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따라 걷기

무성함 속에 남길 것을 헤아리는 ― 대서

AROUND Series | 절기 따라 걷기

스물네 번의 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쓰다듬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기록한다.

여름을 곁에 두고, 여름을 잊기에 좋은 시기

여름은 진작 시작되었어도, 땅에 햇빛이 차곡차곡 쌓인 여름 절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계절을 알아본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이렇게 늦다. 지금 삶에 쌓여가는 많은 것들도 어쩌면 꽉 차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직’이라는 분류함에 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완연한 여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주  곳에서부터  따라 흘러왔을 넉넉한 바람이 분다마음에 공간이 사라져 버린 기분이  바다 앞으로 가서 우선  숨을 쉰다그럼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향해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만나게 되는데  바람은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내 시선이 닿을  없는 방향으로 흩날리게 하고얼굴은  덕분에 한결 환하게 밝아진다.
 
아주 더웠던 여름날바다를 등지고 한참 동안 엎드려 책을 읽다가  뒤에서부터 배어 나온 땀이 어깨 쪽으로 슬그머니 흐를 잠시 몸을 일으켜 바다를 향해 앉고는 눈을 감았다얼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던 기억 바람 덕분에 금세 몸도 마음도 좋은 온도를 되찾아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했다. ‘ 곁에서 부는 바람은 물처럼 시원하네. 바다 쪽으로 고개만 돌려도 피부에 닿는 바람이 달라지는구나.’ 마음속 서랍이 온갖 생각들로 빼곡하게 차서 틈이 없던 날이었다그래서 바다가 앞에 있는데도 뒤돌아 읽어야  책에 몰두하였는데, 고개를 돌려 숨을 고르다가 혼잣말까지 하고 나니 의외의 틈이 생겨났다 틈으로는 바다의 이야기가 들렸다.
 
상상해 본다 문장 속에서 숨을 고를  있는 띄어쓰기 빈칸이 모두 사라진 장면을문장을 발음하다가 숨이 차는 것은 감당해 본다고 해도뜻은 도무지   없을 것이다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처럼. 어디에 빈칸을 두는지에 따라 이야기는 다르게 흘러간다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실 수도 있고아버지가 가방에 들어가시게 될지도 모른다그렇게 빈칸은 문장에 생명을 불어넣는다적절한 곳에 빈칸이 정확히 들어가 되었을 우리는 문장을 이해할  있고그러다가 문장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처럼 느껴진다그래서인지 단어와 다음 단어 사이에 띄어쓰기가 사라진  같은 분주한 날에는 내가 삶이라는 문장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보게 된다그리고 마음 깊은 자리에서 흘러나온 답은 매번   있는 여백의 칸이 없어서 오해했다는 이야기다.
 
소서 기간 동안 찾아온 장마를 겪은 논에는  자라야 하는 작물과 함께 잡초도 무성해진다당연한  아닐까. 세상 모든 곳에서는  끝에 있는 많은 것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넓어지나무는 위로 높아지기 위해 아래로도 깊이 내려간다그것이 분명 자연의 균형이긴 하지만 수확의 기쁨과 열매의 풍성함을 만나려면 더운 날씨에도 힘을 내어 잡초를 제거해야만 한다하필 가장  더위인 대서에 해야  일이 생장을 방해하는 풀을 뽑는 김매기라니, 가혹하다는 생각도 든다대서에는 끈적한 더위를 만나게 되는데김매기를 하고 나면 온몸은 분명  범벅이 되고  것이다바깥으로는 땀이 흠뻑 쏟아져 나왔어도 김매기를 마친 후에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개운하지 않을까흘러나와야 마땅한 땀도   밖으로 나갔고해야  일도 했으니까.
 
여름의 마지막 절기인 대서가 되면 이제야 진짜 여름이  것만 같다내내 여름이었는데이제야 무더위를 느끼며 한여름’ 같은 단어를 꺼내어 쓰지만 보름이 지나고 나면 ‘입추라서 어쩐지 한여름이 되었다는 말을 꺼내기가 머쓱하다여름은 진작 시작되었어도땅에 햇빛이 차곡차곡 쌓인 여름 절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계절을 알아본다우리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이렇게 늦다지금 삶에 쌓여가는 많은 것들도 어쩌면  차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직’이라는 분류함에 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이미 완연한 여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대서 무렵에는 더운 날씨에 약해지기 쉬운 심장의 건강을 위해서가슴과 어깨는 바깥 그리고 안을 향해서도 넓게 펼쳐 둔다팔을 사방으로도 펼쳐보고 위로도 들고 위에서 손깍지를 하며 어깨도 열고 나를 안아주듯  팔로 몸을 감싸 안는 움직임들을 하며 여름과 사이좋게 지낼  있다필요한 움직임을 통해 필요한 힘만 챙길  있다면 좋을 텐데, 순간은  양면의 진실을 동시에 갖는다여름의 몸은 겨울의 몸보다 명랑하게 문을 활짝 열어 나를 맞이해 주니계절의 도움으로  흐름을 타고 움직이다 보면 전에 없던 욕심들무성해지 마음이 생겨난다확실히 겨울보다 유연한 몸의 각도는 자꾸만 무언가를 기대하 소망하게 만들기도 한다그러나 바라는 마음은 그게 무엇이든 나와 상황 사이의 실제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감을 만든다바라는 마음이 커져서 나라는 사람의 몸속에 가득 차면꾹꾹 눌러 담으며 채워진 탓에 몸도 점점 무거워진다그렇게 무게를 느끼며 가라앉다 보면 그것이 영영 오지 않을  같아 두려운 나머지 여간해서는 부서지지 않을 딱딱한 돌덩어리 하나가 마음   가운데에 놓이는 기분도 든다.
 
삶의 어떤 시기에는 앞으로에 대해 청사진을 그려보고바라는 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행위를 인생 동력으로 삼았지만, 이제  조금 알게  것은 간절히 바라고 힘껏 노력해도 어떤 것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살면서 마주하게  많은 장면이  노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나의 소망과 행동에 더해 자연스럽게 흘러온 것과 사라져간 것이 합쳐져 만들어진 풍경들기적과도 같은 우리가 함께 만든 순간그걸 어느 순간 알아보았기 때문인지 예전보다 바라는 마음이 커질  답답함을 느낀다. 모든  욕망하는 마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여겨지니까그걸 안다고 해도 바라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소망하는 장면 역시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어느새 마음속에는 잡초가 작물만큼 자라난 장면이 보인다똑같이  달이 걸려도 너무 힘을 주어 바라면 오래 걸린  같고선선하게 흐르다가 만나면 금세 찾아온  같지 않을까나를 어루만지는 질문을 내게 하며 작물 주변 잡초들을 하나씩 뽑아낸다마음에서 땀이 난다.
 
하나의 생각을  붙잡아서 흐름이 막힌 것을 알아보고  생각 흘려보내고 싶을 때는 소서에 그러했듯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다땀이든 눈물이든 움직임에 리듬 맞춰 생각이 흘러 나가게 하는 것이다. 무더운 한낮의 시간을 피해 달리기를 하며 심박수를 높이는 것도 좋고이른 아침의 바닷가에서 가벼운 요가 수련을 해보는 것도 좋은데, 그렇게 야외에서 움직이며 땀을 흘리는 것은 여름의 피부를 조금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요즘 우리는 종종 실내에서 에어컨을 켜고 땀을  들어가게 하는 겉에서 보기엔 쾌적하고 말끔해 보이지만땀은 차갑고 딱딱한 막에 갇혀 나가지 못한 탓에  안에서 엉킨다동의보감 따르면 여름철에 적절하게 땀을 흘리면서 진액을  주어야 가을의  바람  사기로부터 나를 보호할  있다고 하였다지금 흘리는 땀은 안전하게 추운 계절을    피부 옷이 되어  테움직이다가 생각이 소화될 무렵에는 마음속 문장에 빈칸이 생겨나면서 끈적거리는 집착의 에너지가 담담한 집중의 에너지로 변환된다 안에는 하나의 상황 속에서도 상반된  개의 마음이 뒤엉켜 있었는데 쏟아지는 땀이 만들어  띄어쓰기 빈칸이 생겨나자정돈된 문장이 실은 집중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바라는 마음은 어느새 나를 가볍게 움직이 동력이 된다무거움은 사라졌다.
 
소서의  무렵에 도착한 바다는 장마로 인해 온통 흐린 구름 빛깔이었다하늘을 올려다보아도 푸른 조각은 정말이지 손톱만큼 작아서 날이 바뀌리라는 기대는 내려놓아야 했다그래도 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아침에는 바닷가에서 요가를 하였다명상을 하며 파도 소리에만 집중해 보고 싶었는데 짧은 순간에도 나는 ‘수련하는 동안 비가  왔으면 좋겠다 바라거나 수련 마치고 해수욕을  무렵에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면 좋겠다 습관처럼 욕심을 부린다그러다 파도 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리면 이렇게 웅장한 소리와 그리운 바람 속에서도 지금 아닌 것을 생각하는 내가 조금 우스워서 웃고 만다웃어넘기고 수련을 시작하니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땀이 배어 나온다 흐를 테니까 닦지 않고 수련을 이어가는 동안 평소에는 고요한 눈빛으로  나가던 동작들을 하며 여러  기우뚱하다가 넘어진다낯선 바다의 새로운 모래사장에는 조개껍데기가 많았는데 땅으로 뿌리내리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다내가 경험해  땅이 아닌 곳에서 흔들리다가 자연스럽게 철퍼덕 넘어지는 모습이 용감하게 느껴진다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오래전 들은  있었던 바다의 이야기가 들린다. “너를 자유롭게 하는 마음과 손을 잡아너는  마음을 택할  있어.” 어떤 마음도 가려내어 받거나  받을 수는 없지만 어떤 마음에게  넓고 밝은 자리를 내어줄지는 선택할  있다적당히 흐린 하늘 아래에서 움직일  있었고  무렵에는 근사한 노을을 구름 사이로 보게 해주었던 바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보호와 사랑 속에 마음의 환기가  되는 빈칸이 생겨났다.
 
어느 책에서 피서 아닌 망서라는 글자를 보았다더운 날에 더위를 잊는 지혜로움피할  없으니 잊기로 결정해버리는 용기대서에는 어디에 가나 물기 머금은 끈끈한 더위가 있을테고 그래서 잊을 수도 없겠지만더위 속에 있는 나의 삶을 들여다보고  안으로 들어가 오히려 땀을 흘리는 동안에는 잊게 되기도  것이다여름을 곁에 두고 여름을 잊기에 좋은 시기, 대서에는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로 한다바닷바람을 맞으며 마음에 생겨난 띄어쓰기 빈칸에 선선한 바람이 지나갈  있도록삶이라는 문장을 이해할  있도록.

*대서(大暑: 24절기 중 열두 번째로, 더위가 극심하며 강렬한 햇빛으로 채소와 과일이 맛있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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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