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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의 씨앗을 갈무리하는 ― 한로
AROUND Series | 절기 따라 걷기
모든 열매 사이에서 가장 잘생기고 빛나는 것을 골라 씨앗 갈무리를 하는 시기다. 제일 빛깔이 좋고, 화사하게 부풀어 오른 것을 바로 수확해 버리지 않고 그 자리에 두면 열매는 내년을 위한 씨앗이 된다. (…) 따지 않은 열매의 겉면이 쭈글쭈글해지거나 물러지고 말라가는 것 같아도 씨앗에는 지난 한 해 동안의 좋은 시간이 조금 더 깊이, 빼곡하게 새겨질 것이다.
한해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1월이 있는 겨울일까, 꽃이 피어나는 봄일까, 아니면 어떤 마음이 강을 건너 새로운 땅에 도착하는 순간일까. 어릴 때는 새 학기가 되어야 새해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새 노트를 준비하고, 키가 큰 연필들을 깎아 필통에 담고, 엄지손가락으로 아직 깨끗한 교과서 옆면을 가로로 훑으며 넘겨볼 때, 새로 시작되는 삶이 궁금해지곤 했다. 낯선 교실에서 만나 친구가 될 아이들은 어떤 목소리로 말하고 어떻게 웃는 사람들일지, 담임 선생님은 무슨 과목을 담당할지, 교실의 옆자리에 앉아 짧게는 한 달을, 길게는 한 학기를 함께하며 매일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이 들 존재가 궁금했는데, 모든 질문의 공통점은 내가 정하지 않았으나 내 곁으로 흘러오게 될 것이었다. 이제와 돌아보면 그 많은 사건을 겪으며 내가 지을 표정이 궁금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를 경험하면서 감정을 느낄 때, 몸을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어떠한 감각을 느낄 때면 그게 꼭 나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 순간은 내 삶 전체로 보자면 제일 바깥쪽이고, 지금 느끼는 것은 가장자리의 마음일 뿐인데. 막 도착한 것의 선명함은 순식간에 시선을 사로잡아 버려 전체를 보지 못한 채 마음이 휘청거릴 때가 있다. 요즘 나는 지난 몇 년간을 떠올리면서 ‘후회’라는 감정과 자주 만난다. 나도 모르게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혹은 ‘그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이야기했다면 어땠을까?’ 같은 생각이다.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득 떠오르면 그 마음을 떼어내지 못해서 품 안이 타는 줄도 모르고 불덩이 끌어안은 사람처럼 곤란한 얼굴로 서성거린다. 내 삶이 후회뿐인 것은 아닌 데도, 잘못했던 일들을 자꾸 생각하고, 그러다 보면 또 뭔가를 잘못할 것 같아서 걸음을 내딛기가 두려워진다. 앞만 바라보며 달려갈 때는 그저 기대되던 미래가 옆도 뒤도 보기 시작하자 오히려 겁이 나는 세계가 되었다.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면 편안한 마음으로 좋은 결정을 하고, 의연하게 경험과 파도를 탈 줄 알았다. 나이가 들고 명상과 요가를 수련하면서 전보다 시야가 넓어진 느낌이 들자, 오히려 모든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이 요즘의 가장 커다란 고단함이다. 전보다 잘 보이게 되니 나의 실수도, 나의 부족함도 더욱 잘 보여서 자주 피곤하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누군가를 만나서 마음을 나누고 이별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경험하며, 그 후에 남겨지는 마음들이다. 그리고 남겨진 마음들이 매번 삶의 다음 순간을 살아가는 재료가 된다. 재료들은 적절하게 익히고, 볶아내고, 찌면 아름답고 맛있는 요리가 되고, 방치되거나 잘못 쓰이면 볼품없는 쓰레기가 되기도 한다. 현재의 가장자리 마음을 가지고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그곳을 어루만지며 나를 배우는 것이 요리의 시간이다. 테두리에서 지금 막 느끼게 된 것들은 언젠가 열릴 멋진 열매, 언젠가 맛볼 맛있는 요리의 씨앗이다.
‘한로’는 모든 열매 사이에서 가장 잘생기고 빛나는 것을 골라 씨앗 갈무리를 하는 시기다. 제일 빛깔이 좋고, 화사하게 부풀어 오른 것을 바로 수확해 버리지 않고 그 자리에 두면 열매는 내년을 위한 씨앗이 된다. 차가워지는 공기, 건조해지는 바람, 길어지는 밤은 음의 에너지를 점점 강하게 하고, 음이라는 것은 안으로 깊어지는 방향성을 가졌다. 그래서 더 이상 밖으로 커지지 못하는 이 시기에 열매를 따지 않고 그대로 두면 음 에너지의 도움으로 달게 부풀어 올랐던 것의 기운이 모두 씨앗으로 수렴된다. 다시 안으로 멀리 들어가며 응축하는 시기에 우리들이 도착했다. 따지 않은 열매의 겉면이 쭈글쭈글해지거나 물러지고 말라가는 것 같아도 씨앗에는 지난 한 해 동안의 좋은 시간이 조금 더 깊이, 빼곡하게 새겨질 것이다. 그 씨앗을 다음 해 봄, 땅에 심으면서 다시 한번 삶을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얻을 테니 잘 알아보아야 한다. 무엇이 다음을 위해 가장 좋은 씨앗인지, 어떤 모양과 빛깔의 열매를 마주하고 싶어서 지금 서둘러 수확하지 않고 기다리며 귀하게 여기는지를.
추수하는 시기인 덕분에 많은 것이 풍요롭게 느껴지는 이 계절에는 농사지은 과일과 채소의 맛이 풍성하게 채워진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은 제철이라는 말로 우리의 이목을 끌어당기고, 그렇게 마음 이끌려 간 자리에서 한 입 베어 물면 안에 담긴 한해가 고마워진다. 좋은 시절에 도착해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과 대추를 먹는다. 아주 달고 먹기 좋게 단단하다. 열매가 무르익으면 힘들이지 않고 ‘톡’ 가볍게 딸 수 있는데, 그렇게 자연스럽게 땅이 나에게 내어주는 열매의 단맛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세상의 맛과는 달리 다정하고 깊다.
깊은 맛을 내는 사과 대추를 오물오물 삼키며 그에게 나의 엉망인 모습에 대해서 말했다. 후회되는 장면들은 나의 기질과 오랜 습관이 겹겹이 포개어져 결국 바깥으로 터져 나오듯 밀려 나온 순간이다. 그렇게 별로인 내가 천천히 쌓여가는 중이라는 것을 과거의 나는 모르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므로 문제라 생각하지 않으며 잠시 미뤄두면 그뿐이었고, 그런 엉망인 모습을 아는 것은 나뿐이니까 모른 척하면 감쪽같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의 말에 “맞아, 네가 그럴 때가 있어.” 대답하고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나만 알고 있는 줄 알았던 못된 부분들, 잘 감추고 있는 줄 알았던 성질들을 그가 이미 알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만 아는 게 아니었다니! 알고도 상관없는 얼굴이라니! 말을 잃어버리고 먼 허공만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그렇게 후지고 초라한 모습을 알면서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느긋하게 짓는 것이 ‘사랑’ 아닐지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이때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하는 것들, 그러니까 ‘지금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라는 이름으로 내어준 열매들, 그 안에는 분명하게 정리된 마음도 있고, 아직 명료하지 않은 것도 있다. 가끔은 모호해 보이는 것이 가장 큰 잠재력이 있기도 하고, 지금은 그리 큰 빛을 내지 않는 것을 씨앗 삼았을 때 나중에 삶 전체를 커다랗게 비추는 빛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씨앗을 갈무리한다는 것은 생의 다음 날을 넓고 큰 마음으로 준비하는 일이다. 표면에 드러난 것 너머를 보아야 하고, 지금은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을 너그러운 품으로 안아야만 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필요한 일이고, 그렇게 헤아리려고 마음과 시간을 쓰는 동안 지금의 삶으로 밀려와 만들어진 열매들을 하나하나 다시 볼 수 있다. 고마운 것도 미운 것도 하나하나 다시.
그러고 보면 운명은 밀려오기도 했지만,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지금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나를 두렵게도 하고 후회하게도 하지만, 나를 지금보다 지혜롭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이 마음을 알아보기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아주 조금은 더 커다란 들판에 도착한 것이니까. 그러니 나는 들고 있기에 무겁고 뜨거워서 내려놓고 싶은 지금의 마음 하나를 안고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고 싶다. 그것을 선택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어려움을 만날 때면 이제 만날 준비가 되어서 만났나 봐, 혼잣말한다. 멀리 걸어 나왔기에 더 선명한 빛도 만나고 더 차가운 어둠도 만난다.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확실한 색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한로’의 나는 후회라는 씨앗과, 흠집 많은 나를 그대로 존중해 주는 사랑이라는 씨앗을 함께 갈무리하기로 한다. 다음을 위해 모아둔 씨앗 안에 빛과 어둠이 뒤섞여 있는데 그게 꼭 가을날 올려다본 단풍나무 사이로 비춰드는 빛, 그렇게 만들어지는 그늘의 율동 같다. 씨앗이 꼭 곱고 빛나는 것만이 아니어도 괜찮지. 후회라는 씨앗 또한 귀하게 품고 가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삶은 모든 일렁임이 그 자체로 아름답게 춤추는 삶이니까.
작년에 소중하게 갈무리하여 땅에 심었던 씨앗은 올해의 비, 바람, 눈, 햇살을 한껏 만나고 지금의 삶, 지금의 마음을 경험하게 하였다. 이번 씨앗 또한 내년의 모든 계절을 만나면서 내게 무언가를 맛보게 해줄 것이다. 어떤 날씨가 찾아올지는 이제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그 날씨를 겪어낸 후에 내가 지을 표정, 그때의 가장자리 마음에 호기심이 생긴다. 새로운 해는 씨앗을 갈무리하는 이 순간 시작되고 있다.
한로(寒露) : 24절기 중 열일곱 번째로, 이슬이 찬 공기를 만나 서리로 변하기 직전의 시기다.
최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