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집을 상상하게 된 건 직접 만든 접시 위의 음식 때문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모양새를 지닌 음식을 보고 있으면 온기 덕에 적당히 더운 부엌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곧 그녀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도 함께 궁금해졌다.
별일 없이, 특별할 것 없이
그녀가 교토에서 12년간 살았다고 말한 순간 주변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이해됐다. 사람은 자기가 사는 도시를 닮아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교토의 소박하고 정갈한 인상을 가진 건 지금 사는 대전 그녀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오래전 열린 엑스포의 기억이 곳곳에 남아 있는 아파트 단지는 조용하고 한적했다. 세상 시끄러웠던 날을 다 보낸 이의 얼굴처럼.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2년간 일을 하다 그만뒀다. 하루는 별일 없이,
특별할 것 없이 흘러간다. 아침에 남편이 아침을 먹고 출근하면, 그녀도 천천히 아침을 먹고 티브이를 본다. 음악을 트는 것보다는 라디오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때때로 논문이나 비즈니스 서류 번역을 할 때도 있다. 해질 때 즈음이면 둘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고 매일 저녁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일본어 강의를 나간다. 그녀는 연신 게을러 보인다고 부끄러워했지만 별일 없는 날이 이어지는 집은 가을의 한 때를 보내기 더없이 좋았다.
부엌
그녀가 이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날은 오일장이 설 때다. 직접 키운 작물을 내놓는 판매자가 많아 제철 채소들과 과일을 보는 재미가 있다. 한국에서 회사에 다닐 때 밥을 못 해먹는 게 가장 스트레스였다고 했다. 요리하던 날들이 늘어난 요즘이 좋다는 그녀의 장바구니에는 무겁지 않게 필요한 만큼의 재료가 들어있다. 그녀가 내놓은 접시의 공통점은 재료가 먼저 보인다는 것이다. 무엇을 써서 요리했는지 금세 알 수 있고, 조리법도 간단해 금방 외울 수 있을 정도다.
햇당근 샐러드 햇당근 1개를 얇게 썰고 좋아하는 견과류(호두, 잣 등)를 넣고 단맛을 첨가하기 위해 건포도를 넣는다. 씨겨자, 소금, 레몬즙(혹은 오렌지주스), 올리브 오일을 넣고 섞는다.
무화과 오픈 샌드위치 호밀빵을 팬에 살짝 굽고 빵 위에 카망베르 치즈와 무화과를 올린다. 꿀과 후추를 뿌려 먹는다.
자주 쓰는 주방 도구
01 스타우브 냄비와 팬 Staub pot and pan 10년 정도 쓴 주물냄비와 팬이다. 주물은 열을 고르게 분배해 오랜 시간 유지하고 재료의 영양소 손실을 최소화한다. 크기 별로 구매하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중간 크기의 냄비를 사서 요리하기에 불편함은 없다.
02 알레시 치즈강판 Allesi cheese grater 이탈리아의 주방, 생활용품 브랜드인 알레시의 치즈 강판. 알레시는 내부 디자이너들을 두지 않고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밑에 받침이 있어서 편하고, 플라스틱이라 설거지하기에도 좋다.
03 라 바제 도마 La baje cutting board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 연구가 아리모토 요코가 만든 주방 브랜드. 작은 물건을 좋아하는 그녀는 정사각형 도마가 크지 않아 차지하는 비중이 넓지 않은 것이 장점이라고 했다. 넓은 도마가 필요할 땐 두 개를 이어서 쓰면 된다.
베란다
그녀는 엄마와 취미와 취향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요리하는 것도 식물과 오래된 물건을 좋아하는 것도 같단다. 자주 만나는 친구를 물었을 때도 엄마라고 대답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엄마보다도 물건을 안 사고, 호시탐탐 엄마의 물건을 탐내는 딸이다. 엄마랑 놀다 보니 같이 늙어간다고 투정하는 그녀의 휴대전화에는 식물 사진이 가득하다. 베란다에 있는 식물은 엄마의 집에서 가져오거나 꺾꽂이해서 키운 것들. 집 안의 식물 중 가장 아끼는 것은 꺾꽂이해온 뱅갈 고무나무로 일 년쯤 함께 살았다.
침실과 서재
넓은 집에 새 가구들만 덜렁 있었다면 쓸쓸한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얼핏 보면 꼭 텅 빈 것 같은 그녀의 집이 다정했던 이유는 ‘새것 같은’ 가구가 없어서였다. 침실에는 외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와서 엄마가 간직하고 있던 장으로 지금은 그녀까지 3대가 이어 쓰고 있다. 아빠가 쓰던 스탠드와 친할머니의 물건인 장과 거울도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보물이다. 서재의 책상은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했던 것. 옛 물건을 좋아해서 부모님 댁에도 이렇게 오래된 가구가 많다고 말했지만, 버리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 비단 옛 물건을 좋아해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여전히 집의 얼마만큼을 비워 두고, 마음에 드는 가구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책
가난한 사바랭 | 모리 마리
서재에는 가지고 다니기 편해 좋아한다는 문고판 책들이 몇 권 있다. 가난한 사바랭은 자기 자신을 가난한 ‘브리야 사바랭(프랑스의 법관이자 미식가로 저서 미식예찬이 유명하다.)’이라고 말하는 모리 마리의 에세이다. 철은 없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할머니인 그녀는 돈은 없어도 미식에 대한 고집과 자신의 스타일이 확고하다. 자신의 허름한 아파트를 프랑스식으로 아파르트망이라고 부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향이 좋은 홍차와 비스킷을 먹는 순간 절망적인 기분은 잊는다. 미식에 대한 섬세한 고집과, 독특한 미의 세계 덕에 빠져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