 제임스 터렐 등 동시대 유명 미술가들의 이름들도 있다. 이들 역시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소리다.
작품의 제작 연도가 1995~Present(현재)인 이유는 최초의 전시 이후 지금까지도 여러 도시와 나라들을 돌며 전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 맞다. 사람들이 사용했던 컵과 병들은 설거지하지 않은 채로 전시에 나왔다. 고로 컵과 병 주둥이에 립스틱 자국이며 음식물 흔적 등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요즘은 레디메이드 작품이나 폐품 같은 작품들이 미술관에 워낙 자주 등장하다 보니 청소 담당 용역분들이 이를 쓰레기로 착각한 나머지 말끔히 싹 치워버리는 대형 사고가 종종 나기도 한다. ‘컵들’ 역시 전시 기간 보관 유지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단박에 그 꼴이 날 만한 작품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한 잔의 따뜻한 커피와 한 잔의 미지근한 메밀 차와 한 병의 차가운 맥주를 마셨다. 이 글을 읽는 동안 당신이 마신 것들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설마 칼칼한 목을 축이거나 몸을 따뜻하게 혹은 시원하게 해줄 음료 한 잔도 없이 생목으로 잡지 페이지들을 건성건성 넘기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이와 남편만 챙기느라 자신이 먹고 마신 것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채로 하루를 분주히 마감하는 엄마들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을 테다.
에디터 김현지
글·사진 최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