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볼 수 있을까요?

당신이 쓰고 그리고 이어 붙인 어느 날의 기록들을.

2023년 6월, 정고이너사이드 정정희

일본 오사카와 오키나와에 다녀왔어요. 여행지에서도 평소처럼 하루를 기록하고 싶어 남긴 일기입니다. 요즘은 디지털 방식으로 간편하게 기록할 수 있으니, 손으로 직접 쓰고 붙이며 한 페이지를 채우는 과정이 수고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휴대폰 메모장이라면 3분 안에 완성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글씨를 꾹꾹 눌러쓰고, 나의 기분을 표현하는 스티커들과 영수증을 오리고 붙이다 보면 그날의 하루가 선명하게 느껴져요. 나만의 취향이나 일상의 경험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고요. 기록은 빠르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진정한 나를 잊지 않게 붙잡아 두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 도구
펜과 스티커, 영수증, 테이프.

2022년 12월, 프롬드로잉 연수

오랜만에 떠난 경주로의 여행이었습니다. 월정교에서 본 목이 긴 새들과 고양이, 향이 좋은 카페에서 마신 커피와 풍경, 볼 때마다 아름다운 첨성대 그리고 박물관의 재미있고 귀여운 유물들까지. 보고 느낀 것들을 조금씩 그리고 영수증이나 스티커, 사진을 곁들여 기록했습니다. 좋았던 순간들이 아주 오래 남길 바라면서요. 콜라주 작업을 즐겨 하는데, 순간을 기억하기에 가장 다채롭고 확실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내가 만든 작은 여행집이라고나 할까요? 기록을 일상인 동시에 작업처럼 생각한다면, 마침내 차곡차곡 쌓였을 때 그 자체로 멋진 작품이 되어줄 거예요.

기록 도구
페이지를 엮어 만든 노트와 필기구, 가위와 풀, 포토 프린터.

2015년 3월, 에디터 이명주

독학으로 재수를 준비할 때예요. 무척 외롭고 겁이 났던 때이기도 합니다. 수능이 뭐 별거냐고 말들 하지만, 그때는 별거인 줄 알았거든요. 고요하고 작은 독서실에 홀로 앉아 있으면서, 매달 마지막 날에는 저 자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른 누군가의 말보다 나 자신을 향한 믿음이 필요했으니까요. 거창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다 말하고, 라디오 작가나 방송 작가가 된 상상을 했습니다. 좋아하는 가수를 찾아보고 친구들의 응원 문자에 보답을 약속했어요. 고맙다는 말을 참 많이도 적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언제나 기록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나에게 위로와 응원을 전하는 도구였네요.

기록 도구
나에게 하고 싶은 말들과 0.5mm 펜.

2021년 4월, 문구인 김규림

한창 날씨가 좋아 주말에 캠핑 의자와 가방 하나 든 채로 한강에 갔어요. 날이 좋으면 그냥 무엇이라도 쓰고 싶어져요. 이 기록도 지극히 평범한 날의 기록 중 하나인데요. 특별하지 않은 순간들이 삶의 족적처럼 촘촘히 남으면서 저에게는 큰 의미를 만들어줘요. 기록이라는 행위는 한숨 돌리는 일과 비슷한 것 같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단 그냥 여유가 있을 때 참았던 숨을 ʻ파-’ 하고 뱉는 거죠. “나는 손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자주 말하곤 하는데, 숨 내뱉듯 쓰다 보면 그제야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록 도구
포인트오브뷰의 핸디 노트와 자주 쓰는 만년필.

2010년 7월, 식물세밀화가 이소영

전 세계 중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한국 특산 식물 ʻ개느삼’이라는 종이 있습니다. 당시 이 식물에 대해 제대로 된 학술 도해도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를 기록하고자 관찰하여 스케치했습니다. 잉크펜으로 그린 이유는 식물 세밀화를 처음 그릴 때 배운 방식이라 익숙하고 좋아합니다. 저에게 기록이란 일상과도 같아요. 일을 하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거나 마트에서 과일을 고를 때도 식물을 만나면 사진을 찍고 메모장에 이름을 적어둡니다. 제 기록은 이 땅에 이 식물이 존재한다는 증명이자, 지구에는 인간 외에도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다고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기록 도구
마루 펜촉을 끼운 펜대와 잉크.

1980년대 봄, 작가 남하

이 기록은 아내와 젊은 시절 나눈 손 편지입니다. 자주 만날 수 없던 시간과 공간에서 편지를 통한 연결들은 참 소중했습니다. 지금도 꾹꾹 눌러쓴 질감의 언어들은 우리들 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해 주고, 진심을 전달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니 조금은 어색하지만 그 시절 진심과 정성을 다한 마음 고백이지 않았나 싶어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항상 곁에 있음과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순간들의 고백도 되겠네요. 공간은 수직으로 흐르고 시간은 수평으로 흘러갑니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만날 수 있는 것은 기록이 있고 기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록은 시간이고 기억이에요. 모든 것은 기억할 수 있어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록 도구
진심을 풀어낸 언어와 편지, 필기구.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에디터 이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