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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송종원
평론가 부부의 책갈피
‘누구’라는 단어는 어딘가 친한 친구의 묘한 별명 같은 데가 있다. 친한 친구를 부르듯 친근하게, 혹은 속 깊은 친구를 부르듯 다정하게, 작가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그의 별명을 생각해보았다.
그녀의 이야기
작가는 누구인가 1
어쩌다 보니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게 된 지 십 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다. 책이 많던 고모 댁이나 근처 친구네로 틈만 나면 찾아가 사촌이나 친구와 놀기보다는 그 집의 빽빽하게 꽂힌 책 가운데 하나를 고르고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벽을 찾아 앉아서 처음 보는 책을 마주할 때의 설렘을 즐겼다. 세 살 때 정도로 추정되는 내 최초의 기억마저도 아동용 책가방과 그림책에 연관한 것이니 나의 형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독서, 혹은 책이라는 물성에 관한 감각들을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반듯하게 줄지어 꽂힌 매끈한 책등을 눈으로 훑으며, 제목만으로 이뤄진 한 편의 거대한 공상에 빠져 허우적대던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무엇이 나를 책의 세계로 이끌었는가를 거듭 자문해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나를 매료시킨 건 책 속의 인물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가장 오랜 시간 집중해서 애정을 갖고 읽어나간 책들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책장 한편에 꽂히게 된 백여 권에 달하는 위인전 세트였다.
위인전에도 역시 한 권 분량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써내는 작가가 있다는 생각까지 미처 하지 못한 어린 나는 책 속 주인공이 들려주는, 그 자신의 이야기라 믿음직한 위인의 일생에 거리감 없이 빠져들었다. 나중에야 물론 전기傳記도 소설에 비할 만큼 허구적인 이야기란 걸 알았지만, 어린 나를 유혹하던 책의 매력은 한 인물의 목소리와 그의 범상치 않은 일생에 관한, 범접할 수 없이 분명하고 단호한 기록에 있었다.그런 독서 경험은 작가는 어딘가 비상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이어졌다. 태생부터 살아가는 과정이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어야만 책 속에 등장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읽음 직한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독서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간접 경험의 세계는 학교에서 숙제로 내주는 독후감 같은 형식적인 글로만 겨우 공유될 뿐이어서 그런 나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지적하고 교정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책의 세계, 작가의 삶에 대한 이상은 점점 부풀어서 결과적으로는 책, 그것을 쓰는 작가와 묘한 거리감만을 키워온 것도 같다.
그 묘한 거리감은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작가라 하면 대개 시인이나 소설가를 지칭하고 내가 쓰는 글은 시와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 작가는 1인칭으로 사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달리 말해 일상에서 흔히 내세워 말하는 ‘나’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체성이 작가라는 이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또 다시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나’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그’의 이야기다. 그는 여자친구의 갑작스러운 자살을 겪고 여자친구가 남긴 유서와 그녀가 마지막으로 읽은 것으로 추정되는 책을 통해 현재를 산다. 가장 가깝던 이의 죽음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을 그는 보통의 삶을 위해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던 시국에 학생운동 대신 대학 도서관 한구석에 앉아 소설을 쓴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소설이 아니다. 여자친구와의 일들을, 그중에서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추려내어 쓴 글이기 때문이다. 부정확한 기억, 기억과 기억 사이의 흐릿한 부분들, 주관적인 것, 감정과 상상에 관한 내용은 모조리 생략해버린 채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록한 그 글은 여자친구와 함께 보낸 그의 과거를 분명히 있던 시간으로 증명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둘의 사연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그 이야기는 그와 그녀만의 시간 중 한 순간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글이 된다. 그가 쓴 글은 말 그대로 허구적인 실화, 분명히 있던 일이지만 주인이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 것이다.
그 글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출판도 고려해볼 만한 이야기, 즉 소설의 형태를 갖추는데, 김연수의 이 단편에서 내가 눈여겨본 부분은 어떤 내용이나 형식이 소설이 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쓰이는가에 있었다. 소설의 어디에서도 그는 애인을 잃은 지독한 상실감을 직접 토로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대학 산악부 선배를 찾아가 히말라야 원정대에 동참하고 싶다고 말하고, 선배는 그에게 등반보다 등단이 더 빠를 것 같다고 말한다. 이 가벼워 보이는 농담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둔탁한 울림이다.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일, 아니 소설을 씀으로써 작가로 존재하는 일은 지독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동시에 겪으며 불길한 느낌과 매 순간 마주하고 극심한 경우에는 이성적인 판단마저 상실하게 되는 등반자의 그것과 닮았다는 말이다. 더욱이 히말라야 같은 곳을 목표로 하는 등반의 어려움은 언제나 “문장이 끊어진 자리에서 시작하는”, 그것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마치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인 듯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조금 더 밀고 나가는 일”과 같은 글쓰기의 어려움을 통해 상상해 봄직하다.
하지만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같은 소설이 더욱 소중한 것은 이 이야기가 산을 오르는 일과 글 쓰는 일이 똑같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꿈꾸는 어떤 지점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무지개 너머 파랑새가 살고 있는 미지의 공간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죽은 애인의 마음, 그녀가 남긴 유서의 문장과 문장 사이의 결락, 그녀가 읽은 책에 그어진 몇 개의 밑줄처럼 모르는 것을 알고자 제가 아는 것들을 힘겹게 딛고 끝을 알 수 없는 앎과 무지의 경계를 향해 몸과 마음과 자신의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게 곧 쓰는 일이라면 그 어려운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막다름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생각하는 것, 즉 상상하는 힘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알려준다. 작가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자기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삼는 자가 아닐까. 생각을 멈추지 않고 계속 쓰는 일은 그 과정에서 상상의 공간이 그렇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힘으로도 이 세계를 넓힌다.
그의 이야기
작가는 누구인가 2
한국에서는 유독 작가를 인격적, 직업적으로 특별한 사람 취급을 한다. 역사적으로 문文을 숭상하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글 쓰는 일은 인격을 수양하는 일을 포함한다고 여기던 것은 물론이고 현실세계에서도 권력에 가까운 곳에 자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경험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것은 아니다. 근대가 되는 과정 속에서 문학의 자리는 권력에 가까운 곳이 아니라 대항하는 지점에 자주 형성이 되었고, 그로 인해 문학을 하는 일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고난을 마주해야 하는 작업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을 향한 선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문학의 자리는 저 곤란함을 뛰어넘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특별한 사람들의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이 작가에게 묘한 권위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그로 인해 그 권위에 기대어 폭력적 행위를 한 작가들의 사건이 요 몇 해 우리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몇몇 작가들은 글 쓰는 사람의 특별한 이미지가 권위가 되는 걸 없애기 위해서라도 작가들 역시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가는 세상의 수많은 일 중 글 쓰는 재능을 갈고닦아 그 일을 하고 있을 뿐 실상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말할 필요는 분명 있다.
그런데, 글쓰기의 독특한 실천 능력 또한 부정해야 하는지는 조금 의문이다. 소수의 작가가 때로 글 쓰는 일의 가치를 훼손했을지라도 글이 지닌 힘과 가치를 없는 것으로 취급하거나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어찌 보면 우리는 모두 평범하게 평등하다는 주장보다 우리는 모두 특별하며 그러나 그 특별함을 권위로 삼지 않는 평등함도 의식해야 한다고 더 힘주어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글쓰기의 특별한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수업 시간마다 종종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글쓰기는 왜 필요한가?’ 그 순간 강의실은 조용해진다. 아마도 그 조용한 공기는 너무나 그럴듯한 질문이어서가 아니라 평소에 질문으로 삼지 않던 의외의 질문으로 기습을 당했기 때문일 텐데, 나는 그 순간의 공기의 질감을 좋아한다. 강의실 전체가 일순 생각의 공간 속으로 빠져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조용한 분위기를 깨며 이렇게 말을 이어나간다. 글쓰기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라고.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여겨지지만, 실은 그렇게 늘 생각하는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의 계기가 따로 필요할 정도로 생각 에서 달아나려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그런데 글쓰기가 바로 그 생각의 계기가 되어준다고. 맥락을 좀더 이어나가자면 그러니 글쓰기는 생각을 실어나르는 생각의 도구가 아니라 생각을 발생시키는 생각의 생산지다.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렇다. 글을 쓰다 보면 생각과 생각이 연달아 발생한다. 미처 계획하지 않던 생각들이 쏟아져 나와 글을 쓰다 방향을 잃은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글쓰기는 생각의 계기만 마련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무지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삶 속에 어떤 방향의 감각이 부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해주고 그래서 용기를 조금 동반한다면 무지하던 감각의 길을 한 발짝 걸어 나갈 수 있게 이끌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길은 세상과 내가 맺던 관계를 재조정하게 해준다. 내가 무지하던 폭력의 관계를 비폭력의 관계로 바꿔내기도 하고, 내가 잘 안다고 여겼지만 실은 잘 모르던 사람들 사이의 차이와 다양성을 감지하고 그걸 수용할 수 있는 주체로 나를 변화시킨다. 물론 이 변화가 늘 드라마틱하게 찾아오지는 않는다. 아주 천천히, 극히 미세하게, 그리고 조금은 지루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글쓰기는 가치를 생산하는 속도의 측면에서 보자면 다소 지난한 작업이기도 하고 느림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가치에 대한 고려 없이 재미에 의한 글쓰기도 가능하지만, 세상에 재미만으로 지속 가능한 일은 많지 않다. 재미와 의미가 동반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것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여기고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나에게 작가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 글쓰기의 가치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그는 매일매일 일기를 쓰며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리가 불가능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며 그것을 수신하는 자와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정하고 조절하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정의로운 사회를 기대하며 사람들이 모여든 집회 현장에서 자신이 소리 높여 외칠 한 줄의 문장을 고민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글이 누군가 혹은 인간이란 범주를 넘어선 어떤 생명을 억압하는 기능을 할까 늘 염려하고 고심하는 사람이 작가라는 말 또한 덧붙이고 싶다.
글 김나영, 송종원
사진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