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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엄마, 할머니, 남편으로 불려온 이들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그간 익숙하던 호칭 대신 ‘작가’라는 호칭이 붙었다. 머리칼은 하얗게 세고 초점은 조금 흐려졌지만, 이들이 든 붓과 펜은 선명한 꿈을 꾼다.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 색색의 깃털과 솜털, 야무진 부리까지. 정맹순 작가의 도화지가 하늘인 것처럼 한 마리 작은 새가 훨훨 누빈다. 올해로 여든세 살을 넘긴 정맹순 작가가 붓을 든 건 일흔여덟 살, 심장 수술을 마친 후부터다. 큰 후유증으로 일 년 동안 걷지 못하며 우울함을 느끼던 엄마에게 ‘탐조책방’을 운영하는 딸 박임자 씨가 노트 한 권을 선물했다. 아무거나 보이는 대로 그려보라는 말과 함께였단다. 처음에는 숟가락, 먹던 과일, 밭에서 자라나는 작물을 그리던 정맹순 작가는 딸이 좋아하는 새를 종이에 옮겨봤다. 딸의 카메라에 담겨 있는 오목눈이와 곤줄박이, 베란다 먹이대에 찾아온 멧비둘기, 직박구리도 모델로 삼았다.
작가에게 의미 있는 새 중 하나는 바로 콩새다. 겨울에만 볼 수 있는데 베란다에 와서 물만 먹고 가는 모습이 애틋해 그려봤다고. 그림을 본 ‘그린 디자이너’ 윤호섭 교수가 <녹색여름전>에 초대하여 화가로서 난생 첫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덕분에 ‘맹순씨’라고도 불리게 됐다. 노트를 선물해 준 딸이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리다 보니 어떤 새든 딸과 손주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최근에는 딸이 베란다에 달아준 인공 새집에 곤줄박이가 알을 낳아 새끼를 관찰하게 됐다. 어리바리한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도 소중한지, 도시에서 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편에는 ‘맹순 그림’이라 꼭 적어두며.
김성일 작가의 그림에는 언제나 복슬복슬한 털을 둘러맨 채 엉뚱하고도 사랑스러운 몸짓을 보여주는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알록달록한 색채는 수채화 물감을 고루 써서 표현하고, 고양이마다 다른 무늬와 색도 충실히 담아낸다. 작가는 남편을 여의고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 싶어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벌써 15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란다. 손녀가 두고 간 스케치북에 색연필로 그린 엄마의 그림을 본 딸이자 민화작가 유진희 씨는 수채화 물감과 붓펜을 선물하며 사용법도 꼼꼼히 알려주었다고. 한 폭을 완성하는 용기는 딸의 든든한 칭찬에서 비롯되었음이 틀림없다.
꽃과 어릴 적 추억을 한데 얽어 그리던 김성일 작가는 딸이 키우는 샴고양이 ‘향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여러 작품을 완성했다. 처음에는 무서운 동물로만 생각했던 고양이가 재롱떠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까만 얼굴과 꼬리, 파란 눈에 귀를 쫑긋 세우는 향이는 낯을 가리는 터라 아직 어색한 사이지만, 언젠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작가는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 또한 김성일 작가는 고양이의 발랄하고 엉뚱한 모습을 보면 미소가 흐르기에 향이뿐 아니라 이웃집에 사는 고양이나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 상상 속 고양이들까지 불러내어 한바탕 뛰어놀 자리를 만든다. 앞으로는 사람과 자연의 풍경마저도 자신의 붓을 통해 하나로 풀어내고 싶다는 소망을 꺼내둔다.
평생 농사를 짓던 유춘하 작가가 처음으로 그림 도구를 손에 든 때는 아흔 무렵. 전북 익산에서 지내다 수도권에 사는 셋째 딸 유현미 씨의 집에 잠시 머물던 시기였다. 그림책 출판을 준비하며 미술 놀이 강사로도 활동하던 딸은 아버지의 심심함을 덜어드리고자 넌지시 여쭈었다. 그림 한번 그려보시지 않겠냐고. “그러던가.” 하고 특유의 덤덤함으로 화답한 유춘하 작가에게 크레파스를 내어주니,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그림 솜씨가 종이 위로 펼쳐졌다. 아흔에 재능을 찾은 작가는 연필로, 물감으로 자신의 세계를 자유롭게 그려나갔다.
재미나게 그림 놀이를 한 두 사람은 그간의 그림들을 모아 첫 그림책 《쑥갓 꽃을 그렸어》를 펴냈다. 소중한 책을 세상에 선보인 뒤 점차 노쇠해지는 작가를 보며, 딸은 더 늦기 전에 아버지가 그린 식구들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었다고. “나 이제 눈도 잘 안 보이는데 또 그리라고?” 했지만 아흔셋 유춘하 작가의 손은 어느새 연필을 쥐고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사랑하는 얼굴들을 정성껏 그려냈다. 지극히 사사로운 그림들은 또 하나의 그림책 《너희는 꼭 서로 만났으면 좋갔다》로 엮여 세상에 나온다. 그림 그리기는 그가 노년을 매듭짓는 뜻밖의 즐거운 움직임이자 자식들과 사랑의 기억을 쌓는 매개였음이 분명하다.
평생 가정을 위해 살았던 정연홍 작가가 쉰다섯이 되는 해. 그는 문득 이제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독립을 선언하고 작은 월세방을 얻어 시작한 새로운 인생. 소박한 살림에 딸 김현아 씨는 걱정이 많았지만, 자기 마음이 편한 곳이 천국이라고 맑은 얼굴로 말하는 그였다. 작가의 직업은 환경미화원이다. 도시를 쓸고 닦은 뒤 그가 집으로 돌아와서 하는 일은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는 것. 오가며 만난 이웃과의 인사, 동료와 웃으며 나눈 이야기가 모여 비어 있던 노트를 빈틈없이 채웠다.
매일 쌓아 올린 기록은 책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글쓰기 강사 백미정 작가를 소개받아, 날마다 쓴 글을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그럼 백미정 작가는 이를 문서로 옮기고 살뜰히 매만졌다. 그렇게 나이 일흔하나에 책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가 세상에 고개를 내밀었다. 오롯한 인생을 찾아 내디뎠던 발은 이제 일상 틈틈이 스며든 감사를 걷는다. 정연홍 작가의 펜은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빈 노트에 꾹꾹 눌러 담은 일상의 조각에서는 삶을 소중히 여기는 진심과, 기록을 사랑하는 마음이 묻어난다.
에디터 이명주, 차의진
자료 제공 김성일, 유춘하, 정맹순, 정연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