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방법대로

예술로 채집한 기억들

기록은 한 가지 얼굴만 하지 않는다. 순간을 포착한 사진, 흐르는 영상, 네모 칸에 담긴 그림 역시 기록의 또 다른 모습이다. 내가 가장 편안히 여기는 방법으로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들이 걸어간 자리에 남겨진 발자국을 살펴본다.

Film

다시 오지 않는 순간을 붙잡으며

원영재 ― 누땡스

아트북 출판사 ‘누땡스nu thanks’를 이끄는 영재는 일상의 소중한 찰나를 사진으로 포착한다. 10년 전, 그는 열 명이 넘는 친구들과 페이스북 페이지 누땡스를 운영하면서 관심 분야와 관련한 소식을 전했다. 오늘날 웹 매거진의 초기 형태인 셈. 페이지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구성원 모두 직업을 찾을 시기가 다가오면서 저마다의 길을 걸어갔고 남은 영재가 누땡스를 이어 왔다. 그가 소개하던 분야는 예술, 특히 사진. 감상만 즐기던 그가 찍는 일에 관심이 생긴 때는 사진가 린다 매카트니Linda McCartney의 전시에서다. 일상과 주변인을 포착하는 작가의 시선에 감탄하고는 찍는 사람으로 나아가길 결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에 카메라가 들렸고, 영재는 뷰파인더 너머로 보는 세상에 매료되었다. 

영재에게 기록의 의미는 절대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을 기억하는 일이다. 형식적이거나 뻔하기보다, 그가 자연스럽다 여기고 직관적으로 마음에 드는 구도로 사진을 찍는다. 이제는 아무리 아름다운 장면이라도 원하는 모습이 담기지 않으면 카메라를 내리는 결단력도 생겼다. 누땡스는 영재의 작품, 다양한 예술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발행해 왔다. 그는 책도 하나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작업한다. 오래전 한 매거진을 몰입해 읽으면서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고, 누땡스라는 한 권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진보다 앞서 기록의 도구가 되었던 건 글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하굣길에서 본 장면, 떠오르는 생각을 기억하고 싶어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적어 내린 조각을 그러모아 한 권의 책으로도 펴냈다. 산문집 《사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에는 언젠가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고 싶다는 오랜 소망이 담겼다. 여전히 메모장에는 가벼운 단상이 가득하다. 짧은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에서 생을 아름답게 여기는 마음이 비친다. 편안한 빛이 머무는 사진과 그가 솔직하게 써 내린 이야기들. 영재의 발자국을 보며 스쳐 가는 오늘을 좀더 느리게 느껴본다.

영재의 한 장

“독일 라이프치히의 한 호수에서 물놀이하던 아이들 네 명을 찍은 사진이에요. 출판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서 독일로 떠났는데, 곧 팬데믹이 찾아왔어요. 모든 계획을 뒤로하고 긴 겨울을 집에서만 보냈죠. 타지에서 맞는 첫 번째 봄, 트램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호수를 찾았어요. 모두 자유롭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죠. 평화로운 장면에 불안감은 진정되었고, 긍정적인 마음이 생겼어요. 힘들었던 시간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준 사진이에요.”

기록 도구

“라이카의 ‘Z2X’입니다. 필름 사진을 찍기 시작한 2016년부터 지금까지 쓰고 있어요. 편리하고 무엇보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어요. 다양한 카메라를 써봤지만 저한테는 이 모델이 가장 잘 맞아요. 망가지거나 여행 중에 잃어버려도 이 친구만 다시 구매한답니다. 지금 쓰는 건 아마 다섯 번째일 거예요.”

Video

삶을 영화처럼

서윤아·신윤섭 ― 오후네시

윤아와 윤섭은 ‘오후네시’라는 이름으로 작은 영화를 만든다. 주인공은 두 사람. 정해진 대사나 연기는 없다. 부부는 일상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영상으로 기록하고, 영화처럼 표현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날것보다는 울림을 주는 콘텐츠로 구현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윤아가 영상의 배경이 될 여행지를 찾고 동선을 계획하면, 촬영과 편집은 윤섭이 전담한다. 편집이 시작되면 윤아는 영상에 담긴 대화, 무드를 살펴 적절한 주제를 뽑아내고 흐름을 기획한다. 그렇게 만든 영상을 SNS에 차곡차곡 쌓은 지도 어느덧 한 해를 넘겼다. 

기록은 직장인으로 바쁘게 일하며 느낀 공허함에서 출발했다. 내 것을 하고 싶지만 무얼 할지 몰라 마음에 큰 구멍이 생긴 기분이었다고. 두 사람은 우리만의 이야기를 해보자며 라이프스타일, 목표, 꿈을 소재로 영상을 찍어보기로 했다. 글이나 그림 같은 간접적인 방법보다는 삶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이 좋았단다. 

부부는 과거의 답답함과 무력감은 훌훌 덜고 한 발짝 나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앞으로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여전히 모르지만, 꿈에 다가섰다는 기분을 품에 안았다. “젊은 날의 우리 모습을 기록한다는 게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 일인지 몰라요. 나중에 영상을 볼 때 ‘이땐 멋진 생각을 했구나.’ 혹은 ‘왜 저런 생각을 했지?’ 분명 그럴 것 같거든요. 미래에 이 기록물들을 보며 어떤 감정이 들지 감히 알 수는 없겠지만,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평생 꿈을 꾸고 살 것만 같아요.” 

내밀한 생활을 공개적인 기록으로 제작하는 윤아와 윤섭은 창작물을 보는 타인을 배려한다. 두 사람의 생각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거나 불편하지 않도록, 보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 또한 존중한다는 마음으로 흐르는 장면을 다듬는다. 그래서인지 오후네시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둘만이 낼 수 있는 분위기와 목소리에 잠기는 일이 좋다. 그들의 미래 역시 프레임에 아름답게 간직되겠지. 윤아와 윤섭이 함께하는 여정을 다정한 마음으로 응원한다.

오후네시의 한 편

“제목은 ‘우리 여기서 살까?’예요. 오래전부터 우리 부부의 목표는 제주도에서 행복하게 사는 거였어요. 연고도 없는 곳으로 떠나 지금과는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게 쉽진 않겠죠. 그럼에도 그날을 기대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과 타협하려는 모습을 발견했어요. ‘거기서 뭐 해 먹고살까?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솔직한 생각을 영상의 마지막 내레이션에 담았어요. 꿈을 꾸지만,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것도 우리니까요.”

기록 도구

“소니의 ‘A7C’예요. 렌즈는 2470GM을 쓰고요. 고유한 색감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두운 곳에서도 밝고 선명하게 찍혀요. 풀프레임 카메라지만 작고 가벼워서 여행을 자주 다닌다면 좋은 선택이 될 거예요. 편집 프로그램은 잘 알려진 어도비의 ‘프리미어프로’를 씁니다.”

Cartoon

그리고 칠하는 나의 이야기

심규태 ― 만화가

규태는 기억을 모아 한 편의 만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를 처음 접한 건 일상 만화 《여가생활》에서. 프리랜서 만화가의 소소한 삶을 읽으며 슬그머니 웃곤 했지. 그를 만나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부터 물었다. 규태는 그림을 그려서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걸 즐거워하는 아이였고, 줄곧 만화를 좋아했다. 말풍선 모양에 따라 읽는 이가 대사의 어투를 달리 알아채는 것처럼, 만화만의 암묵적인 약속이 존재한다는 일이 흥미로웠다. 그림을 업으로 삼은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만화를 좋아했지만 자기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세월도 길었단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에서 자기 이야기를 은근한 방법으로 풀어내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 일상 만화를 본격적으로 그린 건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면서였다. 그가 기억하지 않으면 소중한 존재는 영영 없던 것처럼 여겨질 것 같았고,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과 그간 맺은 인연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들과의 이야기를 기억하고자 펜을 든 그는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에 열중해 《여가생활》을 완성했다. 

규태는 여전히 일상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지만 방법은 조금 달라졌다. 전에는 삶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직관적인 일상 만화로 그렸다면, 이제는 여러 기억을 재해석해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든다. 창작의 소재를 보관하기 위해서 떠오르는 단상을 짧게 기록한다. 기억하고 싶은 일들, 만화로 꼭 옮기고 싶은 일들이 메모장에 빼곡하다. 숱하게 펜을 들면서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슬램덩크》를 그린 이노우에 다케히코를 좋아해요. 그가 연재한 《배가본드》는 작가가 만화가의 인생을 검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등장인물의 대사가 사실 만화가의 삶을 말하는 문장이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요. 작가와 통하는 그 순간이 기뻐요.”  

좋아하는 것을 즐겁게 말하는 규태를 보면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칠하는 삶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의 한 컷에는 또 어떤 일상의 조각이 담길까. 아직 본 적 없지만 나는 또다시 책장을 넘기며 미소 지을 것을 안다.

규태의 한 페이지

“제목은 <딸랑딸랑>이에요. 출판사 ‘삐약삐약북스’에서 청소년을 위해 만든 단편만화집 《대운동회 2024》에 실렸어요. 두 가지 경험이 모티브가 되었는데요. 하나는 아버지가 선물한 열쇠고리를 가방에 달고 학교에 갈 때마다 잃어버렸던 일이에요. 또 하나는 고등학교 때 친구 샤프를 내 거라고 주장하면서 바보처럼 거짓말했던 일이고요. 결국 돌려줬지만 사과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여전히 부끄러운 기억이에요. 만화 일부를 공개할게요.”

기록 도구

“모든 만화는 아이패드 프로 2세대로 그려요. 가볍고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잘 쓰고 있어요. 자료 공유도 편리하죠. 앱은 ‘클립 스튜디오’를 쓰는데, 만화가 책으로 제본되면 어떤 모습일지 미리 보는 기능이 있어서 좋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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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자료 제공 원영재, 오후네시, 심규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