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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두고 떠나지 않는 농부처럼 ― 소서
AROUND Series | 절기 따라 걷기
스물네 번의 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쓰다듬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기록한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오가는 다양한 사념들은 오히려 몸의 움직임을 굼뜨게 하고,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마저도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나 농부는 아무리 날씨가 마음 같지 않고, 몸이 무겁게 느껴져도 자신의 논과 밭을 두고 떠나지 않는다. 삶의 터전을 두고 도망쳐 버리면 다가오는 수확의 계절에 빈손으로 굶주린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을 알고 있으니까.
소설 《운수 좋은 날》 같은 날이었다. 내가 나밖에 될 수 없는 것이 숨 막히게 힘들다는 이야기를 용기 내어 누군가에게 했고,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듣던 그가 당신이, 당신이기에 할 수 있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 꺼내어 놓아야 그다음으로 흘러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도. 그 이야기가 세상에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마음은 여전했으나, 누군가가 듣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한결 얼굴이 풀어져 버리는 여름날. 좋아하는 카페에는 오늘따라 사람이 없어서 운이 좋아야 앉을 수 있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밖은 뜨거운데, 실내에 들어서니 공기가 서늘해서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는 좋아하는 자리에 앉는데 창밖의 나무가 며칠 전보다 덩치가 커져 있어 부드러워진 얼굴에 빛이 조금 더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어둠 곁을 서성거리는 지난날들 동안에는 제대로 읽지도 쓰지도 못하며 지냈는데, 그날은 가지고 나간 책을 읽기도 하고 쓰고 있던 글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때맞춰 찾아와 준 풍경들 속에서 마음이 한껏 화창해진 나머지 생각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 적은 역시 없고, 일어난 일들은 모두 삶이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기 위해서, 이 일을 통해 더 먼 곳까지, 혹은 더 깊은 곳까지 걸어가 보라고 준비해 둔 풍경들 같다고. 정말이지 너무 완벽한 오후를 오랜만에 만나 한껏 들뜬 마음이 되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자전거를 탔다. 마침 적당한 바람이 불고, 뜨거운 여름을 환대하는 나를 안아주는 것처럼 햇살도 다정해서 페달을 밀어내는 발끝에 명랑함이 가득했다. 셀 수 없이 여러 번 지나온 길, 지도는 기억 속에 이미 잘 새겨져 있는 익숙한 동네의 도로를 달렸다. 연희동에서 출발해 합정동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한적하고, 중간에 자전거 도로가 있어 제법 좋은 길을 택했다. 평소보다 속도를 낸 것은 이제 어둠이 다 지나갔다는 희망, 그 들뜬 마음 탓일 것이다.
힘껏 발을 구르다가 우회전을 하는데, 아주 얕아 보이는 턱에 자전거 바퀴가 겉돌면서 우당탕 철컥,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넘어지는 것은 찰나였는데 아주 짧은 그 순간 오래된 기억을 후다닥 꺼내어 겁먹은 표정을 하는 나를 만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땅에 쏟아진 나는 양 무릎과 종아리가 피투성이인 채 잠시 그 길에 앉아있었다. 캄캄한 터널이 시작되었던 삼 년 전 그날이 떠올라 목구멍이 답답해졌다. 그날은 이렇게 넘어지면서 손목과 팔꿈치, 어깨를 함께 다쳤는데, 부상은 이 년 동안이나 나를 힘들게 했고, 이제야 드디어 그 그늘에서 빠져나와 몸이 가뿐해 진 터라 서둘러 초대된 기억에 덜컥 눈물부터 머금게 되었다.
넘어지는 순간 그 날이 떠올라서인지 땅에 손을 짚지는 않았고, 그 덕분에 피가 나고 멍이 들기는 했지만 심각한 통증이 시작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픔은 어쩔 수 없이 찾아와 매일 소독하고, 약을 바른다. 종아리에서는 자꾸만 열이 오르고 무릎 상처에는 이제 딱지가 앉으려고 하는데도 여전히 얼얼해서 걸을 때도 앉아있을 때도 다리의 존재를 잊을 수가 없다.
어딘가로 향해 갈 때, 가방이 무거우면 무언가를 빼서 두고 갈 수 있다. 그러니까 물병 하나를 꺼내어 식탁에 내려놓고 갈 수가 있는데, 무거운 것이 내 몸이거나 내 마음일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두고 가고 싶은데 제일 무거운 조각을 두 손으로 빼내어 내려놓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보이는 몸도 보이지 않는 마음도 마찬가지. 몸은 어느 부분도 떼어낼 수 없고, 마음을 나 자신과 분리하려면 아침 내내 명상을 해도 쉽지 않으니 무거워지면 무거운가 보다 하며 길을 나설 수밖에. ‘소서(小暑)’가 다가오니 날은 점점 무더워지고 장마가 코앞이라 공기는 습해지는데, 다친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무더운 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마다 다리가 화끈거려서 어리석게도 걸음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날들이 이어진다.
나는 자꾸만 포기하고 싶고, 또한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알아보며 어루만지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이제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어둠을 기억하고 싶지만, 이제는 다 잊은 얼굴로 텅 빈 웃음을 짓고 싶다.
나는 두려워서 눈을 감고 싶으면서도, 눈을 제대로 뜨고 보며 내가 있을 자리를 정확하게 정하고 싶다.
나는 먼 곳으로 흘러가고 싶은데, 또 아무 데도 가지 않은 채 여기에서 깊은 곳으로 떨어지고 싶다.
두 가지의 마음을 다 가진 나는 그런 내가 몹시도 불편하다. 둘 중 하나의 마음으로 나를 이끌어서 보기 좋게 다른 하나의 마음을 탁 접어버리던 때에는 내가 불순물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지 못해서 어떤 면으로는 편안했는데, 그렇게 서둘러 내린 결론들이 치유되지 못한 상처 덩어리로 몸속에 배치된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는 그것도 할 수가 없다. 순도 100%의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고 싶은데 나는 매번 반반이거나 어둠의 비중이 더 높아서, 그런 내가 밝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정화에 대한 내용들을 요가 수업에서 나눌 때마다 스스로가 위선자 같다는 생각이 들며 삶이 막막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런 나를 돌보며 잘 살아가 보자고 ‘하지’에는 분명 다짐했는데도 이런 작은 상처 앞에서 벌써부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보이면 소서를 맞이한 농부들의 마음이 궁금하다. 어찌할 도리 없는 양극단, 불볕더위와 장마를 함께 겪을 때 그들도 이렇게 아득했을까.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와 장마철의 묵직한 습기가 우리를 둘러싸는 소서에, 하기로 했던 것들을 포기하고 싶어진다면 그건 나의 의지 부족만이 아니라 절기의 짓궂은 농담일 수도 있다. 작은 더위라는 이름을 가진 ‘소서’의 더위는 곧 찾아올 장마의 물을 머금고 있어서 몸도 마음도 눅눅해지는데, 그래서 이 무렵에는 습기로 인해 약해진 위장과 비장의 기운이 수많은 생각을 불러온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오가는 다양한 사념들은 오히려 몸의 움직임을 굼뜨게 하고,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마저도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나 농부는 아무리 날씨가 마음 같지 않고, 몸이 무겁게 느껴져도 자신의 논과 밭을 두고 떠나지 않는다. 삶의 터전을 두고 도망쳐 버리면 다가오는 수확의 계절에 빈손으로 굶주린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을 알고 있으니까. 가뭄이 들면 물을 대고, 홍수가 나면 물을 빼는 일, 수많은 생각들보다 더욱 힘이 있는 것은 그런 단순한 일들이다. 생각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분명하고 담담한 일들. 이미 뿌리 내린 모를 더 좋은 자리로 옮겨 심을까 같은 생각은 이제 와 소용이 없다.
하나의 마음이 가득 차면 조금 비워내고, 부족하면 조금 채우면서 지내기로 한다. 양쪽의 마음들은 모두 각자의 일을 하며 지금의 삶을 만들어 주었다. 과하거나 부족할 때면 인생이 비틀거려서 자전거 바퀴가 헛돌듯 마음이 헛돌아 넘어지고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어느 것 하나 두고 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짐으로 여기지 않을 때 그것은 좋은 도구가 된다. 나를 돕는 성실한 재료가 되기도 하고. 수확의 계절이 찾아올 무렵에는 단맛과 쓴맛이 모두 담겨 풍성한 맛과 향을 내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가장 좋은 때에 그 모양을 만난다. 지금은 여러가지 맛, 다채로운 빛들이 버무려지는 순간을 곁에서 바라본다.
분주하게 흔들리는 마음은 허벅지와 배 앞쪽을 활짝 열어 둔 채 호흡하는 요가 동작들에 기대어 흘려보낼 수 있다. 봄과 가을, 겨울까지도 기억하고 준비하고 회고하고, 또 두려워하기도 설레기도 하는 마음의 속성이 수많은 생각을 불러와 무거워질 때면 야단스럽지 않은 간단한 움직임들을 한다. 작은 움직임들이 만들어 준 커다란 마음 공간에서는 조금 더 품이 넓어진 내가, 스스로의 다양한 표정들을 한 품에 안아줄 수 있다.
나는 무겁게 가라앉은 몸의 한 조각을 떼어내고 싶다 가도 그런 몸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음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기도 한다. 쓰고 보니 참 이상한 사람 같은데 그게 바로 나. 그러니까 매번 모순이야말로 진실이고, 역설에 대한 수용 이후에는 삶의 스펙트럼 전체가 사방으로 확장된다. 전체의 나를 커다란 품으로 안으며 빛과 어둠의 고향이 같다는 것을 배운다. 두려움과 안도가 결국에는 서로를 끌어안고, 의심과 호기심은 옆집에 산다. 울음과 웃음은 등을 기댄 채 의지하며 지내고, 살고 싶지 않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은 내 안에서 같이 살아간다. 모든 과정의 시간 내내 점점 더 복잡한 눈빛을 한 채, 다 흘려보낸 자리에서 내게 고마움의 인사를 건넬 나를 위해 오늘을 산다.
*소서(小暑) : 24절기 중 열한 번째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며 장마전선이 우리 나라에 오래 머물러 습도가 높다.
최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