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자와 불탄 집 그러나 우리는 아직 젊음

친구 많은 K씨의 일상

모든 일엔 끝이 있다. 그 끝을 생각하며 슬퍼할지, 그러거나 말거나 청하를 마실지, 선택은 자유다.

지난밤 잠만자(별명) 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퇴근 후에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잠옷을 입고 레티놀 크림까지 바른 후엔 아무것도 상대하기 싫어지기 때문이다. 몇 번의 부재중 알림 끝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왜 전화 안 받아? 차단했어? 내일 머해? 약속 있어? 나 만나. 내가 갈게.” 잠만자 씨는 막무가내였다. 이런 식의 구애는 곤란한데, 하고 생각하다가 무척이나 간절해 보였으므로 우리는 다음 날 회전초밥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회전초밥집에서 만난 잠만자 씨는 평소와 달리 점잖은 모습이었다. 평소 날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유난히 차분한 얼굴을 보니 요즘 많이 힘든가 싶었다. 우리는 회전 레일에 면한 부스에 앉아 청하를 시켰다. 잠만자 씨는 레일의 역방향으로 앉는 바람에 어떤 초밥이 오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자리를 바꿔 달라는 의미 같았지만, 나는 모른 척 장국을 들이켰다. 잠만자 씨는 한숨을 쉬며 간장에 와사비를 섞었다. 검은색이 녹색이 될 정도로 섞었다. “그렇게 먹다가 곧 죽겠어.” 잠만자 씨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불이 났어.”, “응?”, “집에 불이 났다고. 칫솔도, 구두도, 브라자도 다 타서 없어졌다고.” 잠만자 씨는 잔에 든 청하를 원샷 하고는 자신이 촬영한 불탄 집을 보여줬다.

사연인즉, 일을 하던 중에 집에 불이 났으니 당장 오라는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경찰과 소방관, 국과수가 다녀간 그의 집(이었던 공간)에는 억지로 뜯어낸 현관문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고 했다. 충전해 둔 근막 마사지기가 누전되어 불타올랐고, 창문을 닫아놓은 바람에 집과 건물 복도 가득 연기가 찼고, 건물의 모든 사람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거였다. 청소 업체를 불렀지만, 전소 판정을 받아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다고 덧붙였다. 담담하던 잠만자 씨가 몇 번이나 울컥하기에 “괜찮아?” 하고 물었더니, “와사비가 매워서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나저나 전소된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니, 나는 놀랍고 신기한 마음이었다. 누구도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위로했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 그만둘까 싶어. 지쳤어. 정말 지쳤어.” 나는 습기 찬 그의 목소리가 단지 와사비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가만히 입을 닫았다.

잠이 많은 잠만자 씨는 삼십 대 초반의 헤어 디자이너다. 헤어 디자이너는 끈기 없던 그가 유일하게 오래 일하는 직업이었는데, 의외로 승승장구하는 바람에 불과 몇 년 만에 한 매장의 오너가 됐다. 자기가 짱인 줄 아는 타입이랄까. 바로 그런 기세가 잠만자 씨를 빠른 기간에 높은 위치까지 올려놓은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 중간자 급의 실무자를 할 만한 연차에 대표가 되었으니 축하할 만한 일이었지만, 나는 걱정이 앞섰다. 기술자로서 일을 잘하는 것과 조직을 잘 관리하는 것은 다른 방향의 일이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위가 약한 잠만자 씨는 거의 매일 위장약을 달고 살았고, 스트레스로 살과 근육이 쭉쭉 빠져갔다. 하루하루 건강과 멘탈을 잃던 그에게 이번 화재 사고가 일종의 트리거가 된 셈이었다. 하소연하던 그는 드디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울어.” 나는 그의 입에 참치 뱃살 초밥을 넣어주었고, 그는 맛있다며 조금 씹다가 또 울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고, 가슴에 찬 울음 풍선의 바람이 빠지자 잠만자 씨는 말했다. “허무해. 힘들게 쌓아놓은 것들이 당장에 끝날까 봐 무서워. 오빤 안 그래?” 나는 가만히 레일 너머 초밥 요리사를 지켜봤다. 새하얀 요리사 옷을 입은 그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으로 밥알을 쥐고 와사비와 생선을 올린 다음 부드럽게 모양을 잡아 접시에 얹었다. 참 쉽고 단순한 동작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쉬운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까? 그는 어쩌면 일본의 어느 시골 마을, 괴팍하고 머리가 만질만질한 초밥 장인에게 “빠가야로!” 같은 모진 욕을 들어가며 기술을 전수받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거겠지. 하지만 그에게도 끝이 있을 것이다. 피겨퀸 김연아에게도, 50년 전통 해장국집 할머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온다. 그래서 나는 겨우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글쎄, 나는 귀신의 집이 더 무서워.” 커리어가 끝나는 일보다 귀신의 집이 더 무섭다고 말하기까지, 나에겐 기억나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배낭여행에서 만난 독일 사람이었다. 

어느 저녁,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테이블에 모여 맥주를 먹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독일에서 온 카센터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스스로 안식년을 주는 중이라고 했다. 한국인 청년 하나가 당신은 얼마나 일했기에 안식년을 갖느냐고 묻자 그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3년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안식년을 주는 거야.” 돌아가면 다시 취직할 수 있느냐고 재차 묻자 그는 대답했다. “일은 다시 구하면 돼. 그게 무엇이든.” 이번엔 미국인 할아버지가 모든 독일인이 당신과 같은지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모든 독일인을 대표하진 않지만, 적어도 많은 독일인이 일보다 일 바깥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 

한 명의 사람은 딸기맨(별명) 씨로, 사진가였다가 경영자였다가 딸기 농부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황희 정승 시대의 소처럼 일했다. 일터에서 죽는 걸 삶의 유일한 목표로 여기는 사람 같았다. 카테고리가 다른 직종으로의 전직은, 전의 기술들이 더는 쓸모없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수십 년의 경력을 뒤로하고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게 두렵지 않았냐는 물음에 그는 말했다. “먹고살려면 뭐든 하게 된다.” 독일맨 씨와 딸기맨 씨, 각자 일을 대하는 생각은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든 일에 끝이 있음을 안다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삶에서 지켜야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 

나는 올해로 12차 에디터다. 다른 직업이라면 아직 멀었다고, 더 성장해야 한다고 다그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매거진 바닥에선 나이가 들수록 신선함이 떨어지는 것만 같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먹거리 같달까. 마트 진열장 앞쪽에 진열되어 있지만, 소비자는 결국 진열장 안쪽에 숨긴 최신 제품을 고른다. 아, 정말이지 자본주의는 구제불능이다. 나 역시 에디터 이후를 생각하지만,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한 시인의 말처럼 “인생은 이상하게” 흐르는 법이므로,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삶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 이야기를 한참 듣던 잠만자 씨는 왠지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흐르는 콧물을 닦으며 레일 위의 초밥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잠만자 씨는 참치인 줄 알고 골랐는데 사실은 육회였던 정체불명의 초밥을 내 앞으로 밀면서 말했다. “나만 대책 없이 사는 게 아니었네. 그래도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야.” ‘하향 비교’라고 했던가. 인간은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는데, 아마도 잠만자 씨에겐 내가 더없이 좋은 상대였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린 청하를 마셨다. 세상 끝난 것처럼 우울했다가도 배가 부르면 기분이 좋아버리는 우리는 아직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직은 더 방황해도 괜찮은 쪽으로 생각할 것. 나는 기꺼이 그가 건넨 육회 초밥을 씹으며 말한다. “이번 만남이 도움이 됐다면 초밥값은 너가 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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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