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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하는 빛으로 따뜻함을 찾는 ― 소한
AROUND Series | 절기 따라 걷기
스물네 번의 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쓰다듬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기록한다.
얼음을 캐서 운반하는 동안 모두들 한겨울 내내 웅크린 채로 사리던 몸을 한 번 더 움직였을 것이고, 얼음은 차갑지만 몸에서는 드문 열기가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따뜻한 몸으로, 수확하고 싶은 씨앗을 뒤적거리면서 새해의 첫 주를 씩씩하게 시작했을 테니까. 농사를 짓는 사람은 아니지만 ‘때’라는 것을 절기를 통해 배우다 보니, 때맞춰 자연스럽게 사는 일에 더 마음이 쓰인다.
소망하는 ‘월화수목금토일’을 적는다. 몇 시쯤 잠들어 언제 일어나고 싶은지, 식물들에 물 주는 일과 소파의 먼지를 제거하는 것은 언제 하고 싶은지 가늠해 보고, 명상과 요가 수련은 몇 시쯤 하는 게 좋은지, 작은 한 끼와 큰 한 끼, 총 두 끼의 식사를 하는 내가 몇 시에 먹는 게 몸이 편안한지도 생각해 본다. 거창하고 대단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내 삶을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는 일들을 재배치하면 삶의 리듬이 달라진다. 리드미컬하게 흐르던 삶이 어떤 돌부리를 만나 통로가 막힌 느낌이 들거나, 갑자기 일상의 부피감이 다르게 느껴지고 넓어져 버린 자리를 통과하며 막막한 얼굴이 될 때면 종종 하는 일이다. 5년 일기장을 사용하고 있는데, 나는 일 년 전 오늘도 ‘추운 날씨 탓인지 오후에 먹은 김치볶음밥이 소화가 안되어 고생했다. 천천히 먹었는데도 그랬다. 날씨의 영향이려나?’라고 적었다. 오늘의 식사 메뉴는 달랐지만 같은 생각을 해서 혼자 조금 웃고 말았다. 돌아보면 매번, 연말이 되어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좀더 보내고 어쩐지 들뜬 마음으로 평소보다 화려한 음식을 연달아 먹으면 이 무렵에 반복적으로 일상의 리듬이 흔들리는 것 같다고 느낀다. 답답한 속으로 그날도 했던 일을 오늘 다시 한다. 쓰다 보면 이렇게 작은 일상의 일들이 지탱해 주는 삶이 어떤 빛깔로 빛났으면 하는지를 떠올리게 되고, 새로운 해에 흘러가고 싶은 자리가 가만히 드러난다. 새해라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해에 하기 좋은 일이 분명하다. 어떤 리듬으로 춤을 추며 어느 자리로 흘러갈지를 헤아려보는 동안 화사한 얼굴이 되고 마니까.
한껏 차가워진 공기, 소한이 되면 몸을 먼 곳으로 데려가기가 어렵다. 소설과 대설을 보내며 하늘에서 내린 눈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테다. 눈은 땅에 스며 들어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면서 땅을 흔들어 깨우는 중이다. 땅은 반복되는 오르내림, 그 율동을 통해 가지고 있던 한기를 세상 속으로 토해낸다. 동지부터 다시 길어진 해 덕분에 하늘에는 이미 봄이 도착했지만 땅에서는 겨울이 한창인 듯 걸을 때마다 신발을 신고 있어도 언 땅을 밟는 발이 차갑다. 냉기에 차가워진 딱딱한 발로는 지금 당장 멀리까지 갈 수가 없고, 추위에 웅크린 마음도 좁아진 몸의 반경 안을 맴돈다. 그런 겨울날에 찬 공기를 끌어안으며 호기롭게 먼 곳을 향해 걸으려고 하다가는 몸이 상하고 마음도 지친다. 겨울빛의 기울기는 다른 계절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니 지금 마주하는 빛의 방향, 그 따뜻한 자리로 들어가 곁에 있는 다정한 친구에게 몸을 기대고는 꿈을 꾼다.
옛사람들은 소한에 얼음을 캐서 저장고로 가져와 감추고, 씨앗을 내놓으며 그 해에 수확하고 싶은 것을 정하는 풍습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결국 얼음은 모두 녹고 말 텐데 왜 그렇게 의미 없는 일에 시간을 쓰게 했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지금 하는 어떤 일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 그리고 나조차도 얼음처럼 사라지고 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나중에 어떻게 변화하게 될 지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경험하는가 이다. 얼음을 캐서 운반하는 동안 모두들 한겨울 내내 웅크린 채로 사리던 몸을 한 번 더 움직였을 것이고, 얼음은 차갑지만 몸에서는 드문 열기가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따뜻한 몸으로, 수확하고 싶은 씨앗을 뒤적거리면서 새해의 첫 주를 씩씩하게 시작했을 테니까. 농사를 짓는 사람은 아니지만 ‘때’라는 것을 절기를 통해 배우다 보니, 때맞춰 자연스럽게 사는 일에 더 마음이 쓰인다. 나도 따라 씨앗을 내놓듯 수확하고 싶은 것, 그런 매일의 리듬을 떠올린다.
마음은 과거로도, 또 미래로도 너무 쉽게 흘러가고 만다. 여기에 멈춰선 채로 아주 먼 곳까지 마음을 보낼 수도 있는데, 그게 나만의 재능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마음의 속성을 날 때부터 선물 받는다. 그 선물은 나를 희망으로 화창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느 날엔 무거운 돌덩이를 등에 지고 하염없이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선물이라기 보다는 내려놓아야만 편안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마음과 기분 덕분에 경험하는 세계, 그 덕분에 꾸는 꿈이 고마워서 잘 동행하고 싶다. 어차피 없앨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추운 날씨, 덕분에 경사진 마음 곁에 서서 그 기울기를 바라본다. 기울어져 있으니 흐르고, 흐르고 있으니 탁해지지 않는다. 너그럽게 멀리까지 마음을 흘려 보내고 싶다. 흘러가고 있는 마음을 붙잡으려고 온 몸에 힘을 주다가 여러 번 고생하고 나니 이제는 그냥 두고 싶다.
5월, 하지에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음기가 생성될 무렵에는 도리어 매우 덥고 11월,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양기가 생성될 무렵에는 도리어 매우 춥다. 기운은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여 있는데, 아래에 새로운 기가 생성되면 위로 기운을 밀어 올린다. 지금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가장 오래된 추위. 세상 밖으로 지금 드러난 한기는 현재의 진실이기도 하지만, 이미 과거이기도 하다. 나의 세계 속에서 지금 보이는 많은 것들 또한 오래된 마음들, 이제야 겨우 밖으로 꺼내진 것들이다. 밑에서 어떤 희망 하나가 마음을 밀어 올리니까 오래된 두려움이 불쑥 올라오기도 하고, 어떤 사랑 하나가 마음을 밀어 올리니까 오래된 상처가 되살아나기도 한다. 지금 막 생겨나진 않았을 테다. 그것은 그래서 ‘지금’이기도 하고, ‘과거’이기도 하지만 ‘미래’는 아닐지도 모른다. 오래 갖고 있어서 응축된 힘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마음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먼 곳으로 옮긴다. 지금 모아두는 마음들은 언제 어디에서 드러나게 될까 호기심이 생긴다.
지금의 마음이 흘러 어디에 도착하게 될지, 그때 나는 어떤 사람 곁에서 어떤 표정을 하게 될지 현재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마음을 멀리 보내며 꿈을 꾼다. 어떤 빛을 내는 사람과 손을 잡고 있었으면 하는지, 어떤 소리에 둘러싸여 어떤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은지, 어떤 춤을 추고 싶은지, 원하는 만큼 멀리멀리 마음을 보낸다. 소한은 느긋하게 그것을 하기에 좋은 시기다. 마음이 멀리 가는 모습을 사계절 앞에서 넉넉한 시간을 가진 여기의 내가 지켜보기에 좋은 겨울. 이 순간, 마음의 먼 걸음은 두 팔 벌려 안기 좋은 선물이 된다. 조급해져서 무거운 돌덩이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멀리 흘러간 마음 곁에서 알아보고 온 풍경 덕분에 지금의 걸음이 명랑해질 수 있다면 마음의 긴 여행을 휘파람 불며 응원하고 싶다.
소망하는 매일을 적은 종이를 다시 들여다본다. 나는 꿈꿀 수 있고, 원하는 자리로 나를 데려갈 수 있다. 때론 힘을 빼고 숨을 고를 무렵 삶이 도착하게 한 자리에서 신나게 뛰어놀 수도 있다. 상상하기 어려운 것을 상상해 보려고 하고, 그렇게 해서 떠오른 방향으로 꿈꾸며 무언가를 해보는 일이 좋다. 장래 희망은 늘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거, 나의 상상 너머의 내가 되는 것. 불확실성은 그 자체로 가능성이다. 궁금해하는 눈으로 오늘을 반기며 새롭게 시도하며 경험하고 싶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도착했으면 하는 어떤 자리, 그 곁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사랑을 말하고 싶다. 올해에는 원하는 ‘월화수목금토일’ 옆 장에 올해의 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들, 삶을 향한 희망 사항들을 적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갈 수 있는 곳에 가고,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고, 열리는 것을 열리게 두고, 닫히는 것을 닫히게 두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만지면서, 그저 경험하면서 살기를.
무사히 감사하고, 단순하게 기뻐하고, 어린아이처럼 바라보고, 상처를 모르는 사람처럼 사랑하면서 지낼 수 있기를.
‘없음’보다 ‘있음’을 주시하면서 수많은 ‘있음’이 주는 풍요를 누리고, ‘없음’ 또한 새롭게 열리는 문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받아들임은 언제나 지금 열리고 있는 문을 조금 더 활짝 여는 열쇠가 되고, 저항은 항상 지금 닫히고 있는 문 사이에 온몸을 끼우고 나를 다치게 하는 선택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자유롭기를, 주어진 자유를 감사히 누리기를.
사랑하기를, 둘러싼 사랑의 축복을 만끽하기를.
평화롭기를, 발견된 평화를 연결된 존재들과 함께하기를.
나에게 필요한 용기와 사랑은 늘 내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대단하지 않아도 내가 나에게 갈망하는 희망 사항들은 지금의 할 일들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들을 이야기해 준다. 나는 멀리 가려고 애쓰지 않고 지금 서 있는 이곳, 이 발아래에서 땅이 녹고 있음을 느낀다. 먼 곳에서부터 봄이, 나를 향해 가장 적당한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음을 듣는다. 곧, 봄이 도착할 것이다. 씨앗을 꺼내어 두고 봄을 기다린다.
*동지(冬至) : 24절기 중 스물세 번째로, 작은 추위라는 뜻을 가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무렵이 가장 춥다.
최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