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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다. 넓은 평야,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달구벌이라 불렸던 도시다. 오래된 것과 새 것의 어깨가 바짝 붙어있는 이 큰 땅 위에는 아름다움을 품은 공간이 많다. 정해진 곳 없이 걸음을 나서며 도시 위에 놓인 공간의 아름다움을 줍는다.
공간독립
대구의 구도심을 걷다 보면 시간이 왜곡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세월이 덕지덕지 묻은 적산가옥 옆에는 형광색 영문 시트지를 붙여둔 카페가 있고, 좁은 골목 사이로 한옥을 보다가도 등 뒤에 서 있는 고층 아파트를 보느라 고개가 아파오기도 하니까. 스스로 대안 미술 공간이라 칭하는 ‘공간독립’을 만난 것은 구도심의 한복판, 삼덕동에서였다. 골조가 나이테처럼 선명한 건물은 본래 독립운동가 신재모 선생이 살던 집이다. 세대를 넘어 그의 후손들이 살던 집은 빠르게 흐르는 시간 탓에 잠시 텅 빈 채로 온기를 기다렸는데, 증손자이자 예술을 전공한 디렉터 신명준 씨에 의해 공간독립이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갖게 되었다고. 미술 공간으로 불리기 전에 맨 앞에 ‘대안’을 붙여둔 이유는 상업 갤러리나 미술관과는 다른 차별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상업적이지 않아도, 실험적인 시도를 기반한 예술이라면 누구나 고유한 아름다움을 이곳에 풀어둔다. 한 달을 주기로 바뀌는 전시는 장르나 형식을 제한하지 않기에, 달마다 새로운 공간독립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방문 당시 진행된 전시는 홍희령 작가의 <On The Border>로,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불안감과 경계심을 붉거나 흰 커튼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천 너머로 얼핏 보이는 정원의 자태가 유려했다. 삐걱거리며 목소리를 내는 문을 열고 들어와 사람의 뼈와 근육처럼 촘촘하게 얽힌 목조 천장과 한데 어우러진 전시를 감상하다가, 마침내 작은 정원을 마주해 보자. 안팎으로 예술이 넘실거린다.
공간독립의 추천 전시
신명준·이재균 ‘충돌하는 이미지’
대구에서 설치미술로 활동하는 신명준 작가와 부산에서 사진을 선보이는 이재균 작가가 한 공간에서 만났다. ‘이미지’라는 키워드를 각자만의 언어로 해석 혹은 확장하기 위한 과정을 그리며 소재를 조합하거나 해체하며 나아가 병치시키는 방식으로 전시를 그려낸다.
O. ‘충돌하는 이미지’ 2024. 9. 25.ㅡ10. 13.
북셀러
그런 날이 있다. 무수한 예술 작품보다 누군가가 무심하게 휘갈겨 쓴 한 문장이 와닿는 날. 내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애가 타는데 별생각 없이 꺼내든 책에서 잃어버린 마음을 찾은 날. 글과 문장, 때로는 그림까지 더해져 완성된 책 한 권은 적재적소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순간을 선사한다. 대봉동에 자리한 ‘북셀러’를 마주했을 때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문학의 좋은 재료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작가 호재 씨의 일상 터전인 이곳은 시나 소설, 에세이 같은 문학 서적과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재조명되는 책들을 한껏 모아둔 곳이다. 전부 이름 모를 이들로부터 여기까지 당도한 헌책이다. 곁에는 직접 나무를 가다듬어 만든 테이블과 낡은 사전에 구멍을 뚫어 달아둔 전등이 그림 같은 풍경 속 한 부분을 차지한다.
호재 씨에게는 새로 만든 책만이 아니라 새롭게 접하는 책도 ‘새 책’이다. 정해진 과녁을 향해 나아가는 화살처럼 새 책을 골라 빠져나오는 다른 서점들과 달리, 헌책방에서는 예기치 못한 만남과 그 만남을 기다리는 설렘이 천연하다. 그렇기에 아무리 오래된 책을 품에 안더라도 새 마음으로 길을 나설 수 있다. 책 읽는 일은 무척 외로웠지만 책 파는 일은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호재 씨는 오는 이들을 위해 가벼운 가격으로 드립 커피와 차를 내린다. 평일 오후 시간에는 그의 딸 그림이도 어린이집에서 하원해 북셀러 한편을 함께 지킨다고. 책을 둘러싼 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머물 수 있는 이곳에서 문학을 타고 흐르는 일련의 아름다움을 목격한다.
북셀러의 추천 코너
코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재 씨는 종종 유령이 된 작가들을 이곳에 불러와 북토크를 여는 상상을 한단다. 그 상상을 실현해 보고 싶어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를 선정해 그 한 사람만의 저서를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첫 번째 작가는 솔직하고도 세심하게 마음을 훑는 표현을 쓰는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
대구간송미술관
예술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일생이 대구에 머물러 있다. 그는 ‘간송澗松’이라 불리던 자다. 1906년 조선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간송 전형필은 예술을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서화와 골동품 수집에 관심을 가졌다.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으로 문화유산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아름다운 우리의 멋과 혼을 일본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한국의 예술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마음은 현재로 이어져, 자연과 조화로운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곳이 자리한 대구대공원의 경사와 지형이 안동 ‘도산서원’과 비슷하기에, 전통 건축 요소인 계단식 기단과 터의 분절을 대구간송미술관에도 옮겨 두었다고.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높게 뻗은 아름드리 나무 기둥들이 인상적인데, 그 외에도 대구 도심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박석마당이나 수공간 등 미술관의 안팎이 자연과 나란한 자세로 놓여 있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한국적이며 자연의 일부가 되는 공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좋다. 전시실 규모가 크고 소장품도 우리가 책이나 일상에서 익히 듣고 알던 것들이라 대단하지만, 손상된 지류와 회화 작품의 수리 복원 공정을 실제로 보여주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단지 소유하기 위한 예술이 아닌, 시간의 제약을 넘어 존재하기 위한 예술의 의미를 느낀다.
대구간송미술관의 추천 작품
화가 신윤복의 ‘미인도’
ㅡ혜원
조선시대의 화가 신윤복은 여성의 얼굴, 몸을 묘사하는 인물화에 뛰어나 오래도록 사랑받는 작품이 많다. 그중에서도 ‘미인도’는 우아한 여성의 모습과 함께 곁들인 제화시와 인장의 시구까지 풍월을 닮았다. 제2전시실에 단독으로 놓여 있어, 수백 년이 흘러도 여전한 아름다움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다.
O. ‘여세동보(與世同寶) ㅡ 세상 함께 보배 삼아’ 2024. 9. 3.ㅡ12. 1.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박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