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따라 걷기

경험이 지혜가 되는 ― 입동

AROUND Series | 절기 따라 걷기

스물네 번의 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쓰다듬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기록한다.

추운 날을 데우는 함께 만드는 온기

겨울에 함께 도착했다. 입동에는 우리가 만나 부드럽고 따뜻한 질문의 공을 서로에게 굴렸으면 좋겠다. 모든 계절을 살아내느라 수고가 많았다고, 분주한 계절 동안 미뤄두었던 인사를 건네고 다가오는 추운 날엔 서로 마음을 기대어 두며 때때로 쉬어 갈 수 있다면 좋겠다. 경험이 지혜가 되는 시간, 새로운 사랑을 발명하는 시간을 ‘같이’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겨울과 같은 그 시절이 지난 후진실하지 않은 말은 결국 후회를 부른다는 것을 배웠다투정 부리듯 이별을 말하는 건 사는 내내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것도그 경험 이후부터 나는 마음과 다른 말은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커다랗게 팔을 벌려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었을 뿐인데제대로 전하는 방법을 몰랐던 나는 다른 말을 했다내가 한 말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우리가 하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그때의 이별에는 내 책임이 있었다그 책임을 다하는 동안 겪어낸 감정들로 인해 마음과 다른 말을 하고 싶을 땐 우선 멈춰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마음의 속성 중 하나는 ‘변화이다그래서 가끔 상대에게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아무 말도 하지 않음이 결국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말로 만든 상처는 언어의 각인으로 인해 더 오래 더듬더듬 만지작거리게 되는 것 같아서어둠 속에서 웅크린 내가 깊은 어둠을 향해 몸을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도빛의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는 새로운 마음을 꺼내게 한 것도모두 타인이 남기고 간 언어관계 맺으며 주고받은 온기와 냉기눈빛의 힘이 컸다그것을 기억한다내가 남겨둔 것이 누군가의 내부에서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그리고 언젠가 마음이 지금보다 넓어지는 날이 오면 그 말을 하지 않은 나에게 결국 고마워하게 될 것을 이제는 안다현재의 마음이 가진 작은 너비와 얕은 깊이 때문에 생겨나는 뾰족한 모양의 마음들은 점점 더 멀리 걸어가 다시 바라보면 어느새 둥글고 작은 점이 되어 있을 테다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긴 겨울 같았던 인생의 시기에 천천히 소화된 마음이 처음과는 다른 이야기를 내게 건네주었고나는 그것을 목격했을 뿐이다그 덕분에 지금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겨울을 온전히 보내고 선물로 마주하게 된 따뜻한 봄빛의 세계이것이 첫 경험이다.
 
처음으로 온몸과 온 마음으로 타인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그 시절의 나는 사랑에도 서툴고 이별에도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지냈다그때나 지금이나 숨기는 법을 몰라서 슬픔의 터널을 통과하며 질병을 마주하기도 하고표정과 눈빛으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그런데 참 이상하지, 몸과 눈빛으로 표현하면서 말로는 아무것도 꺼내어지지 않는 불균형 때문인지 통증은 점점 더 깊어졌다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었다면 나를 탓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을까? 그건 또 장담할 수가 없지만 대신 슬픔을 끌어안는 품의 모양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말하는 동안 조금 떨어져서 보게 되는 장면이 있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타인의 경험이 포개어지면 열어 둔 두 팔의 모양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혼자서 끙끙 앓는 것을 택하지 않고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에게 나의 모습 중 가장 엉망인 장면을 용기 내어 보여주었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을 기대어 둔 채 찾아온 어둠으로 아주 새로운 진실을 목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어쨌든 그 무렵의 나는 혼자 어두운 방에서 슬픔과 두려움을 만났다수많은 생각을 창조하고 소멸시키면서.
 
생각은 자기 경험의 언어로 떠오른다실제적인 경험과 책에서 읽은 문장관계 속에서 태어난 말과 미디어를 통해 노출된 언어의 장 안에서 생각을 겹겹이 쌓아간다가끔은 그 포개어진 면들을 바라보다가 지금 필요한 지식을 조심스럽게 빼내어 상황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지혜는 언제나 경험 너머에 있다새로운 깨달음은 기존의 알아봄을 통해 정의된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그래서 경험의 언어로는 만날 수 없는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 경험한 세계 너머에 있다서둘러 분석하고 결론 내리는 대신 감각하고 감정을 안아주면서 침묵한다생각이 멈춰지지 않는 어느 날엔 마음이 연결된 친구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다른 역사의 언어라는 열쇠로 잘 모르던 새로운 문에 들어설 수도 있다아직 어떤 언어로도 정의 내려지지 않은그러니까 기존의 언어라는 익숙한 옷을 입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마음 곁에서 머무르는 일은쉽게 꺼낼 수 있는 언어의 세계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일이다소화되지 않은 경험들은 종종 두려움을 초대한다좋은 경험은 다시는 못할까 봐 겁날 수도 있고아픈 경험은 또 만나게 될까 봐 무섭기도 하다.
 
서리가 내리는 상강과 첫눈이 내리는 소설 사이겨울의 절기가 입동으로 시작된다입동은 말 그대로 겨울로 들어선다는 뜻인데오래전 사람들은 겨울 초입에서 함께 추위를 겪어내는 존재들을 떠올렸다입동 전후에 가족과 이웃이 모여 김장하며 같이’ 겨울을 준비하기도 했고, ‘치계미라는 풍습도 있다치계미는 꿩쌀을 의미하는 한자어인데, 그것들로 사또를 대접하는 것처럼 마을 어른들에게 융숭하게 대접하는 잔치 풍습이다아무리 어려운 살림이어도 옛사람들은 이 풍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는데형편이 안 되는 이들은 미꾸라지라도 잡아 추어탕을 끓이는 ‘도랑탕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고그렇게까지 타인을 돌보는 마음이라는 것은 대체 어떤 모양일까 생각해보게 된다아마도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긴 시간을 살아내며 이미 힘을 많이 써버린 연약한 존재가 추위에 약해질 때, 그 장면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 역시도 편안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세계를 묶고 있는 실 어딘가가 늘어지면 우리 자신의 삶 또한 팽팽할 수가 없고기울어진 어둠이 생으로 스며든다찬 바람이 불면 서늘하게 굳어버리는 몸의 뒷면은 우리 마음을 딱딱하게 만들기도 한다그러니 추운 날이 완연해지기 전, 꺼내어 드는 따뜻한 마음은 겨울에도 우리를 살아남게 하는 힘이 된다나에게 좋은 것이 당신에게도 좋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없지 싶은데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가능하다는 것만은 우선 확실하다. 치계미라는 풍습을 이해해 보려고 하는 동안 그것만큼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뜨거운 차는 겨울에 맛이 더 좋다집에 손님이 오면 여름에는 냉침한 백차를 내기도 하는데겨울에는 달콤한 곶감과 홍차를 준비하거나 묵직한 레드 와인에 안주로 보이차를 내리기도 한다차가운 백차를 몇 모금에 나눠 삼키고는바깥의 푸르름을 만나기 위해 길을 헤매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에는 빨리 자리를 뜰 수 없는 찻자리가 이어진다추우니까 나가고 싶은 마음도 그리 들지 않는 느긋한 분위기그렇게 앉아 나눈 온기는 서늘함을 견딜 수 있게 하는 빛의 마음을 부른다겨울의 추운 공기가 우리들을 서로의 온기 곁에 조금 더 머무르게 하고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지난 계절 동안 마주했던 것들어느 정도 소화된 것과 아직 소화되지 않아 여전히 모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질문을 던졌다어떤 선택의 바탕에 무엇이 있었는지어디를 향해 숨 쉬었는지둥글고 부드러운 빛과 같은 물음을 서로를 향해서 굴린다천천히 굴려야 상대에게 도착할 때 그가 안심하고 공을 받을 수 있음을 아는 친구와의 대화우리들은 같은 길을 손잡고 나란히 걸어도 자신의 역사라는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발견하는 것은 다르다그러니까 서로의 다름이 세계가 넓어지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넓어지는 일은 그렇게 함께 마음을 나누는 동안 일어난다혼자서는 볼 수 없었던 방향을 응시하면 거기에는 홀로 걷는 길에서 보던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이 있고함께 걷는 친구 덕분에 든든한 마음으로 익숙하지 않은 곳을 향해 몸과 마음을 뻗어낼 수 있다그렇게 도착한 자리나에게 좋은 것과 친구에게 좋은 것이 다르지 않음을느슨한 연대가 지닌 다정한 포옹을 느낀다홀로 침묵하는 동안에는 소화되지 않던 마음들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답답했던 것은 열심히 요가를 수련하고 명상하면서도 여전히 사랑을 잊게 하는 장면이 있다는 것에 아득함을 느꼈기 때문이다열심히 하면 뭐하나, 넓어짐 없이 그대로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살아온 날들이 모두 의미 없어 보였다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전과 비슷한 삶의 너비와 깊이 안에서는 드러나지 않던 것이 심신의 스펙트럼이 확장되자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준비되니 이제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그동안 경험하고 소화한 것 너머의 세계낯선 경험 속에 있는 것뿐이다같은 슬픔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나는 한 걸음 더 나와서 걷고 있는 것사랑을 잊게 되는 순간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렇게 경험이 소화된 자리에서 나는 상상해 보지 못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새로이 시작하지 않고는 끝낼 수 없는 세계가 누구에게나 있다여기는 드디어 터널의 바깥이구나이곳이 바로 그때의 그 마음 밖이구나안도하며 말하는 날. 뒤를 돌아보면 긴 겨울과그 겨울을 보내는 동안 온기를 나누었던 이들이 떠오른다그러니까 겨울은 바깥으로 멀리 걷는 계절이 아니라 안으로 깊이 파고드는 시기서로의 온기에 감탄하고 감사하는 때이다함께 겨울을 잘 보내고 맞이한 봄에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을 만큼 자랄 것을 믿는다생명력이란 모든 계절을 계절답게 지내며 비로소 생겨나니까겨울을 잊은 나무는 봄을 맞이할 수 없고봄을 기억하는 나무는 겨울이 두렵지 않다그리고 나무들은 자기 뿌리 곁에서 생동하는 다른 뿌리와 조우하며 겨울 동안 추위를 살아낸다더 깊이 뿌리내린다.
 
겨울에 함께 도착했다입동에는 우리가 만나 부드럽고 따뜻한 질문의 공을 서로에게 굴렸으면 좋겠다모든 계절을 살아내느라 수고가 많았다고분주한 계절 동안 미뤄두었던 인사를 건네고 다가오는 추운 날엔 서로 마음을 기대어 두며 때때로 쉬어 갈 수 있다면 좋겠다경험이 지혜가 되는 시간새로운 사랑을 발명하는 시간을 ‘같이’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그렇게 뿌리를 맞대어 두고 보낸 우리의 겨울은 남은 생에 빛의 문장들을 기억하게 만들 테니까바람과 햇빛비와 어둠눅눅함과 찬란함 속에서 연약해진 몸으로 만나 서로에게 치계미를 할 수 있길 바라면서 한동안 만나지 못한 옛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입동(立冬) : 24절기 중 열아홉 번째로겨울이 시작되어 산야의 나뭇잎이 떨어지고 풀이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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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