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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을 믿으며 할 일을 해내는 ㅡ 망종
AROUND Series | 절기 따라 걷기
스물네 번의 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쓰다듬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기록한다.
“가장 귀찮은 일이나 어렵게 느껴지는 것을 모내기하듯 힘내어 지내보는 망종. 망설이던 것을 꼭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 양 명랑하게 하다 보면 서툴고 어설프기는 해도, 경험했거나 경험하게 될 삶의 모든 장면을 다시 보기 위한 새로운 눈 하나가 분명하게 생긴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마음의 장면들과 내게 있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힘을 운 좋게 발견하기도 하면서 여름의 열기 속으로 들어간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 발이 닿는 곳마다 거무스름한 얼룩이 가득해서 서성거리다 보면 푹 익어 땅으로 돌아온 작은 열매들을 만난다. 포도처럼 알알이 붙어있는데 너무 작아서 꼭 포도의 어린 동생 같아 보이는 오디, 자그마한 자두 같은 앵두, 벚꽃 스러진 자리에 알알이 맺힌 버찌, 매화가 진 자리에 탐스럽게 둥그런 얼굴을 드러내는 매실, 꽃이 머물던 자리에 꽃이 몸을 비우니 그곳에는 열매들이 맺히고, 어느덧 떨어지기까지 하는 시기가 되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을 감각하는 날이 줄어들면 계절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놓치기 쉬운데, 빈손으로 자주 걸으며 친구인 나무들을 한 주에도 여러 번 만나 인사 나누다 보면 계절은 항상 가장 적당한 속도로 흘러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가까이 지내는 오동나무 친구는 꽃 진 자리에 맺힌 열매가 한창 연둣빛으로 부풀었는데, 그 열매는 가을 무렵이 되어야 다 익어서 땅으로 돌아온다. 모두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 꽃 피워야 할 때에 꽃을 피우고, 미련 없이 꽃을 떨어뜨리고는 자연스럽게 열매를 품고 열매가 익으면 열매 또한 힘껏 밀어낸다. 어떻게 저렇게 거침없이 지내는 건지 늦어도 늦지 않고 일러도 이르지 않은 매일을 살아가는 나무들 곁에서는 질문이 많아진다.
어느덧 볕은 점점 뜨거워지고, 차곡차곡 쌓이던 열기가 꽉 차는 망종에 도착했다. 하지 전이라 아직 바람에 물기가 적으니 쾌적하고 햇살은 더없이 풍요로운 때. 망종은 한자어로 까끄라기 ‘망’, 씨앗 ‘종’이다. 까끄라기가 있는 벼나 보리, 밀 같은 곡식의 씨앗을 뿌리는 때라는 뜻이다. 망종이 지나면 밭보리가 더는 익지 않아서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말이 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작년 가을에 심어둔 이제는 다 익은 보리를 수확하느라 분주한데, 그 자리에 또 모판에서 키워낸 볍씨의 싹을 모내기하느라 바쁘다. 무더운 햇볕 아래에서 바삐 움직이는 시기, 한 주 전과는 또 다르게 꽉 차버린 열기에도 바깥으로 서둘러 나가야만 풍성한 가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그들은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주어진 땅은 갑자기 커지거나 작아지지 않고, 어떤 곡식도 스스로 뿌리내려 자라지 않는다. 땅에 심어두었던 무언가를 거둬야만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심을 수 있고, 심는 것마저도 때를 놓치면 계절의 호의를 누리지 못해 수확할 것이 줄어들거나 사라진다. 그렇기에 뭐든 때를 맞춰 하는 일의 중요성을 그들은 온 생으로 절감하지 않을까 상상하게 된다. 부지런함과 게으름에 대해서라면 무엇도 숨길 수 없을 것이고, 지금 할 일들에 대해서도 물러설 수 없는 당연하고 큰 이유가 존재하는 세계, 그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리듬에 내 삶을 포개다 보면 놓쳐서는 안 되는데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한 해의 허리쯤, 내 삶이라는 땅에서는 무엇이 무르익어 수확의 시기를 맞이했는지, 또 무엇은 이제 막 싹이 터 옮겨 심을 때가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때가 되었다. 지금의 삶을 틈틈이 톺아보지 않으면 현재의 생이 당면한 계절 또한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놓치게 된다. 빈손과 텅 빈 마음, 침묵하는 눈과 가만히 잠든 귀를 느끼며 내면을 산책하다 보면 삶의 계절도 가장 적당한 속도로 흘러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요즘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이나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말들을 틈틈이 수집해 고요한 장소에서 만져본다. 이제는 잘 소화되어서 남은 작은 조각들만 흘려보내면 될 것도 있고, 지금부터 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도 보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우리는 서로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마주하며 사랑하다가 느닷없이 뒷걸음으로 멀어지고 말았는지, 왜 더 가까워질 수 없었는지, 모든 것이 다 알 수 없어서 아득한 마음이 되고 마는 시기가 있다. 애쓰지 않았는데도 문득 모두 다 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은 순간도 있다.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는 내내 점점 더 강해지기를 택하며 살아왔다. 돌봄이 아직 필요하던 열여덟, 스물둘, 스물다섯, 부서지기 쉬운 그 나이를 겪는 동안 돌보아주는 어른이 부재했던 것은 결국에는 나의 일상이 나를 키운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삶의 계획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해왔다. 그 생각으로 인해 내게 오거나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아무것도 억울하지도 아쉽지도 않아서 축복의 시기에 당도했다는 생각까지도 했던 것 같다. 의지를 갖는다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점점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 더 깊어지고 넓어질 기회를 선물 받았으니 소중히 경험하기만 한다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하도록 돕는 여정이 이어지는 것 같았는데, 지난 몇 년 동안 드문 마음들을 겪었다. 연약함이 드러나는 순간을 강해지는 연습을 해야 할 시기로 여기며 살아온 나는,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모른 척 뒤에 숨겨두었던 연약함을 거듭 만나면서 힘내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게 한동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제야 연약함에 주저앉게 하는 걸까, 서둘러 삼켜버리거나 없는 것처럼 덮어둔 마음들은 왜 지금에야 정면으로 돌아와 나를 서성거리게 하는 걸까. 질문만 많아져서 자꾸만 산책하고, 나무의 손을 더 자주 잡고, 나무의 품에 등을 기댄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던 시간들. 점점 더 찬란해지는 여름 햇빛의 보호 속에 마음을 꺼내어 두고 가만히 오래 보다가 알게 되었다. 아, 나에게 다시 필요한 경험을 한 거였구나. 인간에게는 도무지 혼자서 의지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연약한 시기가 있다는 것,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약한 조각을 드러내며 도와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때도 있다는 것. 그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모습이니까 힘써서 바꾸거나 강해지려고 버둥거리기 보다 약함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꼭 마주해야 하는 날들이었다. 연약함을 제대로 안아준 나는 이제 더 많은 타인의 연약함 곁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더 큰 품으로 그들을 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에 대한 기대감이 생겨난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이렇게 멋진 문장을 쓴 것은 로베르트 발저 선생님, 나는 시간과 장소를 멀리 건너온 이곳에서 이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받고 있다. 완전히 이해하지도 전부를 사랑하지도 못하는 순간들이 여전히 있지만,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사랑하려고 한 번 더 마음을 여는 대상이 있다면 너무도 당연하게 거리가 좁혀져 이미 그에게 이해받거나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보게 된다. 그 시점에서 새롭게 생성된 이해와 사랑이라기보다 존재하던 이해와 사랑을, 세상을 향하는 몸의 방향을 바꾸고 시선을 옮긴 덕분에 보게 되는 것이다. 나의 삶이 모두 초대한 사건들이다.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 때, 삶이 이미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겁이 나고 막막할 때마다 도망가려고 힘을 쓰지만 않는다면, 남겨둔 힘으로 더 많은 것을 환대하며 기꺼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렵다는 생각이나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이 심신을 무겁게 만들고 연약함이 드러날 때에는 여전히 그 모든 일이 나를 위한 삶의 큰 그림이라는 것을 즉시 인정하기가 참 어렵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 삶이 불러온 필요한 경험이라는 걸 온몸과 마음으로 즉시 믿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서야 수확할 수 있는 지난 발자취의 한 걸음과 이제 시작되는 새로운 한 걸음을 기쁘게 본다. 가장 귀찮은 일이나 어렵게 느껴지는 것을 모내기하듯 힘내어 지내보는 망종. 망설이던 것을 꼭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 양 명랑하게 하다 보면 서툴고 어설프기는 해도, 경험했거나 경험하게 될 삶의 모든 장면을 다시 보기 위한 새로운 눈 하나가 분명하게 생긴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마음의 장면들과 내게 있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힘을 운 좋게 발견하기도 하면서 여름의 열기 속으로 들어간다. 이제 와 수확할 수 있었던 것들이 자리를 비워 헐렁해진 공간에는 새롭게 빛나는 시도들이 촘촘하게 채워지는 중이다. 모내기를 끝낸 여름의 농촌 풍경처럼 풍요롭게 일렁이는 초록 물결 같은 마음 밭의 곁, 낯선 나의 모습도 모두 도약을 위한 삶의 디딤돌처럼 느껴진다. 무엇도 늦지 않았고, 무엇도 이르지 않다. 지금 하게 되는 모든 일들이 모두 가장 적당한 때에 하게 된 필연적인 일이라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말이다.
*망종(芒種) : 24절기 중 아홉 번째로, 벼와 같은 곡식의 종자를 뿌리기에 적당한 절기이다.
최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