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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라고스의 적당한 시간’에 있다
‘그 무엇이든 노력하는 건 괜찮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전부 각자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얼마나 꺼낼 수 있느냐는 각자에게 달려있어.’
파로Faro에서 며칠 더 머무르고 스페인 안달루시아Andalusia 지역을 향해 넘어가려던 여정은 호스텔에서 만난 아이를 따라나서면서 확실하게 바뀌었다. 그가 차를 렌트하는 동안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데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이상할 거라는 의심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머리를 묶고 동네 슈퍼로 향했다. 가는 길에서 마주친 원석 가게 아저씨가 “감사감사”라며 인사했고 나는 “봉디아Bom Dia(좋은 아침입니다)”라고 인사했다. 할 줄 아는 포르투갈어는 ‘봉디아’, ‘오브리가두Obrigado(감사합니다)’, ‘차우Tchau(안녕히가세요)’ 세 단어가 끝이지만, 이 단어들로 참 많은 사람들을 웃게 할 수 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올 것 같아서 기분 전환으로 딸기를 샀다. 비 오는 날 수면양말을 신고 커피를 끓이고 토스트기에 빵을 넣어 튀어 오르는 순간 딸기잼을 발라 접시에 놓기 전에 한입 베어 문다. 그동안 하트를 눌러놓은 음악들을 무한 반복하면서 여행 도중에 다 써버린 명함을 다시 만들었다. 그래 봤자 찢어진 종이지만 한 장이던 종이가 조각조각 나눠져서 나로 인해 연결되어 있는 나만의 명함이 된다. 내가 오래전 만들던 천연염색 실로 연결 고리까지 만들었으니 받는 사람에게도 소중했으면.
빨래가 말라가고 비가 그쳐가는 오후 세 시에 밖으로 나와 교회 앞 광장으로 나왔더니 바람이 훨씬 거세졌다. 다리에 힘을 주고 서있는데도 카메라가 흔들리니 저절로 꽃게가 된다. 내 앞을 지나가던 갈매기는 바람에 맞서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결심한 듯 날개를 펼쳤는데 그대로 바람에 떠밀려 가버렸고 그 모습을 보고 엄청 크게 웃어버렸다. 큰 소리로 깔깔대고 웃었는데 근처에 서있던 할머니도 나를 보며 같이 웃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는 또 한참을 웃었다. 가끔은 내가 조신한 여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아무 데나 철퍼덕 주저앉고, 하루 정도는 춥다는 핑계로 머리를 감지 않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가고 그다지 청결하지 않은 숙소와 화장실에서도 잘 지내고 길바닥에서 혼자 신나서 미친 듯이 웃어도 보고. 남들 다 있는 방에서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고 드라이기나 린스 없이도 잘 살아가고 맨발로 호스텔 안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라. 여행을 하다 보니 나를 보게 되고 또 평소에 감사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나의 모든 면을 하나하나 만들어준 사람들.
다음 날 햇살에 기분이 좋아져 빨래를 전부 밖에 걸어두고 쌓인 먼지를 소독했다. 침대 시트도 재정비하고 누워 발가락을 움직여보니 새로 들어온 공기가 스쳐 기분이 좋다. 같은 방을 쓰는 아르헨티나 아이가 추천해준 곳을 향해 걸어보았다. 시기는 가을인데도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햇볕이 뜨거운 오후에는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 해변에서 태닝하는 사람들,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당장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돌아올 때 첨벙 뛰어들기로 다짐하고 계속 걸었다. 과감히 해안 절벽을 따라 걷기로 했다. 평지와 굴곡이 반복되며 다듬어지지 않은 길 위에서, 나의 숨소리와 새의 날갯소리로 채워지는 해안 절벽 위에서, 햇볕의 뜨거움으로 높이를 가늠해보는 길 위에서, 나는 산티아고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멀리서 등대가 보였고 도착하자마자 무턱대고 우뚝 솟은 곳으로 향했다. 바로 옆 언덕에서 보이는 아주 작은 사람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위는 나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문득 어딘가 익숙해서 가방을 뒤적였고, 라고스Lagos 시내에서 한국으로 보낼 엽서를 고르다가 단번에 마음에 들어 챙겨둔 엽서를 꺼내 들었다. 엽서를 눈높이에 맞춰 들자 엽서의 끝을 넘어 그대로 이어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내가 서있는 거구나! 그저 앞만 보고 걸었을 뿐인데! 엽서와 같은 풍경을 아낌없이 보여준 이곳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나도 아낌없는 시간을 보냈다. 아무 계획이 없다는 말은 무책임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걸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마음가짐 속에 있는 믿음의 의미였고 그것을 깨달은 지금 어떠한 고민도 걱정도 사라짐을 느꼈다. 지금처럼 어떤 길을 가게 될지, 길이 아닌 길을 걷다가 다시 돌아오게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지만 적어도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자명自明’의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길을 걸어가며 눈앞의 소중하게 지나가는 모든 풍경들에 감동하고,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모든 것에 반응하며 살고 싶다. 빠르게 지나쳐서 재미없는 시간을 지내야 하는 삶보다 고개를 돌려가며 하나하나를 보며 걷는 삶. 라고스에서 지내면서 나를 스쳐 지나간 풍성한 레몬나무, 나보다 더 빠르게 지나가던 강아지 두 마리, 골목 사이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할머니들의 대화처럼 말이다. 두 시쯤 앉아있던 곳에 여섯 시쯤 다시 돌아와 앉았다. 한 시간이 걸릴 거라던 여정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끝났지만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파도소리가 느릿해지는 지금, 발등 위로 샌들의 그림자가 깊게 새겨져 버렸다. “Little things make big days.” 테라스 벽에 붙어있는 문구가 마음에 든다. 이제는 매 순간 온전히 나를, 풍경을, 시간을, 즐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글 사진 임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