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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유별히 특별할 것 없는 하루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법을 말하라는 질문이 당도한다면, 나는 가장 먼저 ‘마스다 미리益田ミリ’를 답할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스트인 그는 담백한 시선으로 우리네 삶을 훑어보다 잠시 음미하고 싶은 감정들을 발견해내니까. 그 감정의 온도는 미적지근해서 되려 자꾸만 손이 간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 속 두 사람, 나쓰코와 히토미의 일상에 귀 기울여 행복을 발견하는 법에 마저 답해본다.
하시다 나쓰코
30대 싱글 일러스트레이터 여성. 낮에는 도넛 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밤에는 만화를 그려 인터넷에 올린다. 자신의 일상과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상상을 더해 그린 만화의 제목은 ‘화과자 가게의 하루코’. 그림을 그릴 땐 ‘쓰유쿠사 나쓰코’라는 필명을 쓴다.
사와무라 히토미
40대 싱글 직장인 여성. 70대 부모님과 함께 여전히 본가에 산다. 그의 곁엔 부모님과 친구들, 직장 동료들과의 오붓한 시간이 있고, 이따금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사랑이 찾아와 머물렀다가 떠난다. 40대의 안정감과 씁쓸함이 골고루 흩어진 일상을 보낸다.
내 이름은 하시다 나쓰코. 누군가는 나를 ‘쓰유쿠사 나쓰코’라고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넛 가게에서 알바를 마치면 매일 저녁, 책상에 앉아 ‘하루코’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일상 만화를 그리는 중이니까. 하루코의 이야기는 나한테서 비롯되지만 똑 닮은 건 아니다. 도넛을 화과자로 바꾸었고, 내가 하지 못한 말을 하루코는 할 줄 안다. 또 내가 생각의 물꼬를 트면 하루코는 그 가닥을 잡아간다. 어느 날은, 복권에 당첨되면 그림도 알바도 그만둔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게 될까 상상해 봤다. 갑자기 온천에 가거나 세계 일주를 떠나더라도 그걸 내가 좋아한다면, 인생의 대의명분 따위는 필요 없는 게 아닌가. 나의 ‘좋아한다’는 마음이 설령 모습을 바꿔 다른 사람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이더라도 내 안에서는 언제까지고 연결될 테니까. 심심한 맛으로 시작한 생각을 하루코의 마음을 빌려 매듭지었다.
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는 작은 비밀이 있다. 내가 멜빵바지를 즐겨 입는 이유는, 직장 생활 속 인간관계에 지쳐 반년 동안 집에만 머물렀을 때 나를 바깥으로 나가게 해준 갑옷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넛 가게에서 일하게 된 이유는, 우연히 가운데가 뻥 뚫린 ‘제로’ 모양의 도넛을 보며 아무것도 없는 내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는… 형언하기 어렵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는데 왜 지금까지 이어졌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나를 알리고 싶거나 내 그림을 보고 즐거워해 주길 바란다는 것도 완전한 답은 아니다. 모르는 것투성이어도 분명한 건, 인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 좋아할 자신이 있다는 것. 이건 하루코의 마음을 빌리지 않고도 말할 수 있다.
얼마 전, 아버지가 복권에 당첨됐다. 당첨액이 크진 않지만, 매번 큰돈을 주고 사도 영 꽝이던 터라 이번에는 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같은 크기라 해도 싫은 일보다 기쁜 일은 더 빨리 사라지는 느낌이라 했더니, 아버지가 답했다. “빨리 사라진다고 해도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의외로 기뻤던 기억이 오랫동안 남는 것 같다만, 신념을 가졌을 때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평하던 나는 마음속에 좋아하는 일과 함께 새겨진 작고도 기쁜 신념들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그런 말도 할 줄 안다니. 좋았어, 오늘 밤에 그리는 만화에선 소금쟁이가 되고 싶다던 아버지의 소원을 이뤄드려야겠다.
내 이름은 사와무라 히토미. 여전히 본가에 살고, 여전히 만원 전철에 몸을 실어 출근한 직장에서 분주히 일한다. 여가 시간에는 가족 또는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는 것도 20대와 30대의 나를 지나 40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일상이다. 달라진 걸 꼽으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계절이 찾아오는 기색을 금세 알아차린다는 것. 요즘처럼 봄볕이 스치고 갈 때면 ‘이 느낌 알아.’ 같은 안심이 떠오른다. 몸속 세포는 매일 바뀌지만 죽을 때까지 나라는 존재는 단 하나라는 생각. 자신의 일관성을 깨우치는 데 나날이 탁월해진 것 같다.
며칠 전, 나이가 비슷하지만 결혼 후 아이를 키우고 있는 동료와 티타임을 가졌다. 꽃이 핀다는 것은 곧 저물 때도 온다는 것. 봄이 애달프다는 동료는 평균 수명이 160년이길 바란다며 그중 100년은 30대로 살고 싶단다. 일도 여행도 그리고 사랑도 실컷 누릴 수 있는 시기라 생각하는 걸까. 내 머릿속에선 몇 번의 데이트를 하며 가까워진 연하의 연인 마카베가 떠오른다. 마카베를 만나는 날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연인한테 젊게 보이기 위해 공들여 화장을 고치는 ‘폴’이 떠오른다. 내가 지나온 시간이 약점처럼 느껴지는 기분. 모든 게 달라지는 와중에도 고유하게 존재하는 나를 알면서도, 빈번히 이보다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는 게 인간의 본성인가 싶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우리의 관계가 오래가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도 그 쓸쓸함을 한편으로는 전부 예상했다는 거다.
요즘 나는 곧잘 허무함을 떠올렸다. 부쩍 모르는 게 많아진 부모님과의 외식 시간을 내가 주도할 때, 텔레비전 안에서 영원한 젊음을 누릴 것 같은 연예인들을 보며 나의 갱년기를 상상할 때, 죽음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간인 이상 불현듯 떠오르는 허무함을 피할 순 없었다. 그러나 나는 요즘 곧잘 행복함도 떠올린다. 퇴근길에 새로운 케이크 가게를 발견하면 설렘을 느끼고, 친한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고 노래방까지 간 다음 날 아침의 늦잠은 달콤하다.아홉 개의 순간이 허무하더라도 ‘이게 내가 주인공인 만화의 마지막 장면’이래도 만족할 단 한 개의 순간을 맞이한다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슬픔과 기쁨이 오가는 삶이 이런 나를 만들었다.
ᅳP91. 《누구나의 일생》 중
나의 이름은 아무개. 내가 나로 태어날 줄 알았던 사람? 어디를 둘러봐도 손 번쩍 든 이는 찾을 수 없을 테다. 나는 초대를 받았는지도 모른 채로 얼떨결에 삶을 시작해 시간을 나아간다. 아이에서 청년으로, 중년과 노년에 다다르기까지 더디던 시간이 때로는 가속도가 붙어 눈썹을 휘날릴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고, 꽤 자주 가파른 언덕에 올라선다. 어린 날에는 만사를 통달한 나를 꿈꾸며 어엿한 어른이 되길 바라고, 어엿한 어른이 되면 유난히 반짝이던 때라며 어린 날을 꿈꾼다. 언젠가는 분명해 보이던 삶의 의미가 이따금 아득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누구나 처음일 인생을 변화무쌍하게 살아가려니 분명한 것보다 흔들리는 게 많다.
나쓰코와 히토미의 일상은 나의 것과 엇비슷하다.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해내고 싶은 바람, 가끔씩 복권에 당첨되어 부자가 되는 상상, 나와 다른 생애주기를 사는 친구와의 만남, 책상 앞에 앉아 한 번씩 찌뿌둥한 어깨를 펴는 일, 과식과 과음이 오가는 주말,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 희비가 오르내리는 연애와 사랑으로 마음을 부둥켜안는 일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비슷한 걸 하나 꼽으라면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고유하게 존재하는 내가 있다는 것 아닐까. 나이기에 발견할 수 있는 오롯한 행복이 있다는 걸 믿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흔들리는 삶에서 절망 대신 행복을 쉬이 거머쥘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의 이름은 아무개. 그 자리에 나쓰코나 히토미 또는 이 문장을 읽는 당신의 이름을 넣어도 요철 없이 이해될 보통의 이야기다. 언젠가 끝이 있을 삶을 살아가며 얻는 생각은 엇비슷하다. 지난 과거가 어려웠다고 현재나 미래가 평온하리라 낙관할 수 없고, 오늘의 변화에 잘 적응했다고 내일의 변화도 따라갈 수 있을지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초점을 둘 곳은 바로 하나, 지금뿐이다. 흘러가는 매일에서 작은 행운이라도 찾아내는데 게을러지지 않기로 한다. 군데군데 기쁨이 많은 날에는 부지런히 주워 주머니에 넣고, 기쁨이랄 건 눈곱만한 것도 안 보이는 날에는 아예 잠시 멈춰 직접 만들어 보기로 한다. 나와 멀지 않은 곳을 응시하며 작은 기쁨의 순간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절망 없이 오늘을 살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
ᅳP151.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중
에디터 이명주
자료 제공 새의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