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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것만 같아도 여전히 모르는, 그 쌉싸름한 인생의 맛.
사치코의 가족은 일본의 시골 마을에 산다. 이들이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녹차를 홀짝이는 건, 가족 전체의 취미도 특별히 마련한 쉼의 시간도 아니다. 그저 매일 밥을 먹고 이를 닦는 것처럼, 녹차는 가족의 일상을 이루는 작은 조각이다.
어느 오후, 툇마루에 앉아 있는 막내 사치코의 손에 잔이 없다. 엄마가 따라준 녹차를 마시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커다란 걱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거대한 사치코의 환영이 가까이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도, 방에 앉아 있을 때도 커다란 자신이 아이를 따라다닌다.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괴로운 사치코. 차 안 마실 거냐는 엄마의 말에 부엌으로 향하는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며칠 뒤 사치코는 철봉 연습을 시작한다. 피 흘리는 남자의 환영이 삼촌을 따라다녔을 때, 삼촌이 철봉 돌기에 성공한 이후로 환영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버려진 놀이터에서 손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로 연습하지만, 성공하긴 쉽지 않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이른 새벽부터 놀이터로 향해도 철봉에서 자꾸 떨어질 뿐이다. 누구에게 설명하기도 어렵고, 자신만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을 마주한 사치코. 매일 마시는 녹차의 맛처럼 씁쓸하고 오묘할 뿐이다.
쌉싸름한 인생의 맛은 사춘기를 지나는 오빠 하지메에게도 찾아온다. 말 한 번 못 걸어본 짝사랑 상대가 전학을 가버린 것이다. 그동안 왜 용기를 내지 못했냐며 자책하는 하지메. 짝사랑이 타고 간 기차가 그의 이마를 통과해 지나가고, 그 자리에는 텅 빈 구멍만 남았다. 긴 시간 우린 차에서 떫은맛이 나듯, 오랫동안 조용히 품고 있던 감정은 하지메에게 쓴맛을 안겨주었다.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하지메는 더 이상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사랑은 예상치 못한 순간 찾아오는 법. 새로 온 전학생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날부터 하지메에게는 알 수 없는 열정과 활기가 돈다. 결국 전학생이 가입한 바둑 동아리에 들어가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소년. 좋아하던 친구와 가까워지자 우산 없이 빗속을 달려도 히죽히죽 웃음만 나온다. 며칠 전까지 시무룩하던 하지메는 어디 가고, 뱃속에 커다란 풍선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처럼 날아갈 것만 같다.
떫은 물을 흘려보내고 새롭게 녹차를 우리면, 어린 찻잎의 싱그러움이 다시 찾아온다. 차 맛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다. 그 다양한 면모를 흥미로워하며 우리는 또다시 찻잔을 기울인다. 차를 마시듯 삶을 대할 수 있다면 어떤 시간이든 조용히 머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마냥 어렵지도, 늘 찬란하지만도 않은 이 한 잔의 생을 앞에 두고, 대체 너는 정체가 무엇이냐 가만히 물어보면서.
사치코와 하지메의 할아버지 아키라는 누가 봐도 별나다. 과장된 쿵후 동작으로 가족들을 웃게 만들거나, 아들이 짝사랑에 좌절해 작곡한 노래의 가수가 되어 주기도 한다. 거대한 환영으로 괴로워하는 사치코를 쳐다보다, 사치코가 고개를 돌리면 몸을 숨기는 장난은 그의 일상이다. 아키라의 특이한 행동은 영화 내내 계속된다. 철봉 연습을 하는 사치코를 따라가 몰래 지켜보기도 하고, 며느리 앞에 서서 방금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보라는 요청도 한다. 가족들은 그런 아키라를 익숙하다는 듯 바라본다.
얼마 후 조용히 세상을 떠난 아키라. 할아버지의 방에서 가족들은 각자의 이름이 적힌 스케치북을 발견한다. 철봉 연습에 성공한 사치코부터, 밝은 미소로 길을 걷는 며느리의 모습까지 아키라가 직접 그린 것이다. 가족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담긴 페이지를 넘겨보며, 남은 이들은 작별 전 아키라가 보여주던 행동의 의미를 이해한다.
며칠 뒤 사치코는 다시 철봉을 잡는다. 그토록 성공하기 어렵던 철봉 돌기에 성공한 순간, 거대한 사치코의 환영은 마침내 사라진다. 사치코를 비롯해 가족들이 크고 작게 품고 있던 고민들도 해결되고, 모두가 석양을 바라보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이 가족을 보며 삶이란 따뜻한 작은 잔을 쥐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맛인지 잘 알 수는 없어도, 그 온기를 가만히 느껴보는 것. 녹차를 즐겨 마시는 이 가족에게 시선을 돌려, 내 손에 들린 잔을 바라본다.
글 차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