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작사합니다

고예림 — 작사가
새로운 걸음을 시작하며

오래된 맨션의 입구에 서서 ‘맨숀’이란 팻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시간을 먹어도 헐거워지지 않는 견고한 자태에 감동했는데, 고예림작사가 역시 그 집을 닮아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위해 주변을 정돈하고 나를 살피는 데 10년이 넘는 세월을 투자하는 사람. 긴긴 대화가 끝나고 알 수 있었다. 그의 도움닫기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는걸.

무림 고수의

걸음걸음

집 앞에 트리를 두어서 환대받는 기분이었어요. 반가워요.

안녕하세요(웃음).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작사가, ‘림고’로 활동하는 고예림이에요.

 

림고라는 활동명은 본명 ‘고예림’에 뿌리를 둔 것 같아요.

림고는 사실 작사가로 데뷔하고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필요해서 고민하다 나온 거였어요. ‘내 브랜드 이름을 정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은 거죠. 후보가 꽤 쟁쟁했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요(웃음). 이름은 제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나라는 브랜드의 근본적인 것들은 제 이름에서 출발하는 거 같고, 최종적으로는 제 이름에 부합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림고라는 이름도 자연스럽게 본명에서 파생됐어요. 설명하기 쉬운 브랜드가 가장 좋다는 생각이 있어서 “내 이름이 고예림이어서 림고야.”라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기도 했고요. 말장난처럼 “고예림 고, 예림 고!” 하는데, 거기서도 림고가 읽히기도 하고요(웃음).

 

본명은 어떤 의미예요?

저희 아버지가 중국 무협 소설을 좋아하셨는데, 거기 나온 여주인공 이름이었대요. 어떤 한 일파의 무림 고수인 여자 캐릭터인데 무협도 잘하고 지략도 엄청나게 뛰어났다고 해요. 정말 그 이름 때문에 예림이 되었어요. 한자가 아마 수풀 림林에 빛날 예叡일 텐데, 숲속에서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에요.

 

“작사가로 데뷔”했다고 이야기했는데, 데뷔라는 건 어떻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사실 뚜렷한 경로랄 게 없어요. 저는 작사가 중에서도 프로작사가에 속하는데요. 이런 프로 작사가는 등용문 경로가 여러 개거든요. 그중 하나가 학원에 등록하는 거예요. 주로 실용음악 학원 내에 작사 갈래가 있는데, 여기서 프로 작사가가 되기 위한 이론 수업을 받게 돼요. 실제로 작사해 보려면 데모음원이 필요한데요. 실용음악 학원은 여러 기획사와 관계를 맺고 있어서 비교적 데모를 구하기가 쉬워요. 데모 한 곡을 두고 작사가들에게 비딩이 들어가고, 거기서 선정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작사가 크레딧을 갖게 되는 거죠. 학원에 등록하는 게 작사가가 되기 위한 첫째 경로라면, 둘째는 음악 관계자와 관계를 맺는 거예요. 사실 음악계는 편협하고 고여 있는 세계거든요. 요즘은 작곡가가 직접 작사하는 경우도 많아서 경쟁이 더 치열해졌어요. 프로 작사가 사이에서의 경쟁도 그렇고, 기존 작사가와 새로 유입된 작사가 사이의 경쟁도 그래요. 그래서 음악 관계자를 알고 있으면 여러모로 유리해요.

 

아이돌 노랫말을 쓰고 있잖아요. 아이돌 가사에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특색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이게 아이돌 노랫말의 특징이에요. 추상적이고 모호하죠. 또, 아이돌 가사는 콘셉트가 좀더 확실해요. 자연스럽게 그 콘셉트를 구현할 아이돌의 캐릭터가 가사에 많이 드러나죠. 어떤 가수가 부르느냐에 따라 피해야 할 문체가 있어서 가수를 파악하는 일도 중요해요. 순수하고 맑은 어린 가수에게 퇴폐적이고 파괴적인 가사를 줄 수 없으니까요. 가수가 어떤 서사로, 어떤 세계관으로 이번 앨범을 구성할지, 그걸 어떻게 무대로 표현할지, 퍼포먼스를 어떻게 할 것이며 거기 어떤 음악을 쓸지… 이런 것들을 총체적인 기획처럼 묶어 생각해야 해요. 아이돌 가사는 어떻게 보면 좀더 극적이고, 미술적이고, 콘셉트적이에요. 서사가 확실히 존재하는데 그 서사가 계속 성장해 나가거나 뭔가 변화해 나가는 양상을 띠고요.

 

이렇게 명쾌하게 아이돌 가사를 정의해 주시는데, 10여 년을 대치동에서 일한 입시 학원 강사였다고요.

20대 내내 경제적 가장이어서 안정적인 경제 활동을 해야 했어요. 제 꿈은 사실 작가였어요. 글을 쓴다는 건 집중력이 필요한 일인데 생활에 불안이 좀 없어져야 집중할 환경이 되더라고요. 근데 저는 20대 때 생활에 불안이 되게 많았거든요. 그래서 작가 수련을 하기는 어려웠어요. 불안을 없애기 위해 돈을 벌자 싶었죠. 잘하는 걸 찾다 보니 가르치는 걸 좀 잘하는 것 같아서 대치동을 찾았어요. 경제적 불안을 없애려면 5년에서 10년쯤은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10년을 일하다 보니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 전임 강사까지 되었는데요. 번아웃이 와서 퇴사를 결정했어요. 단 일주일도 쉬지 않고 5년 넘게 일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심하게 소진된 거죠.

 

아이고….

그 당시에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호르몬 이름이 ‘코르티솔’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게 여성 호르몬을 방해한다는 사실도요. 의사 선생님이 잠을 많이 자란 조언을 자주 해주셨는데도 바로 일을 포기하지 못했어요. 성장하고 싶었고, 좀 잘해 보고 싶었고, 빨리 경제적 독립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때 불안을 안고서라도 무모하게 수련했으면 지금 작가로서, 혹은 작사가로서 더 빨리 자리 잡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해요. 그래도 전 강사로 일하면서 사람을 대하는 기술을 많이 익혔어요. 특히 학생들 가까이에서 그들 언어와 고민을 지켜보는 게 작사에 도움이 많이 됐거든요. 아이돌 노래의 타깃은 주로 10대니까요. 퇴사하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했고 이젠 그 설계도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아요. 강사로 일하거나 퇴사했을 때에 비해 지금이 훨씬 안정적이거든요.

원래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는데 작가의 범주도 생각하기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작사가도 어떻게 보면 작가일 테고요.

점점 더 애매해지는 것 같아요. SNS만 봐도 글 잘 쓰는 분들 정말 많잖아요. 순수한 의미의 작가와는 그 규격이나 통용되는 어투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새로운 문법으로 글 쓸 수 있는 플랫폼이 많아졌다고 봐요. 브런치나 블로그 같은 통로도 그렇고요. 제가 20대 시절 생각한 작가는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작가라는 직업에 빠져들 때쯤 입시학원 강사직을 시작한 거여서 작가의 정의가 모호한 채로 퇴사할 때까지 그 꿈이 이어진 것 같아요. 막상 퇴사하고 집중해서 생각해 보니 20대 때 생각한 작가랑 지금 생각한 작가는 좀 달라져 있더라고요. 지금은 언어에 관여하는 사람을 다 작가라고 생각해요. 감수자, 번역가, 에디터… 모두요. 

 

지금은 작가의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세요?

어느 정도는요(웃음). 근데 전 지금 작사가라고 불리는 게 좋아요. 사람들이 절 작사가라고 인식하는 게 좋고, 또 그게 저에겐 중요하거든요. 재수생일 때 제일 서러웠던 게 고등학생도, 대학생도 아니라는 거였어요. 저를 대변할 특정한 사회적 용어가 없어 혼란스러웠죠. 퇴사 이후 진로 탐색을 하면서 사람들이 하는 거 저도 다 해봤는데요. 그때 아무리 여러 일을 해봐도 “뭐 하는 분이세요?” 하면 특정하게 “뭘 합니다.”라고 말하기가 어렵더라고요. 명료하게 저를 한 단어로 설명하고 싶다는 갈증이 점점 더 커졌고, 그래서 작사가가 된 이후로는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었고, 이 직업으로 제 삶을 더 디깅하고 싶었거든요.

 

2년 동안 직업 탐색을 하면서 어떤 정체성을 발견했어요?

하나는 호기심, 둘째는 관찰과 탐구예요. 저는 뭔가 궁금해지면 그 분야를 공부하듯 파고들어요. 그래서 위키피디아를 되게 좋아해요(웃음). 처음엔 ‘나는 왜 이런 걸 좋아하지.’라고 생각했고, 주변에서도 ‘너는 뭘 자꾸 그렇게 찾냐.’고 많이들 그랬어요. 뭐 하나 꽂히면 프린트를 잔뜩 해서 탐구하고 그랬거든요. 처음엔 이런 성향이 좋지 않다고도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이게 진짜 저 같더라고요. “나는 이걸 좋아합니다. 이건 제 속성입니다.” 하고 명료하게 정리하고 글로 써보니까 그제야 저를 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엔 어떤 게 있었어요?

언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어떤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누구나 ‘아하!’ 할 수 있는 문장을 좋아했거든요. 위트 있고 재치 있어서 누구나 감탄하는 말들을 기록하는 게 취미였죠. 예를 들면, 한국에선 누군가 물건을 던질 때 “야! 받아!” 그러잖아요. 근데 영어로 “Think, Fast!” 그러는 거예요. 그 말이 생소한데도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왜 이렇게 말했지?’ 너무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막 찾아봤죠. 생산성도, 큰 쓸모도 없지만 이렇게 소소한 지식을 쌓는 걸 좋아했어요. 대단한 게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즐거움이 있거든요. “야, 이런 말이 있대!” 하면서요. 제가 아는 걸 최대한 재미있게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런 제 성향이 가르치는 일도, 언어에도 관심을 갖게 한 건 아니었을까 싶어요.

요새 주워 담은 말은 어떤 게 있어요?

“어쩔티비?”

 

예?

(웃음) 혹은 “오히려 좋다.”

 

예?

“오히려 좋다, 오히려 좋아.” 약간 정신 승리할 때 쓰는 말이거든요. 원래는 게임 용어예요. 상황이 꼬여서 바라던 결과가 안 나왔지만, 정신 승리를 해야 게임을 지속할 수 있으니까“오히려 좋아.” 하는 거죠. 좀더 쿨하게 인정하고, 쿨하게 대처하고, 빠르게 회복하는 말?

 

생각보다 좋은 말이네요. 그럼 ‘어쩔티비’는….

우리 어릴 때 “반사! 어쩔?” 이런 게 있었잖아요. 딱 그거예요. 초등학생들이 많이 쓴다는데 어른이 따라 하면 티가 난대요. 걔네는 “어쩔티비?” 하고서 그걸 응용해선 또 이것저것 말을 만들고 갖다 붙이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관심은 가는데 따라 쓰지는 못해요(웃음).

 

집에 가서 용례를 좀 찾아봐야겠어요. 혼란스럽네요(웃음).

런 말을 들으면 ‘왜 이런 말을 쓸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해요. 언어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지지를 않더라고요. 서브컬처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을 보는 것도 좋아해요. 똑같은 말인데도 표현법이나 발상이 다르거든요. 이런 걸 이해하는 건 작사에도 도움이 돼요. 그들이 모두 음악의 소비자일 테니까요.

 

언어가 취미라는 건 결국 일과 연결되는 거네요.

그래서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작사가”라는 소개가 가능한 것 같아요. 저에겐 즐거운 일을 하는 시간 자체가 취미거든요. 여가가 생기면 내가 즐거운 걸 하고, 그 시간 동안은 즐겁고 재밌으면 그걸로 족해요. 요새는 취미로 수익이 창출되는 경우도 많은데요. 저에게 우선순위는 돈보다도 이걸 할 때 너무 행복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다, 인 것 같아요. 몰입감이 선사하는 즐거움, 내적인 충만감이 저에겐 되게 커요. 그걸 충족해 주는 게 언어인 거죠. 정확히는 말을 수집하는 즐거움인데, 사실 말뿐만 아니라 수집 자체를 굉장히 좋아해요.

또 어떤 걸 수집해요?

진짜 이상한 거요(웃음). 전 세계 설탕을 수집해요. 여행 다니면서 일회용 설탕을 발견하면 싹 모으고 있죠. 또 해외에서 받은 영수증이나 종이 쪼가리들, 한국의 오래된 만화 잡지도요. 저 옷방에 《르네상스》라는 만화 잡지가 빼곡하게 꽂혀 있어요. 심지어는 사탕 껍데기도 모아요(웃음). 상자에 담아 보관하기 시작했는데 상자 개수가 벌써 여럿이에요. 어릴 때 짱구라는 캐릭터를 되게 좋아했는데, 그 캐릭터가 새겨진 밀크캔디가 있었거든요. 그걸 한 세 봉지 사서는 학교에 가져가서 애들한테 나눠주곤 했어요. 포장 뜯는 법을 알려 주면서요. “절대 이렇게 뜯으면 안 되고, 여기를 이렇게 뜯어서 먹고 껍데긴 나한테 줘.” 그거 아직도 다 갖고 있거든요. 나중에 진짜 은퇴하면 제 수집품을 완성된 컬렉션으로 만드는 게 목표예요. 온전히 취미만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는 거죠.

 

일도 10년, 직업 탐색도 2년, 수집도 어릴 때부터…. 뭔가를 꾸준히 하는 걸 좋아하나 봐요.

좀 집요하죠? 좋아하는 것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편이에요. 좋아하는 걸 발견하면 배신하지 않으려고 되게 애를 써요. 이것저것 하는 게 많으니까 엄마가 걱정하기도 해요. 엄마도 늘 일하면서 살아오신 분이라 힘들까 봐 걱정하시는 거죠. 예전에는 여자가 손재주가 좋으면 힘들다고들 했잖아요. 근데 엄마 시대 때는 바깥일을 잘해도 가사가 오롯이 여자 몫이었으니까 힘들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근데 지금은 여자가 주체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고, 그걸 당당하게 보여줄 방법이 더 많아졌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개선해야 할 게 많지만 그걸 인지한다는 점에서 일이 많은 건 좋은 게 아닐까요?

 

지금 말하는 일이 수익을 벌어들이는 일만은 아닌 것 같아요.

맞아요. 제가 말한 일은 취미도 포함되는 거예요.

 

취미 생활을 쉼이 아니라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쉬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비행기 모드. 다 꺼놓는 거죠. 사실 지금 저는 강제적으로 비행기 모드를 해놓을 필요가 있어요. 취미 생활을 하는 데도 에너지가 필요해요. 내적 에너지가 분출하면 아드레날린이 쏟아져서 잠을 잘 못 자게 되거든요. 그 균형을 맞추는 걸 이너피스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제가 학원 수업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게, 밤 10시, 11시까지 수업을 하고 돌아와도 텐션이 낮아지지 않는 거였어요. 텐션을 잔뜩 끌어올려서 강의했으니까, 그걸 낮추려면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공황 같은 걸 느끼고 번아웃이 온 거예요. 지금 제 삶에서 중요한 건 에너지의 균형이에요. 작사도 고농축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일이라 일할 땐 에너지 상태가 높아져 있거든요. 휴식할 땐 이 모든 걸 내려놔야 하는데 밸런스를 조절하려면 방법이 필요했죠.

 

방법을 찾았어요?

네. 몇 가지가 있는데 개중 하나가 캐럴이에요. 저는 캐럴을 1년 내내 들어요. 지금도 틀어두었는데, 연말연시라서가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면 곧장 캐럴을 틀거든요. 루틴 하게 듣는 거죠. 자기 전엔 재즈 캐럴을, 아침에는 빈티지 클래식 캐럴을 듣는 편이에요. 항상성 같은 거죠. 이걸 제대로 행하면 지금 제가 제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종의 각성인데, 저를 깨워주는 각성이 아니라 저를 잠재우는 각성인 거예요. 

 

캐럴은 비행기 모드의 배경 음악이네요.

맞아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걸 듣던 시절이 생각나곤 하잖아요. 저에겐 가장 포근하고, 아늑하고, 편안한 심상을 주는 음악이 바로 캐럴이에요.

 

나를 위한 굉장한 발견 같아요.

고민하고 생각하며 알아낸 거죠. 저는 다들 이런 걸 알아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나를 계속 탐구해야 할 것 같아요.

이런 건 SNS에 표현할 수 없는 속성이거든요. 내적인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어서 전시하기 쉽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고 외부를 인식하면 깨져버리는 것 같아서요. 남을 생각하면 온전한 내 것을 찾기가 힘들어져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걸 찾고 싶다면, 내가 이걸 좋아한다는 걸 아무도 몰라도 된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해요. 이렇게 말할 기회가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반드시 공유해야 할 필요는 없거든요.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거라면 작은 것도, 부끄러운 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마음맞이

대청소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요. 일인 듯, 취미인 듯한 어떤 것들….

이 오래된 집에 들어오면서 인테리어를 전부 다 새로 했는데요. 재개발이 예정된 곳이어서 제집이 아니어도 뜯어고치는게 자유로웠거든요. 그때 부엌을 특히 신경 써서 고쳤는데, 요리하는 걸 되게 좋아해요. 정확히는 친구나 가족 같은,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거죠. 이렇게 보면 단순한 취미 같지만 시각적으로 예쁘게 세팅해서 딱 내어주는 것, 사진으로 남기고 다시 보는 총체적인 활동을 좋아하는 거예요. 그걸 확실하게 할 수 있는 활동이 있어요. ‘케이터링’.

 

케이터링을 했다고요?

네(웃음). 지인 위주였지만요. 케이터링 이전엔 인테리어가 있었어요. 신혼집을 꾸밀 때 집을 예쁘게 인테리어해서 여기서 사는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고 싶었거든요.

 

어쨌든 그때도 목표는 ‘쓴다.’였네요.

제 이야기를 너무 쓰고 싶은데 학원에서의 저는 너무 ‘노잼’인 거예요. 사실 여행을 간 것도, 인테리어를 한 것도, 케이터링을 시도한 것도 전부 이야깃거리가 필요해서였어요. 좀더 내면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동시에 좋은 이미지도 주고 싶고….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해 여행도 가고, 거기서 영어로 낯선 사람과 대화도 한 거였어요. 그렇게 인테리어 후에는 인테리어 일기를 쓴 거고요. 그게 인기가 좋았죠(웃음). 이게 네이버 메인에도 한 번 떴거든요. 그러면서 유입자가 많아졌고, 활기가 생기니까 그다음엔 무슨 얘기를 써도 재밌게 풀어지더라고요.

 

수많은 취미가 전부 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시작된 거였네요.

맞아요. 그러면서 저에 대해 좀더 디테일하게 알게 되기도 했죠. 저는 요리를 좋아하지만 케이터링은 아닌 것 같다, 같은 거(웃음). 케이터링을 위해 장을 보고, 조리 도구와 재료를 모두 들고 케이터링 장소로 이동하는 게 거의 원룸 이사 수준이에요.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진로를 탐색하면서 2년을 보낸 거네요.

맞아요. 브랜드 네이밍 하는 시간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나 기획자의 역할을 알게 되기도 했죠. 중간에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한 적도 있고… 별걸 다 했네요. 제가 피울 수 있는 모든 싹은 한번 다 피워 보자는 마음으로 2년을 보냈죠. 제 관심이 햇빛이라면 관심을 쏟은 싹만 제대로 자란 거예요. 나머지는 시든 거고요.

 

시든 건 어떤 게 있어요?

케이터링도 그렇고, 제가 인테리어 관련된 라이프 스타일 블로그를 계속해 왔잖아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저는 자연스럽게 뭘 판매하는 브랜드를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가재도구나 살림살이 같은 거. 근데 저는 수집은 열심히 해도 판매는 자신이 없어요. 물건 파는 건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았고, 유튜버도 금방 끝난 취미였어요. 브이로그를 찍어서 몇 개 업로드했는데 촬영하고 편집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나중에 전문 인력을 구하게 되면 그때 다시 해볼 수 있으려나요(웃음). 아, 에디터 강의도 들었는데 이것도 제 길은 아니더라고요. 신입 에디터가 되기엔 제 나이가 적지 않았고요.

나를 위해 시간을 쏟는다는 느낌이 드는데, 사실 사람들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는 건 남을 위해 시간을 쓰는 거잖아요. 관계에도 집중하는 것 같아요.

성격 유형 검사를 하면 보통 외향형이 나오는데, 외향형으로 하루 살면 내향형으로 사흘은 살아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게 제 밸런스를 유지하는 방법이더라고요. 사람을 만나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유형이 있는데 저는 내향적인 캐릭터가 모은 에너지를 외향적인 캐릭터가 방출하며 균형을 맞추는 거죠. 충전하고, 쓰고, 충전하고, 쓰고를 반복하는 거고요. 근데 이걸 방출하지 않으면 너무 외로워요. 저는 프리랜서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꼭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도 이 집에 함께 사는 분이 있잖아요. 남편분이 케이팝 프로듀서 시라고요.

맞아요. 10년 연애하고 벌써 결혼 5년 차가 됐네요. 대학생 때 소개팅으로 만났는데, 이 친구는 실용음악과 작곡 전공생이었고, 저는 영문불문학 전공생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정서상으로 되게 잘 맞았어요. 좋아하는 건 좀 달라도 싫어하는 게 비슷했죠. 저는 옛날부터 음악 듣는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었거든요. 음악 얘기가 잘 통하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고…여러 방면에서 정서적인 교류가 가능했어요. 거기서 오는 즐거움이 긴 관계를 만들어준 것 같아요. 제가 안정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서인지 다른 사람도 만나봐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들더라고요. 20대 때는 일하느라 바빠서 새로운 연애를 꿈꿀 시간도 없었고요(웃음). 음악을 한 10년 동안 쭉 해온 친구다 보니까 그걸 곁에서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저도 작사가의 꿈을 키우게 됐어요. 고민도 늘 함께했기에 작사가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자마자 바로 데뷔할 수 있었고요.

 

연인 사이는 취미 생활을 같이하는 관계 같기도 해요.

진짜 그렇죠. 저희도 취미가 비슷하거든요. 시기마다 다르긴 했는데, 어릴 땐 ‘핫플레이스’보단 아직 유명하지 않은 사랑방 같은 델 찾아서 거기만 꾸준히 다녔거든요. 그런 공간에서 각자 좋아하는 책 읽고, 음악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죠. 아, 영화를 정말 많이 봤어요. 함께 본 수백 편의 영화 티켓들도 저기 다 모아놨어요(웃음). 운동도 늘 함께했는데, 돈이 없을 땐 한강 걷기라도 꼭 시간 내서 같이 했어요. 사실 취미라는 게 거의 돈이잖아요. 그래서 20대 때는 특별한 취미를 갖기가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지금만큼 재미있는 게 그땐 없었던 것 같고요.

 

운동도 좋아하시죠. 마음 단련을 위해 수영을 한다고 했어요. 수영으로 어떻게 마음을 정돈할 수 있어요?

수영을 한 지 인제 3년 정도 됐는데, 그전까지는 완전 맥주병이었거든요. 너무 재미없고 싫은 거라 도전할 생각도 안 해본 운동이었어요. 근데 우연히 뚝섬 한강 수영장에 친구 따라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잠수한 순간 들리는 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뽀글뽀글 소리가 주는 안정감이 굉장했어요. 잡생각이 하나도 안 들고 편안해지더라고요. 거기 엄청나게 심취해서 매일 아침 뚝섬 수영장엘 갔어요. 개장하는 두 달 동안 아침 9시마다 수영복 위에 원피스 입고, 마실 거랑 돗자리를 들고 날마다 찾아간 거죠. 두 시간 정도 수영하고 일과를 시작하는 게 루틴이었어요. 햇볕에 타서 피부가 까매졌는데 그것도 좋고…. ‘지금 내 삶이 너무 만족스럽다.’고 그때 제대로 느껴본 것 같아요. 수영 덕분에 일상의 리듬감을 실감하면서 제 삶이 정확해졌다고 느꼈어요. ‘할까, 말까’의 마음이 아니라 고민 없이 하게 되는 거, 당연히 하고 싶은 거, 그런 마음이 좋았어요.

예림 님의 취미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 같아요. 우리 삶에서 취미가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취미의 영단어 Hobby랑 Happy는 생긴 게 비슷하잖아요. 취미는 저에게 행복이에요. 근데 영어에서의 Hobby랑 한국어의 취미가 정확히 같은 의민 아닌 거 같아요. 우리에게 ‘넷플릭스 보기’는 취미가 될 수 있잖아요. 근데 Hobby로는 어울리지 않거든요. 우리가 말하는 취미는 특기와는 구분되는 영역이지만, Hobby는 취미에 특기를 더한 느낌이랄까요. 

 

음… ‘잘’해야 하는 거네요.

좀더 개인적이고 사적인 뉘앙스를 강하게 넣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영어로, 우리가 생각하는 취미가 뭐냐고 물으려면 “What Is Your Hobby?”가 아니라 “What Do You Do Usual In Spare Time?”이라고 해야 한대요. 영어에서 Hobby의 뜻을 찾아보면… 제가 또 공부를 했는데요(웃음). 사전적 의미가 “An Activity That A Person Does For Pleasure When Not Working.”이에요. ‘일하지 않을 때 즐거움을 위해서 이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는 활동’인 거죠. 개인적인 의미를 강하게 띠는 데다 결코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게 아닌 거예요. 저 역시 취미를 Hobby에 가깝게 규정하는 것 같아요. 단순히 여가에 즐거움을 찾는 게 아니라, 좀더 내게 영향을 미치게끔 작동하는 활동을 취미로 삼는 것 같거든요. 물론 저도 누워서 짤방이나 유튜브도 보고, 생각 없이 검색도 하고 그래요. 근데 이걸 취미라곤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그러네요. Hobby의 기준으로 본다면 “취미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충분히 있겠어요.

음… 그래도 저는 누구에게나 취미가 있을 거라고 봐요. 앞서 이야기한 ‘남에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요? 그게 결국 취미일 것 같아요. 취미를 좀더 세분화해서 정의 내려본다면 분명 내 취미라고 말할 만한 활동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여가를 결코 휴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단 생각이 들어요.

여러 가지를 해보고 싶단 욕심도, 그걸 다 내면화 하고 싶단 욕심도 늘 있어요. 그러면서도 완전히 잠만 자고, 완전히 쉬고 싶다는 욕구도 있죠. 그런데 또 사람이 어떻게 ‘완전히’ 쉴 수 있을까 싶기도 해요. 완전한 휴식이라는 게, 저는 다른 생각 안 하는 시간이라고 보거든요. 잡생각 없이 있는 시간인 건데, 책 읽을 땐 남의 문장에 빠져들어 가지만 사실 거기서 헤어 나오면 또 내게 어떤 작용을 하게 되니까 완전히 쉬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요.

 

취미를 통해 계속 성장해 나갈 것 같아요. 오늘의 고예림과 내일의 고예림은 또 다를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나를 한 구절 노랫말로 표현해 볼까요?

와, 뭐가 있을까요?

 

오늘 눈 뜨자마자 뭐 하셨어요? 캐럴 듣기?

네. 캐럴 듣고(웃음)…. 다음 주면 이사해서 오늘이 이 집에서 마지막 인터뷰거든요. 이사 준비 때문에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한데, 그래서인지 오늘 대화가 더 좋았어요. 머릿속에 어질러놓은 제 생각들이 좀 정리된 것 같아서요. 대화를 위해 생각도 정리하고, 손님맞이를 위해 집도 정리했으니 오늘의 가사엔 ‘대청소’라는 단어를 넣고 싶네요.

새해에 안녕을 보내요

작사가 림고가 추천하는 2022년 새해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귀 기울이는 게 오늘의 할 일!

[Parsley, Sage, Rosemary & Thyme]
Simon & Garfunkel

영국 전통 민요를 스카버러 페어Scarborough Fair라고 하는데 국내에서 이 장르 대표 뮤지션으로 알려진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앨범 [Parsley, Sage, Rosemary & Thyme]을 추천해요. 이 앨범은 중세 영국민요 특유의 음률과 아름다운 멜로디가 매력적이에요.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노랫말까지 더해 많은 사랑을 받았지요. 앨범명이기도 한 파슬리, 세이지, 로즈메리, 타임은 서양에서 많이 쓰는 허브 이름인데 각각 승리, 미덕, 영원한 사랑, 용기를 뜻한다고 해요. 새해 결심을 고민할 때 배경 음악으로 들어보세요.

‘We Are All Muse(feat. 백예린)’
The BLANK shop

새해에는 어쩐지 경견해지잖아요. 그럴 때 어울리는 곡이에요. 서정적인 사운드 위로 백예린의 감성 짙은 목소리가 더해져 ‘우리는 결국 모두 뮤즈’라는 메시지를 전하는데, 여기 귀기울여 들어 보세요.

‘Ylang Ylang’
FKJ

뉴 프렌치 하우스New French House장르의 시초 FKJ의 ‘Ylang Ylang’은 ‘꽃 중의 꽃’이란 꽃말을 가진 일랑일랑에서 따온 단어로, 이 앨범을 은유하는 표현이라고 해요. 덩그러니 피아노를 치는 아티스트를 둘러싼 초록색 배경과 잔잔함을 머금은 음악에는 일상을 낭만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어요. 특히 우유니 소금사막을 배경으로 만든 라이브 클립은 동이 튼 새해 아침에 썩 어울릴 거예요.

‘라일락’
아이유

“내 마음 한켠 비밀스런 오르골에 넣어두고서 영원히 되감을 순간이니까 우리 둘의 마지막 페이지를 잘 부탁해 어느 작별이 이보다 완벽할까” 가사가 참 아름다운 곡이에요. ‘젊은 날의 추억’이란 라일락 꽃말처럼, 지난 한 해를 멋지게 추억하며 보내 주고, 동시에 봄바람처럼 불어올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나를 위한 곡이에요. 찬 바람이 부는 새해지만 마음에는 맑은 기운의 꽃향기가 스며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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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