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따라 걷기

새롭게 채울 빈 자리를 준비하는 ― 춘분

AROUND Series | 절기 따라 걷기

스물네 번의 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쓰다듬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기록한다.

조금씩 길어지는 빛의 시간

“봄을 시샘하는 바람 속에서 우리들은 봄이 코앞에 도착했음을 느낀다. 아침은 전보다 일찍 찾아올 것이고, 조금씩 길어지는 빛의 시간에 대한 지구의 약속은 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라도록, 내 마음의 비워진 자리에 푸르고 향기 나는 것들이 피어나도록 도와주리라는 걸 오히려 믿을 수 있다. 이제, 계절에 몸을 맡기고 따뜻함에 기대어 나아갈 때가 왔다.”

어둠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아침 빛에 눈을 뜨면 양치한 후 바로 잠시 아침 명상을 한다. 작고 동그란 원석이 108개 이어진 말라를 호흡 한 번에 하나씩 넘기며 사용할 때도 있고, 손가락을 접어보며 호흡의 숫자를 셀 때도 있다. 대부분은 그렇게 다녀가는 숨을 살피며 시간을 보내지만, 요즘은 잠에서 깨어 눈을 뜨자마자 그리고 잠들기 전 눈을 감았을 때, 거의 매일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잔상처럼 떠올라 입과 마음 안에 머금고 굴리며 한동안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반복해 하면서 명상을 좀더 한다. 며칠 전에는 책을 읽다가 두꺼운 명상책 말미에 ‘감사합니다’만 남으면 된다는 문장을 발견하고는 적어도 아침저녁으로는 그 마음만 가득했던 것에 고마움이 일었다. 그렇게 명상하고 나면 따뜻한 물이 마시고 싶어져서 전기포트에 물을 채우고 잠시 기다린다. 시선을 거기에 둔 채 무엇도 하지 않으며 멍하니 머무르는 찰나가 고요하게 빛난다. 물이 끓으면 컵에 반이 조금 넘게 채워지도록 담고, 브리타 정수 물을 더해서 따뜻한 물을 천천히 마신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그것으로 구성되는 나의 삶도 잠시 비어있는 그 순간, 온기 있는 물이 몸속에 들어오면 깨끗하고 투명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가슴으로, 배로, 느긋하게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 무렵에는 매번, ‘비어 있으면 찾아오는 것이 이렇게 잘 느껴지는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입안이 가득 차 있을 때는 아무리 맛 좋은 반찬을 먹어도 그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 자극적인 맛만 알아보며 씹게 되는데, 비어있는 입으로 들어온 새로운 반찬은 그 온도나 단맛, 짠맛이 모두 잘 느껴져 맛을 충분히 누리는 기분이 든다. 비워두는 것의 즐거움은 새로운 것이 채워질 무렵이 되어서야 더 잘 드러나는 것일까? 비워진 상태 속 맑은 가벼움에 미소 짓던 것과는 또 다른 기쁨이 빈자리에 무언가 채워질 때 펼쳐진다.

 

살아오는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표정을 만나고, 준비하기도 전에 마주한 풍경에 때로는 감정이 가슴에 얹히기도 했다.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심코 해버린 말 속에 찾아온 상처를 가벼이 여기며 못 본 척하는 내가 보였다. 여전히 떠올리면 마음이 아픈데도 그렇게 오래 아파할 일 아니라고, 큰일도 아닌데 이제 그만 툭툭 털어내라고 서둘러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음을 알아볼 때,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타인의 슬픔 곁에서는 감정이 지나갈 때까지 온전히 슬퍼하라고, 서둘러 빠져나오는 것은 스스로한테 폭력적인 행동이라고 말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걸 잘 해주지 못하는 날들. ‘소화’는 무턱대고 전력 질주해서 상처의 자리를 지나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속도대로 정성스러운 걸음을 걸으며 거칠어진 자리를 쓰다듬고, 선명하던 흔적이 점차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으면서 한 시기를 통과할 때 일어난다. 그 시절이 선물해 준 빛과 그림자를 고루 알아보며 존중하고 감사할 수 있을 즈음에는 감정들이 하류로 흘러가 캄캄하고 묵직하고 물기 어린 것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빛의 조각만이 작아진 조약돌처럼 부드러운 질감으로 남겨져 있다. 가볍고 밝은 자리에서 채워지는 경험을 마주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잘 소화하는 일인 것만 같다. 불필요한 무거운 것들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간 비워진 자리를 준비하는 것이 새로운 날을 향한 제일 중요한 준비물인지도 모르겠다.

 

‘봄 춘, 나눌 분’ 춘분이라는 글자는, 봄을 둘로 나누면 존재하는 중심, 그 시기에 우리가 도착했다는 말이 담겨있다. 춘분에는 낮과 밤의 길이가 드디어 같아지고, 지금부터 ‘하지’까지는 계속해서 낮이 길어진다. 추분이 될 때까지 밤보다 조금이라도 긴 낮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낮이 길어지는 시기이기는 해도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 때문에 몸은 자꾸만 움츠러든다. 따뜻한 빛 속을 달리고 싶은데, 두꺼운 옷을 입어도 옷깃을 자꾸 여미게 되는 차가운 바람 탓에 달리기는커녕 어느 날에는 산책도 망설인다. 이즈음에는 으레 들리는 “요즘 감기가 유행이래요, 조심해요.” 같은 다정한 인사도 찬 공기 속으로 걸어들어가 힘차게 팔을 저으며 걷는 일을 머뭇거리게 하는 데 한몫을 하고야 만다. 그래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이 무렵엔 이제 더 이상 늦장 부릴 수 없어서 봄보리를 심기 위해 밭을 간다. 겨우내 딱딱하게 굳어진 땅에 바로 씨앗을 뿌릴 수는 없으니 땅을 부드럽게 하고 두렁에는 말뚝을 박으며, 봄의 일을 봄답게 해낸다. 춘분에 밭을 갈지 않으면 일년 내내 배부르지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아무리 찬 바람이 다시 겨울을 초대한 듯 해도 기운내서 새로운 농사를 시작해야만 때를 놓치지 않는다고 조언하는 옛사람들의 마음일 것 같다.

 

춘분의 시기가 되면 겨울에 따뜻한 곳을 향해 떠났던 제비가 남쪽에서 다시 돌아온다. 지난봄에는 매년 찾아오던 제비가 오지 않았다.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의 일 층은 주차장인데, 그 처마 아래에 제비들의 집이 있다. 두 개가 있는데, 어느 해엔 두 집 모두 북적거리고, 어느 해엔 하나의 집에만 제비가 돌아와 온화한 계절을 그곳에서 난다. 제비가 돌아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알에서 막 깨어난 어린 제비들을 볼 수 있는다. 눈도 아직 잘 못 뜬 채로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린 모습과 무럭무럭 자라나 어느새 비행 연습을 하는 모습도 보게 된다. 서툴고 어린 걸음을 매일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마음이 돋아나는 새싹처럼 싱그러워지도록 한다. 그래서 봄이 오면 내내 제비들을 기다린다. 지난봄에는 어느 집에도 제비가 돌아오지 않아서 매일 아침 올려다보며 시무룩한 얼굴이 되곤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오는 길이 유독 어려웠나, 다른 집으로 갔나? 아쉬운 눈빛을 하고는 제비집 넘어 하늘만 한참 보며 지냈다. 올해에는 잘 찾아올 수 있을까? 가까운 강가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들이 정확한 자리로 돌아와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비상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지작거리던 언어를 띄운다. ‘여기, 돌아올 자리를 잊지 말고 다시 와.’

 

쌀쌀해서 팔꿈치를 어루만지게 되지만 그래도 산책 삼아 강가를 걷다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여러 갈래의 길 중 강가의 길을 택하면 새순이 돋아나는 버드나무와 길어지는 해, 오늘의 빛 그 뒤꽁무니까지 강물에 담긴 모습을 볼 수 있다. 목련 나무는 곧 하얀 폭죽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강물에 둥둥 떠 있다가 물속에 다녀오는 오리의 움직임을 한참 보는 동안 해가 지고 말았다. 해가 지는 것은 한 순간이고, 나는 내가 아닌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이제와 나에게 말한다. ‘그럼 됐어, 새로운 봄을 새롭게 맞이할 준비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아.’ 마음이 비워진 자리에 새로운 언어가 떠오르자 어떤 경험 하나가 소화되었음을 그제야 알게 된다.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돌아와야만 했던 나의 자리는 여기였다. 새롭게 채워지는 것이 잘 보이고, 더욱 음미할 수 있는 맑게 비워진 자리. 한해의 첫 농사가 시작되는 춘분, 지금의 삶이라는 땅을 부드럽게 갈고 새출발을 준비한다. 어둑해진 길, 보행자 작동 신호등의 반짝거리는 붉은 빛 속 동그라미를 누르고 길을 건넌다. 안전하게 열린 길이 내 앞에 있다. 봄을 시샘하는 바람 속에서 우리들은 봄이 코앞에 도착했음을 느낀다. 아침은 전보다 일찍 찾아올 것이고, 조금씩 길어지는 빛의 시간에 대한 지구의 약속은 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라도록, 내 마음의 비워진 자리에 푸르고 향기 나는 것들이 피어나도록 도와주리라는 걸 오히려 믿을 수 있다. 이제, 계절에 몸을 맡기고 따뜻함에 기대어 나아갈 때가 왔다.

*춘분(春分) : 24절기 중 네 번째로, 일년 중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추위와 더위의 길이가 같은 시기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최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