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따라 걷기

눅눅한 것을 햇볕에 말리는 ― 처서

AROUND Series | 절기 따라 걷기

스물네 번의 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쓰다듬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기록한다.

여름의 바깥으로 걸어 나가기

이제 모든 식물이 성장을 멈추고 잎을 떨굴 준비를 할 때, 이제는 잎을 넓히려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잎이 땅에 떨어져 토양이 되어야 다음해에 새로운 잎을 틔울 수가 있을 테니까.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려놓음을 위해서 뜨거운 계절 동안 넓어진 잎과 맺혀진 열매를 알아보는 때가 바로 처서다.

멀미가 날 때는 고개를 들고 먼 곳을 봐수평선보다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숨을 크게 쉬면 다 괜찮아질 거야.”
 
처음으로 유람선을 타던 날 친구가 나에게 이야기했다어린 시절 나는 항상 멀미가 심한 아이여서 버스든 자가용이든 무언가 탈것을 타면 바로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잠의 세계에서만큼은 매번 안전했으니까. 언젠가 가을 소풍을 갔던 날, 버스 안에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의 메스꺼움이 느껴져 펑펑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그래서인지 ‘뱃멀미’ 라는 단어를 배운 다음부터는 쉽게 내릴 수도 없는 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런 줄도 모르고이제 막 대학생이 되어 온갖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던 친구가 함께 간 여행에서 유람선을 예약해 두었다. 뱃멀미가 심할까 봐 미리부터 겁먹고 울상인 나를 향해 친구는 언젠가 자신이 들었던 말을 했다그 말을 듣고 배에 오른 내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뱃속에 들어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 때마다 먼 하늘먼바다멀리멀리’ 주문을 외우며 먼 곳을 보았다효과가 있었는지 신기하게도 큰 어려움 없이 시간이 흘렀고, 다음부터는 무엇을 타든 멀미가 날 때면 멀리 보기를 한다.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들었다불편한 마음이 서둘러 쏟아져 나왔고, 나는 줄곧 ‘그는 그 말을 왜 했을까?’를 생각했다어떤 날에는 그 말을 왜 했는지와 다른 어떤 말은 왜 하지 않는지에 대한 생각 한 조각 베어 물다가 하루가 다 지나가 버기도 하였정신을 차려보면 시간이 한 움큼 사라졌다하나의 생각에 몰입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 잘 가고빠르게 흘러간 시간의 뒷모습을 보면 마음에 생긴 구멍이 보인다구멍의 크기를 알아보려고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가 오히려 구멍을 키우는 사람처럼 구멍을 만지작거오래 들여다보았더니 안쪽에 상처가 보여서 그 가까이 가느라 구멍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하였안에서 바깥을 보면 딱 구멍의 크기만큼만 세상을 볼  있다이전에 걸어왔던 여정도 떠오르지 않고빈손으로 주저앉은 자리만큼이 세상의 전부처럼 여겨진다좁은 시야를 통해 눈앞에 보이는 것을 계속 집중하며 보다 보면 멀미가 난다오래전 어느 날처럼 먼 하늘먼바다멀리멀리’ 주문을 외운다.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멀리멀리’를 속으로 계속 말했더니 어쨌거나 멀리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져서 봄부터 미뤄왔던 달리기를, 잘해보자는 마음도 없이 가을에 시작하게 되었다달리러 가는 길에 밟게 되는 마음의 문턱은 나가지 않는 동안 점점  높게 자라난다돌보지 않아도 무럭무럭 크는 잡초처럼나가지 않는 동안 부쩍 높아진 문턱을 넘어갈  없을  같았는데 마음에 생겨난 생채기와 멀미 덕분에아니지 멀리까지 가고 싶은 마음 덕분에 높은 문턱을 경쾌하게 밟고 지나갈  있었일 년  만에 달리려니 처음에는 발목이 불편 어깨도 자꾸만 긴장되어 숨이  안 쉬어지는 기분이 들었다어딘가 불편함이 느껴지면 온통 거기에만 집중하게 된다발목이 불편하게 느껴지니까 그때부터 한동안 나는 발목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나에겐 허벅지도 있고배도 있고 있는데 다른 것은 정말이지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발목만 생각하며 달렸다. 뛰는 내내 보이는 찬란한 풍경도 시선을 두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그렇게 십 분을 뛰었고인터벌트레이닝을 위해 걷기 시작했는데 드디어 고개를  멀리 보자 한강에 쏟아지는 빛과 윤슬이 보였다.
 
오후 네 시 무렵의  조각들은 보석상자를 실수로 쏟기라도 한 듯 화려한 여름 장면 눈앞에 펼쳐주었는데 나는 발목밖에 없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알아보고 나면 이젠 그저 웃음이 난다발목이 아프면 천천히 거나 오늘의 달리기를 중단하고 내일을 기약하면 되는데 무엇이 그렇게 심각했을까내가 원했던 것은 마음의 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쏟아지는  속으로 내보내 멀리 보내려던 그건 지금도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생각이 들자 잠시 멈춰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커다란 나무 아래우두커니 서서 그늘의 품에 안겼다자연스럽게 땅으로 향한 시야에는 빛이 나뭇잎에 닿아 땅에 그리는 그림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뭇잎들 사이로 가득 참여한 햇빛이 만져질 것처럼 가깝게 보인다코모레비이 장면을 코모레비
’ 라는 하나의 단어로 만들어 둔 일본 사람들은 이걸 자주 바라보고 있을까우리에게 윤슬이라는 단어가 있어서 저기 봐윤슬이 너무 아름다워.” 이야기하게 되는 것처럼하나의 단어가 가끔은 순간의 확대경이 되어 찰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한다외래어기는 해도 코모레비’ 라는 말을 알고 나서 더 자주더 오래 나뭇잎 사이로 눈부시게 찾아드는 빛을 바라보게 되었다일렁이는 빛무리를 보다 보면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이 다르게 보인다.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데왜인지 발목이 너무나 멀쩡하다한동안 만나지 않던 낯선 종류의 리듬감 때문에 땅에 닿는 면이 그저 놀랬던 것일까알 수가 없다멀미 난 것 같았던 마음도 오래전 친구의 처방처럼 멀리 바라보니 괜찮아졌다남은 달리기는 팔을 힘차게 움직이며 뛰었다. 달리기 앱에서 배 앞쪽에 북이 있는 것처럼 팔을 힘차게 흔들면 더 잘 달릴 수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그게 떠올랐다그렇게 하면 정말 신기하게 자가동력장치라도 단 것처럼 힘을 내어 조금 더 달릴 수 있다오랜만의 달리기라 겁이 났는데어떤 자세로 달려야 했었는지도 생각나고마지막 달리던 무렵처럼아니 그 이상 수월한 느낌으로 호흡하며 5.9킬로미터를 달렸다집과 가까운 한강 변으로 가서 강의 남쪽으로 달리다가 상수 나들목에서 회차하여 돌아오면 늘 찍혀있던 거리그대로다내 삶에 남겨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수많은 기억이 내 안에서 고요히 숨 쉬고 있다.
 
처서 무렵에 옛사람들은 여름과 장마를 겪으면서 눅눅해진 책과 옷들을 꺼내 말리는 일을 했다음지에서 말리는 것은 음건이라 하고햇볕에서 말리는 것은 포쇄라고 하였는데한껏 펼쳐두고 바람과 빛을 만나게 하려면 우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놓여있던 자리에서 꺼내는 일부터 해야 했을 것이다오래 간직하느라 가진 줄도 몰랐던 것도 꺼내고올해 흘러들어 왔으나 귀한 줄 알아보지 못했던 것도 꺼내고소중하게 여기며 매일 쓰다듬던 것도 모두 꺼내어 말리다 보면 두 손에 남겨진 것들을 확실하게 알아보게 되었을 거라 짐작된다두 팔을 움직인다늘 닫혀 있어서 눅눅해졌을 겨드랑이를 펼쳐서 바람이 통하게 한다한 팔은 아래로한 팔은 위로 보내 굽힌 다음 등 뒤에서 두 손을 잡는 일은 이제는 접어야 하는 마음을 패기 있게 접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작이다느긋하게 하면서 숨을 고른다그렇게 움직이며 햇빛 아래 서있자니 라는 책을 포쇄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는데멀미가 날 만큼 들여다보던 마음이 그제야 아주 다르게 보였다누군가의 말에 내가 느낀 것은 불편함이었지만 다시 보니 그 말을 오래 붙잡은 이유는 한마디 스쳐 가는 말에 마음 아파하는 나의 약함이 싫어서였다그걸 알아본 순간 질문이 바뀌었다. ‘무엇을 경험하기 위해 그 말을 들은 걸까?’ 관심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니까 상황이 아닌 주목이 어떤 마음들과 상처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올해 맺고 싶었던 열매는 강함과 자유였다바깥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다시 중심을 잡는 것한마디 말에 너무 오래 주저앉아 울지 말고 툭툭 털고 일어나 걷는 것타인의 슬픔에 마음을 기울이다가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그 모든 것에 묶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를 꿈꿨다그런데 지금 도착한 자리의 나를 보면 꿈꾼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누군가가 울면 같이 울다가 때론 더 많이 울어버리고어떤 눈빛에 상처가 생겨나면 그 상처를 멀미 날 때까지 들여다보다가 휘청거리며 비틀비틀 걷는 나를 만난다.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며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이제 모든 식물이 성장을 멈추고 잎을 떨굴 준비를 할 때이제는 잎을 넓히려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잎이 땅에 떨어져 토양이 되어야 다음 해에 새로운 잎을 틔울 수가 있을 테니까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려놓음을 위해서 뜨거운 계절 동안 넓어진 잎과 맺혀진 열매를 알아보는 때가 바로 처서다.
 
보기로 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제대로 된 열매 하나 손에 쥐지 못한 한해인 것 같은데원했던 열매가 아니어서 빈손인 것처럼 느껴졌다꿈꿨던 강함이라는 열매는 없지만 내 연약함을 제대로 알아본 것이 분명하게 남았다꿈꿨던 모양과 다른 모습의 열매를 두 손에 안고 있는 내 곁에서 품을 연다예상했던 색도상상했던 향기도 모두 아니어도 올해의 나이기에 만든 올해의 열매에는 봄과 여름을 지나오며 마주했던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햇살의 기대감과 바람의 흔들림주저앉게 했던 비계절의 콧노래를 듣던 날의 미소태풍이 몰려오던 어두운 날의 두려움까지계절의 다양한 표정이 새겨진 나의 모양을 내가 안는다나의 품에 온전히열매는 이제 스스로 무르익을 일만 남았다무엇을 더하려는 마음 대신 지금의 모양에게 고마워인사하기로 마음먹으면 열매에 감사와 사랑의 빛이 채워진다그 다정함이 열매를 더욱 달게 만들 것이다.
 
처서의 는 머물러 있다의 뜻도 있지만 처리한다’, ‘멈춘다의 뜻도 있다. ‘는 더위를 뜻하니까 더위가 머물러 있다의 의미이기도 하고, ‘더위를 마무리 짓거나 멈추는 날이라는 뜻도 된다한낮의 더위는 여전해서 여름의 안에서 밖을 바라보게 되지만처서에는 여름의 바깥으로 걸어 나가기로 한다더 멋진 열매를 만들어 보려는 마음을 전부 내려놓고 알아봄과 기다림의 시간으로 전환한다이제는 정말 그러기로 해야만 다가올 추운 계절에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함께 운다는 것한마디 말에 무릎에 힘이 풀린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휘둘리는 것이다사랑하는 마음어떤 눈물에 덩달아 연약하게 굽혀지는 어깨와 둥글게 말리는 등을 가진 나를 이해하며 사랑하고 싶어졌다바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아니라 영향을 주고 또 받는 자유로움이라는 열매를 꿈꾼다먼 하늘에서 바라보면 올해의 열매는 긴 여정을 위한 씨앗일 뿐이다.

*처서(處暑) : 24절기 중 열네 번째이며, 아침저녁으로 신선한 기운이 감돌고 쾌청한 날이 이어지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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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