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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의 감사함을 느끼는 ― 추분
AROUND Series | 절기 따라 걷기
우리의 몸은 하나의 자연이다. 찬 바람이 불면 피붓결이 변하고, 서늘한 온도에서는 근육 움직임이 달라진다. 눈이나 비가 올 때면 뱃속의 느낌도 다른데, 나는 불가능한 항상성을 조금 바보 같을 정도로 꿈꿨다. 계절이 옮겨가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강도로 움직이면서 계속된 성장을 바랐으니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 추분이 되면 그때부터는 춘분 이후에 쌓아왔던 몸의 기록을 톺아본다.
밤은 다시 길어질 것이다. 공기에서는 열기가 점점 빠져나가고, 땅과 바다는 당연하다는 듯이 차가워진다. 하늘은 더 높아지고, 나무들은 풍성해졌던 잎을 떨구며 휴식을 준비한다. 그리고 자연을 닮은 나의 몸 역시 자연스럽게 가을의 땅, 가을 바다처럼 변해갈 것을 안다. 춘분과 추분 사이, 넓게 펼쳐진 긴 낮 속에서 멀리 가볼 수 있었던 것처럼 다시 추분과 춘분 사이, 길어진 어둠 속에서는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한동안은 계속해서 나아질 거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리면 달려오던 관성 때문에 더 아프게 넘어지기 마련인데, 그렇게 된 적이 없어서 넘어짐을 상상하지 못한 채 있는 힘을 다해 팔을 휘저으면서 나아가던 날들이 내게 분명하게 존재했다. 하기로 한 것을 매일 하다 보면 어떤 기대는 사라지고 또 예상치 못했던 어떤 기대는 생겨나는데, 속도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대신 지속성이 만드는 은은한 성과에 대한 기대는 자꾸만 커졌다. 삶에서 가장 오래 계속해서 하는 일 중 하나는 요가다. 워낙 긴장이 많은 몸이라 요가를 쉬면 몸과 마음에 금세 생채기가 일어나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다. 언젠가부터는 이렇게 계속해서 하는 데 나아지지 않으면 조금 반칙이 아닌가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꾸준하게 열심히 하는데도 어느 해부터는 겨울 초입이 되면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마도 입동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금 나아졌나 싶은 목 주변에서 통증이 다시 시작될 때도 있고, 이제는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했던 골반 주변부터 허리까지가 뻣뻣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지난날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는데 항상 몸보다 마음이 더 엉망이 되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자연이다. 찬 바람이 불면 피붓결이 변하고, 서늘한 온도에서는 근육 움직임이 달라진다. 눈이나 비가 올 때면 뱃속의 느낌도 다른데, 나는 불가능한 항상성을 조금 바보 같을 정도로 꿈꿨다. 계절이 옮겨가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강도로 움직이면서 계속된 성장을 바랐으니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 한참을 반복하면서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다가 몇 번의 부상이 찾아와 더딘 봄을 여러 번 맞이하면서 알아챘다. 추분이 되면 그때부터는 춘분 이후에 쌓아왔던 몸의 기록을 톺아본다.
바라던 대로 찾아온 것과 소망했으나 오지 않은 것,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찾아온 것들, 불청객같이 느껴지는 것들까지. 올해에는 자주 통증을 만들던 윗등과 목의 치료를 꾸준히 해서 고개를 젖히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고, 전보다 달리기를 덜 해서인지 엉덩이 근육은 조금 약해져서 오래 앉아있으면 허리가 더 빨리 불편하게 느껴진다. 손을 쓰는 요가 동작은 전보다 가볍게 해내는 느낌이지만 몸 앞면을 열어내는 움직임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그런 ‘사실’들을 하나하나 적어볼 때면 가을걷이하는 농부의 마음이 된다. 추분은 무르익은 곡식을 추수하는 시기다. 봄볕에 싹이 트고, 여름의 뜨거운 햇살에 키가 자라고, 장마철 비를 머금은 단단하고 무성한 작물들을 거두어들이는 시기, 색이 곱지 않아도 맛이 좋을 수 있고, 반짝거리는데도 때로 깊은 맛이 덜한 것도 있을 것이다. 농사를 지은 사람의 눈에는 그 모두가 애틋하지 않을까. 올해의 웃음과 눈물, 설렘과 걱정이 그 안에 가득할 테니까. 가을걷이하는 농부의 눈으로 지금 내 곁에서 드러난 걸 바라보면 모든 것이 소중하다. 어느 하나 타박하지 않고 수확해서 빛이 드러나도록 먼지를 닦는 농부처럼, 나에 대한 어떤 사실 한 가지의 자리를 너무 넓거나 좁지 않도록 적당하게 내어준다. 이 모든 사실이 추분 이후 점점 차가워지는 계절 동안 나를 잘 돌볼 수 있게 돕는 중요한 재료들이 되어줄 것이 분명하니까. 이 재료들을 기억하며 적당한 움직임의 가볍지 않은 달콤한 맛 속에서 추운 날을 보내기로 한다. 입동에도 입춘에도 나빠지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계절을 나는 비결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잘 돌보며 살아간다는 것은 약한 부분을 제대로 수용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튼튼하고 명랑한 부분을 잘 알아보고, 귀하게 여기며 아끼는 일도 해야 한다. 어려움 앞에서 난처한 표정만 지으며 삶이 딱딱하게 가라앉지 않도록 내가 갖고 있는 빛을 알고, 기억하고, 제때 그 도움을 받는 것. 그것까지가 잘 돌보는 일이다. 잘 돌보며 살아가고 싶다. 엉망으로 지낸 날들이 있었다. 내가 믿는 것이 결국에는 나를 어떤 현실로 데려가는데, ‘지금의 나는 너무 별로고, 더 나은 내가 언젠가는 되겠지, 그런 날이 근데 올까?’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삶을 돌보는 일이 모두 귀찮게만 여겨졌다. 땅에서 키워져 그대로의 맛으로 빛나는 과일과 채소도 열심히 챙겨 먹지 않으면서 지냈다. 그렇게 아름다운 빛깔이 나의 생명력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못할 때면 마음에도 빛이 줄어드는 기분이다. 나를 잘 키워가는 일이 도무지 해낼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지고 비교적 밝은 곳, 아직 아슬아슬함을 만난 적이 없는 나의 부분은 도무지 보이지 않아서 자주 한숨을 쉬다가 잠을 길게 자곤 했다.
집에 쌓인 더운 계절의 먼지들을 닦고, 커튼을 세탁하여 다시 걸고, 냉장고와 찬장을 정리했다. 좋아하는 돌들을 꺼내어 깨끗하게 닦아낸 후 다시 유리병에 담고, 창틀을 말끔하게 한다. 시장에 가서 붉게 피어오른 사과를 사 오고, 향이 좋은 제철 버섯을 볶은 후 푸른빛이 싱그럽게 새겨진 깻잎을 골라 쌈을 해 먹었다. 청결해진 집에서 단순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가벼운 조리법으로 요리해 먹고, 깊은숨을 쉬며 몸을 좀더 느긋하게 살피는 동안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쾌활한 감각을 불러오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게 다 있다. 어둠의 문을 여는 열쇠와 긴 터널을 빠져나온 후 마주할 빛의 세계 속 문고리가 함께. 나란히 두고 바라본다. 동시에 본다. 환기가 잘된 넉넉한 공간에서 나의 면면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며 이물을 닦아내면 모든 것이 다 잘 살아가기 위해 와야만 했던 것들이다.
손이 닿는 곳을 정돈하는 일은 손이 닿을 수 없는 마음 깊숙한 곳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봄철의 대청소가 바깥으로의 확장을 위한 준비였다면, 가을철 대청소는 안으로의 확장을 준비하는 일이다. 삶의 역사는 그사이 어디쯤에서 쓰일 테니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 안에서 경험한 것을 내 안에 기록할 준비를 하는 마음으로 가을의 정리 정돈을 한다. 이제,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성큼 내 눈앞에 드러날 때 따뜻하게 안아줄 준비가 되었다.
올봄과 여름을 지나오며 나는 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아보았는데 그중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할 때까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기질과, 늘 최악의 시나리오를 앞서 상상하고 준비하려고 하는 습관이다. 지난날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안아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자꾸만 나를 바꿔보려고 했는데, 가을의 초입에서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내게 말했다.
“차근차근 준비하고, 준비되었을 때 시작하려는 너를 왜 자꾸만 미워하려고 해? 그런 성격은 아마 오래전에 만들어졌을 거야. 어쩔 수 없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고.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기타 한번 배워볼까?’ 생각하게 되어서 무심히 말을 내뱉었을 때, 어떤 사람은 곁에 기타를 툭 하고 사주면서 그래 한번 배워봐 이야기해 줄 삼촌이 있고, 어떤 사람 곁에는 그런 존재가 없어. 그런 존재가 없는 사람은 생각할 수밖에 없지. 기타를 샀는데 나랑 잘 안 맞으면 어떻게 하지? 배우는 시간, 악기를 사고 수업을 듣는 비용, 연습하는 데 드는 노력 같은 것을 미리 생각하지 않고는 시작할 수가 없는 거야. 그냥,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그게 깊숙하게 새겨져서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다 헤아려 보게 돼. 너의 인생이 그렇지 않아? 기타 사주는 삼촌이 없었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들어와 굳어진 습관을 이제 와 미워할 필요는 없어. 다 잘살아 보고 싶어서 네가 그렇게 했겠지. 그렇구나, 해버리면 되고, 이제 알게 되었으니 가끔은 준비 없이, 이제는 스스로 기타 툭 사주는 삼촌처럼 굴면서 지내보면 되는 거야.”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런가?’ 하고 웃었는데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오면서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릴 무렵엔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전부 애매한 비가 내렸는데 가방과 악기 가방을 양 어깨에 주렁주렁 짊어진 채로는 하늘이 석양으로 물드는 아름다움도 눈에 눈물이 꽉 차서 보이지 않았다. 돌아보면 석양을 보러 갈 때도 늘 어떤 종류의 준비를 하곤 했다. 날이 좋은 날에는 피크닉 매트와 시원한 물이 담긴 물병을 챙겼고 간단한 간식까지 챙겨야만 길을 나설 수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어두워져서 책을 읽지도 못할 텐데 책도 꼭 챙겨서 허둥지둥 아름다움 곁으로 달려가던 날들. 내 가방은 늘 무거웠고, 친구들은 도라에몽 앞주머니를 들고 다닌다며 나를 놀렸는데 그래도 그편이 마음이 편했다. 그 모든 것이 다 무겁게 느껴져서 내려놓고 싶어지는 날, 아름다운 하늘을 등 뒤에 두고 집에 돌아왔다. 삼면이 창인 집,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모든 창을 활짝 열었다. 창을 전부 열면 바람이 서로를 환대하며 인사하듯 공중에서 뒤섞이고, 손뼉을 치며 스쳐 간다. 습관처럼 클래식 FM을 켜고 창밖을 보는데 멀리 무지개가 보였다. 어깨가 가벼워지니까 보랏빛으로 물드는 하늘과 건물에 부딪히는 마지막 햇살이 반가워져서 옥상에 올라갔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바빠진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향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 서서 손을 뻗고 싶어서. 슬쩍 옥상에 올라온 차림 그대로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채 건물 계단을 서둘러 내려와 양화대교 방향으로 달렸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숨차게 달리는 그 순간이 좋았다. 나에게 지금 가장 급한 일이 노을과 무지개라는 것이, 그리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헐레벌떡 뛰어나왔다는 사실이 몹시도 좋아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모든 표정의 내가 다 소중하다. 준비하지 않으면 두려워하는 나도, 준비 없이 가끔은 헐레벌떡 뛰어나가는 나도, 최악을 미리부터 생각하며 또다시 준비하는 나도, 최악을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나와 미리 준비했어도 최악을 만나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마는 나도. 단단하고 무른 모습이 뒤섞여 있는 나를 똑바로 본다. 길어진 밤에는 그 모든 모습을 안고 하나하나 매만지기가 좋다.
추분에는 이 무렵이 되어서야 등장하는 노인성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장수를 기도하는, 추분부터 춘분 사이의 시간, 옛사람들은 어떤 말로 마음을 하늘로 보냈을까. 오래 살게 해주세요, 했을까 건강하게 살게 해주세요, 했을까.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한다. 제가 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며 지낼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저는 주신 그대로의 빛과 어둠을 구별 없이 감사히 받겠습니다. 품에 안고 추운 날들의 저를 안겠습니다.
*추분(秋分) : 24절기 중 열여섯 번째로, 점차 낮보다 밤이 길어지며 논밭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시기다.
최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