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직업

고독한 산책가

정오의 직업

고독한 산책가

“직업을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걸 하고 싶어?” 요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종종 테이블 위로 던지는 질문이다. 허무맹랑한 답변부터 꽤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답변까지, ‘만약’을 붙인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종종 한숨을 불러일으키기 일쑤라, 너무 진지해지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서 질문을 살짝 바꿔보았다. “정오부터 잠깐 직업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걸 하고 싶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는 한숨을 쉬는 대신 무릎을 치고 웃었다. 주로 질문자였던 나는 어느 오후 내게 직업을 바꿀 기회를 주었다.

정오가 되면
걸으러 나가세요

길건 짧건 비행기와 숙소만 예약하면 여행의 조건이 성립된다고 믿는 나는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인 고로상의 산책을 좋아한다. 고로상은 홀로 걷는다. 익숙하지 않은 동네에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탐험하듯 맛집을 찾아낸다. 그에게 힙스터들이 본다는 잡지나 인스타그램을 알려줘 봤자 쓸모가 없다. 숙련된 걷기로 갈고닦은 직관과 티 나지 않는 작은 우연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가끔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온 감각을 동원해서 식당 입구를 스캔하는 그가 더 즐거워 보이기도 한다. 일을 끝낸 후 식당을 찾아 식사하는 그의 직업은 잠시 고독한 미식가가 된다. 

거창한 것들이 아니라, 고로상처럼 점심시간 혹은 오후에 잠깐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떨까. 친구들에게 물어본 바에 의하면 이렇다. ‘손님이 극히 드문 카페 직원(사장은 안 됨)’, ‘강아지 산책 전문가’, ‘점심시간마다 친구 회사로 찾아가 동료 대신 같이 밥 먹어주는 사람’, ‘겨울의 한강 수영장 관리자’, ‘길고양이 돌보미’, ‘헛소리하는 사람들 쫓아다니며 훈계하는 프로 불편러’. 답변을 모두 듣고 난 후 나는 이 소박한 꿈을 이루지 못한 그들을 대신해 정오의 고독한 산책가가 되기로 했다.

산책이라는
의식

막상 정오가 되어 산책로를 찾아보니, 사라지거나 분위기가 바뀐 길이 먼저 생각났다. 개포도서관과 수도공업고등학교 사이의 야트막한 언덕길은 주공아파트 단지가 철거되면서 한쪽 얼굴을 잃었다. 배화여대로 올라가는 좁은 서촌 골목길에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여러 가게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지만 외면하지 않고 그곳을 걷다 보면 지금의 풍경을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사는 동네를 걸을 땐 산책이라고 생각하니 우선 눈과 코가 예민해졌다. 장미 넝쿨은 담 너머로 흐드러졌고, 뒷산에선 아카시아 향이 슬그머니 내려왔다. 덜 말린 머리카락에서 뚝뚝 흐르는 물을 닦으며 분주히 걷던 출근길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 동네 친구는 어느 집 대문의 머리를 감싼 등나무 꽃 사진을 보내왔고, ‘그 집 어딘지 알아!’라고 답하는 자신을 대견해 했다. 하루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쉼터인 평상에 엉덩이를 들이밀거나 골목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있기도 했다. 나는 합법적인 정오의 고독한 산책가였으므로 ‘한창 몸 쓰고 머리 쓸 젊은이가 왜 저러고 있나?’ 하는 의문의 눈빛에 비밀스러운 눈웃음으로 응수할 수도 있었다.

사실 직업을 다시 선택해보라는 첫 번째 질문에 나는 정원사와 번역가를 말했었다. 완벽히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이나 언어를 다룬다는 것이 숭고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은 기도하는 사제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정오부터 시작된 나의 산책도 자신을 정화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풍경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무엇도 더하지 않는 것이 고독한 산책가의 자세다. 풍경을 그대로 두고, 그저 걸어야만 한다. 준비할 것도 특별히 필요한 것도 없지만 지나온 길의 모든 것을 다만 그대로 두고, 변하는 것은 나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렇게 산책을 직업 삼아 걸은 계절에는 일기장에 평소와는 다른 이야기가 적혀있다.

나는 커서
뭐가 될까

<러브하우스>라는 프로그램이 유행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우개에 하트 모양도 제대로 못 팠던지라 늘 미술 대신 음악 수업을 선택했다. 고등학교 때는 신문방송학도가 될 줄 알았지만 웬걸, 공연연출과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엔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모셔가는 연출가가 될 줄 알았는데, 졸업하고 나니 워드 프로그램을 켜는 일이 가장 무섭고 즐거운 에디터가 되어 있었다. 세상에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재미있어졌다. ‘나는 커서 뭐가 될까?’ 타자 소리가 요란한 사무실에서 조용히 상상해보면 이제는 한숨보다는 웃음이 나온다. 게다가 지금은 이렇게 속 편하게 말해도 학창 시절 나는 누구보다 ‘중2병’을 길게 겪은 비관론자였다.

정오의 직업은 며칠이 지나자 그만두어야만 했다. “앞으로 우리 회사는 오후 2시까지만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같은 일은 내 뜻대로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짧은 직업 체험은 즐거웠다. 뒤통수를 뜨겁게 감싸던 오후의 시간에 사표를 내긴 했지만, 목덜미에는 정오의 볕이 새겨진 듯하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정오의 직업을 그만둔 대신 이른 아침의 정원사나 저녁의 소설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 김명순,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중에서

비밀스러운 산책로와
어울리는 한 잔

쇠락한 골목의
아오이토리 샹그리아

졸업한 후 대학가를 지날 때면 가끔 이상한 기분이 든다. 어딘가 어색하게 꾸민 학생들과 로드숍의 분주한 가게 앞에서는 이 길을 벗어나는 것만이 중요해진다. 그렇게 걷다 보면 종종 자신을 잊을 때도 있다. 그렇게 번잡한 홍대나 신촌의 대학가 앞을 지나 미대 입시 학원이 많은 골목으로 들어서는 길은 조금 위안이 된다. 유명한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카페가 있는, 어딘가 쇠락한 냄새가 나는 곳. 그 길에 베이커리 레스토랑인 ‘아오이토리’가 있다. 일본어가 문득문득 들려오는 바 테이블에 앉아 샹그리아를 마실 때 나는 기분 좋게 외로워진다.

A.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29길 8
H. facebook.com/aoitori.seoul
T. 02 333 0421
O. 08:00~02:00

성균관대학교 후문 와룡공원길과
법학관 자판기 커피

성균관대학교에서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 학교에 다니던 옛 친구가 알려준 길이다. 그가 남겨준 지난 연애의 유산은 새로운 만남에도 늘 활용 중이다. 이 길로 가기 전에 우선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법학관으로 간다. 바로 옆 야구장의 배팅 소리를 들으며 걸은 후 건물 안에 들어가 자판기 커피를 뽑는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걷다 보면 성균관대학교 후문, 종로 02번 마을버스가 다니는 버스 정류장에 닿는다. 그곳에서부터 삼청동까지 이어지는 길은 서울에서 내가 아는 가장 낭만적인 산책로다.

A. 서울시 종로구 와룡공원길 192

연희동 궁동근린공원 산책로와
화이트 와인

주택가가 대부분인 연희동은 주말이 되면 북적해진다. 소란스러움이 기분 좋은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다. 소란을 벗어나고 싶은 날에는 언덕의 주택길을 따라 올라간다. 혹은 서대문 마을버스 04번의 종점에서 내린다. 그곳에서 연희동 주택의 지붕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책길이 시작된다. 연희동 와인 가게 ‘오디너리 애니버서리Ordinary Anniversary’에서 청량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사 가면 기분 좋게 취한 오후 산책을 할 수 있다. 그런 산책을 위해서는 아주 많은 술이 필요하지는 않다.

A.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로11길 57
H. instagram.com/ordinary.anniversary
T. 02 322 1501
O. 화~토 15:0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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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포토그래퍼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