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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가 안으로 무르익는 ― 백로
AROUND Series | 절기 따라 걷기
여전히 낮에는 여름처럼 덥지만 땅에 쌓인 열기는 금방 빠져나갈 것이다. 겨울 맞이할 준비를 다 했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하늘에 먼저 도착한 가을은 저녁 공기의 질감을 바꾼다. 저녁 산책을 하고 돌아올 무렵에는 나도 모르게 올해에 발견하게 된 마음의 풍경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을이 문밖을 서성거리다가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와 자꾸 인사를 건네는 통에 매듭짓는 마음을 더듬게 된다.
우리들이 잠든 사이, 열기와 한기는 공중에서 엉겨 이슬이 된다. 가을은 이미 완연하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아침이면 풀잎에 흰 이슬이 맺혀있다. 지난밤에는 창을 연 채 자려고 누웠는데 가을에만 들을 수 있는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이제 매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여름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할 무렵,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졌던 날을 잊고 당연하다는 듯 따릉이를 빌릴 수 있는 집 앞의 보관소로 향했다. 별다른 고민도 없이 이용권을 구매하고 자전거를 빌려서 페달을 밟는데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고 등에 식은땀이 났다. 나는 잠시 잊었어도 몸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는 어느 날의 상처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표면이 고르지 않은 길을 지날 때마다 겁부터 나고, 손에 자꾸만 땀이 나서 자전거를 반납하고 싶다는 마음을 무겁게 등에 업고 연남동까지 겨우 갔다. 연남동 주민센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자전거를 계속 타려던 계획을 바꿔 반납부터 하고는 쿵쾅거리는 마음을 복숭아 디저트로 달랬다. 와, 나 다시 자전거 탈 수 있을까? 이렇게 벌벌 떠는 상태라면 영영 못 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전거를 반납했으니 돌아오는 길에는 버스를 타고 내려서 걸었다. 가을바람은 너무도 친절하고 다정했고, 가을볕은 조금은 뜨겁게 나를 안아주었다. 울상이던 나는 그 품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하늘을 보며 말했다. “겁이나.” 연이어 요즘 나의 연습, “겁이 나는 예슬아, 나는 겁내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했다. 제일 수용하기 어려운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그럴 일 아니라고 핀잔을 주거나 외면하는 대신 그렇게 말하고 있다. 말하고 나면 여러모로 서툰 내 모습이 꽤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역시 사랑 앞에 장사 없는 걸까 싶다. 계절이 내게 용기를 내 보라고, 손을 내밀고 또 끌어당겨 주었다. 따릉이 두 시간 이용권은 여전히 110분이나 남아있었고,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그 이용권으로 다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 겁내는 내 곁을 떠나지 않도록 다짐하고는 자전거 대여를 했다. 처음에는 다가오는 모든 물체가 위협적으로 보이고, 내가 넘을 수 있는 턱의 높이가 가늠이 안 돼서 길가에서 멈추어 숨 고르기를 여러 번.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지는 방향으로 달리던 나는 해가 사그라드는 모습을 고개 들어 한동안 보았다. 땅만 보며 겁이 난 채로 페달을 밟다가 다시, 드디어, 고개를 든 것이다. 상처 이전에 쌓아둔 몸의 감각이 다시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아서 자꾸 웃음이 났다.
물이 뭍에 닿는 소리를 좋아한다. 집에서 가까운 한강 변,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자리를 안다. 그 자리로 나를 데려가 소리를 들려주었다. 용기를 낸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 물이 뭍에 닿을 때면 그곳이 강이어도 바다여도 비슷한 소리가 난다. 물결이 물거품 되어 부서지는 소리는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안심이 된다. 가을에만 들을 수 있는 풀벌레 소리, 이름 모를 새의 소리와 반가운 까치 소리, 물소리,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더해져서 나를 둘러싼 세계가 더 풍성해졌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맙다고 말하고, 눈을 감은 채 물속까지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은 깊은숨을 쉰다.
올해의 계절을 마주하며 넘어지고, 일어서고, 뛰다가, 걷다가, 그렇게 지내며 넓어진 반경의 가장자리에서 시선을 안으로 옮겨 내부에 남겨진 것들을 알아보기 위해 마음을 쓴다. 아쉬움이나 서두름 없이 지금의 삶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도토리 줍듯 하나하나 주워 담아서 소중하게 쓰다듬기로 한다.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와 돌을 주워 동그랗게 펼쳐두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럴 때마다 소중하게 여기면 보물이 되고 하찮게 여기면 쓸모없는 것이 된다는 게 확실한 진실로 여겨진다. 무엇이든 제대로 알아보고 나면 알아보기 전과 같을 수가 없다. 알아본 후에 그것을 분명하게 하려고 힘을 쓰기 때문이 아니라 알아보는 것에 그러한 힘이 있어서. 그러니 알아본다는 것은 그것을 알아본 그 자리에 새기는 일, 알아본 후에 마주하게 될 것을 준비된 상태로 맞이하도록 돕는 일이다.
마음이 이야기했다.
지금의 모습으로 여기에 도착하기 위해 그 모든 날을 걸어온 거라고.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삶이 밀어주면 그 자리로 밀려가고, 삶이 당겨주면 그 자리로 당겨지면 그뿐이라고. 이제 힘을 빼고 흘러들어온 것과 손잡고 안으로 더 들어가 보면 된다고.
나의 일부를 바꾸려고 하니 답답하고, 이해하려고 하니 막막했는데, “그렇구나! 근데 그런 너를 사랑해!” 명랑하게 말하고 나니 궁금함도 두려움도 슬쩍 자리를 비운 텅 빈 마음에 바람이 드나든다. 봄과 여름을 보내는 동안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서 셀 수 없이 시도하고는 그 수만큼 자신에게 실망했다. 비틀거려도 넘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흔들거리다가 그게 춤이 된다면 좋겠는데, 비틀거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겁을 내고 울어버리느라 춤은커녕 모든 것이 자주 멈추곤 했다. 그렇게 자꾸만 멈춰서 땅을 볼 때마다 삶이 이대로 경계를 넘지 못할 것 같아 새롭게 또 겁이 났다. ‘백로는 포도순절’ 이라는 말처럼 제철을 맞이하여 달콤해진 포도를 먹다가, 문득 더 이상 넓어지지도 못하고 더 커지지도 못했던 올해의 삶이 이해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포도는 한없이 커질 수 없다. 포도알은 한없이 늘어나서는 안 된다. 올해의 포도 줄기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 커지고 이후에는 바깥으로의 확장 대신 안으로의 여정을 시작해야만 한다. 열매가 달게 무르익는 것은 몸집이 커지지 않는 지금 이 시기, 이때 열매의 맛이 결정된다. 열매가 알차게 익어갈 수 있도록 기다리는 일, 날씨라는 우연에 온통 의지하는 일만이 남아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삶을 걸다니, 농부들의 삶은 그대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무렵에는 날씨에 기대를 걸고 그저 기다리느라 농사일이 꽤 한가하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을 한 후 가족을 만나지 못했던 여성들이 시집과 친정 사이에서 만나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소식을 전하는 ‘반보기’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올해의 삶이 언덕을 만나 어떤 오르내림을 겪었더라도 떠나온 가족에게로 돌아가 지난날을 나눈다는 것. 날이 추워지기 전에 응원해 준 이들에게 돌아가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것이 요즘 나의 연습과 닮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시기에는 “어떤 모습이어도 그런 너를 사랑해.”라고 먼저 말해주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니까. 그렇게 흘러오고 흘러간 것들을 안심할 수 있는 이들이 내어준 넓은 자리에 꺼내어 두고, 바람 쐬게 하다 보면 내게 흘러온 것도 흘러오지 않은 것도 모두 어떤 형식으로든 정확한 자리에 도착했다는 걸 이해하게 되지 않았을까.
나아가면서 마주하게 된 것들, 나아가는 동안에 흩어진 것들, 앞을 보느라 보지 못했던 뒤에 남겨진 것들을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차근히 바라본다. 이미 도착한 것이 있고, 오는 장면을 분명 보았는데 나를 스쳐 멀어져간 것이 있다. 아예 오지 않았으면 몰라도 오는 장면을 슬쩍이라도 본 것은 달려가 붙잡고 싶어진다. 그래도 지금 내가 마주한 시기가 ‘백로’라면, 그 마음을 거두어야 한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때가 되지 않은 것, 올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올 것을 믿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렇게 지금 남겨진 것을 다시 보는 시간. ‘나’라는 집을 두고 떠나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간 손님을 찾느라 애먼 시간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지 않고, 이미 집 안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한 손님에게 시선을 보낸다. 그것이 어둡고 딱딱한 조각이어도, 혹은 반짝이는 부드러움을 가진 것이어도, 곁에 없는 것을 보려고 허공을 응시하는 대신 확실하게 남은 것에게 다가가 그것을 들여다본다. 몸의 뒷면에는 지나간 마음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바람에서 열기가 빠지는 이 시기에는 나아가고자 하며 몸의 앞면을 펼쳐두는 대신, 보듬어 안으려는 마음으로 몸의 뒷면을 열어두고 느린 숨을 쉰다. 몸 뒷면의 중간, 왼쪽, 오른쪽, 하나하나 열어둔 채 호흡하며 올가을, 몸에 남겨진 감각들과 눈을 맞추며 인사하다 보면 서둘러 앞으로 걸어 나오느라 놓쳤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게 된다.
끝의 시작은 폭죽 소리 없이 고요하게 찾아온다. 귀를 기울이면 들리고, 고개 숙여 눈을 마주치면 보이는 내게 남겨진 것들. 그리고 가을은 남겨진 것들을 축복이라도 하듯 적당한 온도와 부드러운 바람이라는 품을 내어준다. 한 나무의 수많은 잎 중 단 몇 개만이 노랗게 물든 것을 본다. 다 물들기 전, 그 끝의 시작을 알아본 나는 저물어 가는 모든 과정을 마음에 새겨둘 수 있을 것이다.
*백로(白露) : 24절기 중 열다섯 번째로, 밤의 기온이 떨어져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한 절기다.
최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