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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재 — 유엔협회세계연맹 사무국장
차를 주제로 대화하던 김용재 사무국장은 달의 모양에 관해 이야기했다. 흔히 보름달의 완전함에 주목하지만, 매일 조금씩 차오르거나 기우는 달에도 저마다의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차의 세계도 이와 닮아 있다. 같은 잎이라도 찻잔과 물의 온도, 계절에 따라 매번 다른 맛을 내어놓는다. 하나의 명쾌한 정답만을 찾는 시대에, 그는 미묘하게 달라지는 모든 순간들을 잔을 비우고 또 채우며 오래도록 관찰해 온 사람이다.
찻자리가 무척 아름답네요. 이 자리에 앉으면 될까요?
네, 물이 끓으면 잔을 데워서 차를 한 잔씩 내어드릴게요. 아마 보시면 느껴지실 텐데, 이 자리에 놓인 도구들은 나무, 도자기, 금속, 유리처럼 소재가 다양해요. 저는 이렇게 서로 다른 재질이 한자리에 어우러지는 풍경이 좋더라고요. 차는 도자기에만 따라 마셔도 충분하지만, 도자기끼리 맞닿으면 쉽게 깨지기도 하죠. 그 사이에 금속이나 나무가 더해지면 서로 보완해주고, 전체를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역할을 해요. 오늘은 이 계절에 어울리는 차를 몇 가지 준비했어요. 앞에 놓인 잔들 중에 취향에 맞는 잔을 골라봐 주시겠어요?
저는 잔잔한 무늬가 있는 이 잔으로 할게요.
정답을 고르셨네요(웃음). 차에 어울리는 잔이 따로 있고, 계절에 맞는 잔도 있거든요. 지금이야 냉난방으로 온도를 조절하지만, 예전에는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고스란히 견뎌야 했잖아요. 그런 환경이 자연스럽게 다구의 형태에도 반영됐어요. 지금 고르신 건 전형적인 겨울용 잔이에요. 한번 만져보시겠어요? 꽤 두텁죠. 반면 옆에 있는 이 잔은 훨씬 얇아요. 겨울에는 얇은 잔에 차를 따르면 금세 식기 때문에,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아두려고 이렇게 두께가 있는 잔을 예열해 사용했어요. 여름에는 반대로 차를 빨리 식히기 위해 면적이 넓은 잔을 썼고요. 표면적을 보면 거의 두 배 정도 차이가 나죠. 선조들의 생활 지혜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다구를 갖추고 싶은 저 같은 맥시멀리스트의 합리화일 수도 있겠습니다(웃음).
맥시멀리스트의 차 도구가 궁금해지는데요(웃음). 차 도구 중에서는 찻잔을 특히 좋아하신다고요.
맞아요. 차를 아주 맥시멀하게 즐기려면 필요한 도구가 꽤 복잡한데요. 하지만 가장 미니멀하게 생각하면 사실 잔 하나면 충분해요. 그래서 차를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 무엇부터 사야 할지 어렵다고 하면, 저는 마음에 드는 찻잔 하나부터 고르라고 말씀드려요. 나한테 잘 맞는 ‘반려 찻잔’이 하나 생기면, 그 잔으로 마시면서 필요한 도구를 하나씩 더해가는 즐거움이 있거든요. 무엇보다 잔은 차 맛에 미치는 영향이 커요. 입술에 닿는 감각은 물론이고, 차가 담겼을 때 온도와 향이 온도와 향이 머무는 방식이 잔마다 완전히 다르니까요. 뒤에 찬장 구석구석을 보시면 도구가 가득 차 있어요. 2022년에 낸 책 《차를 시작합니다》에서는 찻잔이 약 700점, 다관이 한 200개 정도 있다고 소개했는데 그 이후로는 정확히 세어보지 않았어요. 아마 지금은 적어도 천 점은 넘을 거예요.
천 점이요?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인데요(웃음).
제 아내는 저와 반대로 미니멀리스트거든요. 아내가 고생이 많을 거예요. 어제가 마침 결혼기념일이었는데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어요. 이런 저를 쫓아내지 않고 데리고 살아줘서 말이에요(웃음).
선반에도 다구를 진열해 놓으셨네요?
오늘 일부러 흐름이 보이도록 다구를 쭉 꺼내 놓았어요. 보시면 다관 크기가 세월을 거치면서 점점 작아지는 게 보이죠? 예전에는 한 번 차를 우리면 적어도 대여섯 식구가 함께 마시는 경우가 많았지만, 점점 한두 사람이 마시는 형태로 바뀌었거든요. 가족 구성과 생활 방식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다구 형태에도 영향을 준 거예요. 차를 마시는 분위기와 편의, 문화의 변화에 따라 도구가 계속해서 달라지고 있는 거죠.
기물의 형태 외에 차 문화 전반에서 체감하는 또 다른 변화가 있을까요?
30년 가까이 차를 마시면서 그런 변화를 체감해 왔어요. 한때 차는 은퇴한 교장 선생님들의 취미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젊은 세대가 차에 깊이 빠져 있잖아요. 가장 크게 느끼는 건 ‘글로벌 말차 열풍’이에요. 전통 방식으로 우려 마시는 것뿐 아니라 설탕과 우유를 더한 밀크티, 셰이커에 흔들어 마시는 말차라떼처럼 전혀 다른 형태도 생겨났죠. 저는 이것이 천 년 만에 다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한 문화권에 머물던 차 문화가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하면서 다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흐름이요. 8-9세기 중국에서 시작된 차 문화가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해지던 시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각 지역의 음식 문화와 생활 방식에 맞게 차를 변형하고 발전시켰죠. 지금은 그 과정이 훨씬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나요. 저는 이런 융합과 확장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문화가 단순히 직선적으로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게 아니라, 흐름을 타고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차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흥미로워요. 어린 시절 유홍준 관장님이 이끌던 한국문화유산답사 모임을 따라다니셨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장님이신 유홍준 관장님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며 1990년대 초부터 그 모임을 이끄셨는데, 저희 어머니가 회원이셨어요. 덕분에 저도 국민학생 시절부터 답사를 따라다녔죠. 차를 마시는 모임은 아니었지만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어른들 대부분 전통문화나 민속품, 차에 관심이 깊으셨어요. 어린 제 눈에는 그저 지저분하고 낡아 보이는데 어른들은 왜 저런 걸 좋아하실까 싶어 “왜 이런 걸 귀하게 여기세요?” 하고 묻기도 했죠.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그 물건이 지닌 가치와 시간을 설명해 주셨어요. 때로는 작은 잔 하나를 선물로 주기도 했고요.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세계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대학 시절에는 교내 전통찻집에 자주 가셨다면서요?
사실 제가 2003년에 재수를 했거든요. 그때 《중앙일보》에 서울대학교 ‘다향만당’이라는 전통찻집 기사를 봤는데, 매년 차밭 나들이를 간다는 내용이 있더라고요. 저는 차를 이렇게 오래 좋아해 왔지만, 정작 한 번도 찻잎을 직접 따서 만들어본 적은 없었거든요. 꼭 해보고 싶었는데 서울대 학생들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재수하면서 반은 농담, 반은 진담으로 서울대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죠. 다행히 운 좋게 입학을 했고,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스크랩해 둔 신문을 들고 그 찻집을 찾아갔어요. 찻집을 운영하시던 선생님께 신문을 보여드리면서 “이것 때문에 이 학교를 왔습니다.”고 했죠. 선생님도 무척 좋아하셨어요. 그렇게 2004년부터 매년 봄이면 하동, 보성, 순천, 나주, 정읍… 전국 차밭을 다니면서 직접 잎을 따고 덖어 만드는 걸 계속해 왔어요.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차밭에서의 경험이 차를 즐기는 방식이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정말 큰 충격이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차밭에 함께 갔던 사람들 모두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하곤 해요. 보통 우리는 차를 ‘상품’으로 먼저 접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가격을 먼저 따지게 되는데, 직접 잎을 따고 만들어보면 그 가치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와요. 차나무에서 막 올라온 연한 잎을 따서 덖고 말리면, 대부분 수분으로 날아가고 남는 건 20퍼센트 정도뿐이거든요. 그런 과정을 직접 겪고 나면 차 가격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지죠. 무엇보다 4-5월에 따는 잎은 겨울을 버텨낸 차나무가 처음 올리는 새순인데요. 그 여린 잎을 200-300도까지 달궈진 가마솥에서 덖는 과정을 지켜보면, 처음에는 생명을 빼앗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해요. 그런데 서너 번 덖는 동안 향이 다시 살아나고, 우리가 마시기 위해 뜨거운 물을 부으면 마른 잎이 물속에서 다시 펼쳐져요. 꼭 찻잎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보이죠. 그래서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 있게 차를 마시면 하나의 생명 흐름과 순환을 함께 경험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찻집에서 만난 인연들을 통해 차를 즐기는 또래 친구들도 많이 생겼겠네요.
맞아요. 저는 원래 집에서도 그렇고 어른들과 차를 마시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차에는 정해진 예법과 방식이 있다는 인식이 강했죠. 그런데 학교에서 선후배들이랑 차를 마실 때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어요. 수돗물과 생수로 우린 차 맛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도 해보고, 이것저것 실험하며 차를 정말 자유롭게 다뤄봤어요. 그때 처음 느꼈죠. ‘아, 차는 혼자 마시는 게 아니라 같이 마셔야 더 재미있구나.’ 다향만당은 저에게 그런 경험을 하게 해준 곳이에요.
《차를 시작합니다》에서 “함께 마셔야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문장이 기억나요. 10년 전부터 차 모임 ‘청년청담’을 이끌어오고 계시기도 한데, 어떻게 시작된 모임이에요?
대학원 시절까지 함께 차를 즐기던 선후배들이 사회생활을 하며 예전처럼 모이기 어려워졌어요. 저도 직장을 다니면서 서울에서 편하게 모일 모임을 만든 것이 시작이었죠. 동호회로 정식 발족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해 열린 대규모 차 학술대회였는데, 감사하게도 저를 미래 세대 청년 대표로 초대해 주셨고 그때 지인들과 꾸린 세션 이름이 바로 ‘청년청담’이었어요. ‘맑을 청淸’에 ‘말씀 담談’을 쓰는 이 이름에는 차를 마시며 나누는 즐거운 이야기라는 뜻과 함께, 이해관계를 떠나 아름다움을 논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처음 10명으로 시작한 작은 모임이 어느덧 10년을 넘겼네요. 지금은 매달 정기 모임과 1년에 한 번 열리는 큰 다회를 통해 수십 명의 차인이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관계 안에서 차는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차에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는 힘이 있어요. 물론 저도 커피나 와인, 위스키를 즐기지만 차는 조금 신기한 지점이 있죠. 자신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관심사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반응이 나뉘는 경우가 많잖아요. 보통 스포츠나 화장품처럼 호불호가 갈리는 주제와 달리, 차는 남녀노소나 국적을 떠나 대화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거든요. 단순히 음료 하나를 가운데 두는 것 같아도 커피를 마실 때와는 대화의 밀도와 깊이가 확실히 달라요. 커피는 보통 한 잔을 비우면 시간이 자연스럽게 끝나버리잖아요. 할 이야기가 남아 있어도 “커피 한 잔 더 할까?” 하기가 조금 어색할 때가 있죠. 그런데 차는 물을 다시 붓고, 다음 차를 또 우리면서 대화의 시간이 끊기지 않고 유연하게 이어져요.
말씀 나누는 사이 두 번째 차가 우려지고 있네요. 어떤 차인가요?
중국 푸젠성 무이산에서 나는 무이암차 중 ‘불견천不見天’ 이라는 차예요. 매화 향이 나는 것이 특징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매화 가지도 함께 두어봤어요. 매실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아주 맑고 또렷한 향이 올라오죠. 차를 마신다는 건 단순히 사시사철 같은 음료를 마시는 것과는 달라요. 녹차만 해도 계절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처럼요. 봄에는 싱그럽지만, 다른 계절에 마시면 훨씬 묵직하게 다가오거든요. 그런 미묘한 변화를 감각하는 것도 차의 큰 즐거움이죠.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 매화가 가득해요(웃음).
정말 그렇네요! 매화 꽃밭에 온 것처럼요(웃음).
오늘 주전자와 잔, 찬장 위 기물도 모두 매화가 그려진 걸로 골라봤어요. 계절에 맞게 이렇게 분위기를 바꿔 즐기기도 해요. 가을에는 은행잎이나 국화를 곁들이고, 모란이 필 때쯤에는 모란이 그려진 기물로 세팅하기도 하고요. 물론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차는 충분히 즐길 수 있어요. 잔 하나만 있어도 되고, 복잡한 규칙이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다만 이런 다양한 방법을 알게 되면 차를 즐기는 폭이 훨씬 넓어져요. 저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안하고 싶어요. 차는 맛과 향뿐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끼고, 공간의 분위기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음료라고 생각하거든요.
흔히 동아시아 3국의 차 문화를 비교하곤 하잖아요.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 차 문화의 특징도 있을까요?
한국 차 문화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는 조금 층위를 나눠서 봐야 해요. 정확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차 문화가 있고, 1970년대 차 문화 운동 이후 2000년대까지, 현재의 70-90대 어르신들이 이끌어 온 흐름이 있어요. 또 제 세대와 이보다 젊은 세대가 생각하는 차 문화도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로 묶어 설명하기는 쉽지 않아요. 70년대 이후 앞 세대에서는 동아시아 차 문화를 이렇게 구분하곤 했어요. 일본의 다도는 수행에 가까운 문화로, 말차를 다루는 동작 하나까지 같은 규칙을 오랫동안 수련해야 차를 즐기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고 봤죠. 중국의 다예는 치파오를 입은 여인이 긴 손톱으로 위에서 물을 떨어뜨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따르는 모습처럼, 기교와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문화로 이해됐어요. 반면 한국 차 문화는 예절을 중심으로 설명됐어요. 손님을 대접하는 자세나 마음가짐 같은 기본적인 예의범절을 본질로 여긴 거예요. 다만 그 과정에서 차가 가진 다양성과 즐거움은 점점 사라지고, 격식과 형식만 남게 됐다고 느끼기도 해요.
왠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웃음).
여자와 남자는 어떻게 앉아야 하고, 손동작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규칙만 남은 거죠. 그러다 보니 차를 어렵게 느끼거나 자녀들이 차를 마시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된 거예요. 그런데 요즘 세대는 조금 달라요. “이거 맛있는데?”, “재밌는데?”하고 직관적으로 접근하거든요. 꼭 정해진 규칙이 없어도 즐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죠. 저는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흥미롭고 기대돼요. 이제 답십리 골동·고미술 상가가 붐비고 있어요. 수집가로서 값이 두 배, 세 배로 뛰어서 조금 속상하기도 하지만요(웃음).
이 찻자리에서도 느끼지만, 만듦새와 기능을 모두 고려한 다구가 차 시간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공예와 차는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요?
가장 기본적으로는 차 맛이 달라져요. 인류가 차나무 잎을 음료로 마시기 시작한 건 4-5세기쯤이고, 지금까지 1500년이 넘었어요. 처음에는 약이나 나물처럼 끓여 먹었고, 생강이나 소금을 넣어 팔팔 끓여 마시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다음 단계로 말차 문화가 생겨요. 말차는 중국 송나라 시대부터 시작된 차 문화예요. 그 흐름이 고려와 일본 가마쿠라 시대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이 차의 향과 맛을 더 섬세하게 즐기는 방법을 계속 연구해 왔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예가 중요해졌어요. 차의 섬세한 맛을 제대로 살려내려면 도자기 같은 다구가 필요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차의 맛이나 향이 흡수되거나 변하기도 하니까요. 같은 차라도 어떤 다구에서는 차가 가진 맛이 충분히 나오지 않기도 하고, 어떤 다관에서는 차가 가진 맛이 온전히 살아나요. 그래서 차를 오래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맛을 제대로 내는 도구’를 찾게 돼요. 물론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차 문화에서 공예는 곧 아주 중요한 기능인 셈이죠.
같은 차라도 도구나 환경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점이 미묘한 변화를 발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큰 즐거움이 되겠어요.
맞아요. 요즘 사회를 보면 점점 더 모든 것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어요. 기술이 발전하고 AI까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무엇이 가장 좋은지 즉각적으로 알고 싶어 하죠. 복잡하게 고민하기보다는 “이 중 가장 좋은 게 뭐예요?”라고 묻고, 답 하나를 선택해서 끝내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저는 그런 효율 중심의 사고가 우리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과 가치를 놓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다른 분야는 점점 더 표준화되어 가지만, 차와 예술은 그렇지 않거든요. 예술 안에서 ‘가장 좋은 작품’이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예술가는 젊은 시절에 빛나는 작품을 만들고, 어떤 이는 원숙해진 노년에야 깊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죠. 정해진 정답 대신, 시대의 흐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순간을 포착하고 경험하느냐가 중요해요. 저는 바로 그 아날로그적인 변화와 과정이 차와 공예가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팽주(차를 우리는 사람)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오셨다고요. 오늘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저희 잔이 비지 않게 마음을 써주시는 게 느껴졌어요. 찻자리에서 팽주는 어떤 마음가짐이 있어야 할까요?
차는 잠깐만 타이밍이 어긋나도 맛이 달라지거든요. 대화에 너무 몰입해 신경이 분산되면 차가 너무 진해지기도 하고, 반대로 마음이 급하면 덜 우러난 채로 따르게 되죠. 그래서 팽주는 어머니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잔을 살피고, 언제 다시 차를 우리고 따라야 하는지 끊임없이 신경 써야 하니까요. 사람이 많아지면 차를 계속 우려야 해서 사실 굉장히 바빠요. 차뿐 아니라 다식이나 대화의 흐름까지 챙겨야 하니, 어떻게 보면 살림을 하는 것과도 비슷해요. 오죽하면 차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남이 우려주는 차가 제일 맛있다”는 말이 있겠어요. 그래도 팽주는 차를 우리면서 그날 차의 상태나 맛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차에 대한 이해도 자연스럽게 깊어지는 즐거움이 있죠.
차를 매개로 오랜 시간 활동해 오셨는데, 개인적으로 차를 통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듣고 싶어요.
주변에서 한국 차의 부흥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그 일을 꼭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서 지금까지는 조금 선을 그어 왔어요. 다만 언젠가 꼭 하고 싶은 작업은 있는데요. 전 세계 차 문화를 다룬 콘텐츠를 보면 중국, 일본, 영국, 터키 이야기는 있는데 한국 차는 거의 등장하지 않거든요. 약한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없는 수준이죠. 그래서 언젠가는 한국 차를 영어로 제대로 소개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지금 준비 중인 《차를 시작합니다》의 후속권인 ‘말차’ 책도 그 연장선에 있어요. 말차가 단순히 일본만의 문화가 아니라, 송나라 시대부터 동아시아가 함께 공유해온 흐름이라는 걸 설명하려 해요. 이 책을 한글판으로 먼저 내고 가능하다면 영문판도 준비해서 그 안에 한국 차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볼까 해요.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1. 불견천 무이암차
무이암차는 단일 품종이 아닌, 그 아래에 수백 가지 품종이 있는 중국 우롱차의 한 갈래다. 그중 ‘하늘을 볼 수 없다’는 뜻의 불견천은 햇빛이 깊이 들지 않는 가파른 골짜기에서 자라난 차나무의 잎으로 만든다. 눈이 많이 내리는 환경에서 자란 찻잎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조건 덕분에 은은한 매화 향을 머금고 있다. 매화꽃이 피어나는 초봄에 즐기기 더없이 근사한 차다.
2. 강진 월산떡차
다산 정약용의 제자 집안이 7대째 이어오고 있는 차. 찻잎을 떡처럼 찧고 옆전 모양으로 빚어 바람과 햇빛으로 발효시킨 ‘떡차’는 1000년 전부터 내려온 가공 방식으로, 차를 덩어리째 우려 마시는 재미가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차로 치면 ‘보릿고개’ 같은 시기다. 지난해 만든 차의 싱그러움이 옅어지는 때라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해당화를 더해 블렌딩했다. 은은한 장미 향과 산뜻한 단맛은 겨울의 묵직함을 걷어내고 봄을 맞이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3. 하동 유자잭살차
유자의 속을 비우고 잭살차와 모과, 지리산 돌배 등을 채워 말린 뒤 끓여 마시는 차. 오랜 시간 천천히 달여내기 때문에 유자의 싱그러운 향이 찻물 속에 깊게 스며든다. 우리 선조들은 차를 기호음료로만 즐긴 것이 아니라, 계절의 변화와 몸 상태에 맞춰 주변의 귀한 재료를 더해 마셨다. 호흡기에 좋은 성분을 고루 섭취할 수 있어 일교차가 큰 환절기에 특히 잘 어울린다.
에디터 황진아
포토그래퍼 박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