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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정도 더 큰 행복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삽니다
한 걸음 정도 더 큰 행복
어려서부터 나는 친구들 중에서 키가 제일 컸다. 보통 머리 하나는 더 있었다. 키가 큰 나는 ‘멜빵바지‘가 너무 입고 싶었지만, 한 번도 입지 못했다. 그런 건 작고 귀여운 친구들이나 입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봄이면 꽃무늬 레이스 원피스에도 눈이 갔지만 그런 옷은 좀 더 선이 가는 인상의 친구들이나 입는 거라고 여겼다. 언제부턴가는 아예 예쁜 옷을 보면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그 옷과 어울릴 만한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살았다. 그러니까, 바르셀로나에서 살기 전까지는.
숏팬츠를
샀다
바르셀로나에서 쇼핑을 할 때면 늘 한 가지 질문을 더 하게 된다. “이 옷을 한국에서도 입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옷은 그 질문에서 탈락한다. 또다시 무난한 옷들로 옷장이 채워졌다. 긴팔 원피스거나, 반팔 원피스거나, 롱 원피스거나, 조금 길이가 짧은 원피스거나. 여하간 결국은 원피스와 원피스와 원피스. 모든 사람들이 몸매와 상관없이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더운 여름, 처음으로 용기를 내 짧은 반바지를 샀다. 굵고 긴 다리 덕에 다른 사람에 비해 노출되는 ‘살의 면적’이 넓어 단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숏팬츠로 골랐는데, 이미 여름 내 여러 벌의 반바지를 수없이 들었다 놓았다 한 뒤였다. 한국에 가서 입지 못하더라도 아깝지 않을 만큼 가격이 저렴했다. 아무래도 너무 짧아 혹시나 여기에서도 못 입는다 해도 괜찮을 정도로 쌌다.
만원이 조금 넘는 반바지를 앞에 두고 벌어진 오랜 시간의 걱정과 고민과 합리화가 무색하게도 나는 두 번의 여름 동안 그 바지를 닳도록 입었다. 이 바지가 없었으면 대체 바르셀로나의 여름을 무엇을 입고 보냈을지 모르겠다. 처음 숏팬츠를 입고 거리로 나간 날, 맨다리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어, 아무도 내 다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성큼성큼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그 바지만 입었다. 바르셀로나의 여름이 더 좋아졌다.
‘점프수트’도 샀다. 세상에 바지와 윗도리가 붙어있는 옷을 내가 입을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한번 흥미가 생겨 입어보니 몹시 편해 벗을 수가 없다. 멜빵바지에 쌓인 한을 점프수트로 풀었다. 점프수트야말로 한국에서 입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홀린 듯 벌써 다섯 벌의 점프수트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점프수트보다 편하고 멋스러운 옷은 없다고 믿고 있다.
노 브라
운동
최근 몇 년간 읽은 소설 중에 가장 즐겁게 읽은 책 《보건교사 안은영》.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없을 정도로 구석구석 유쾌한 이야기들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다른 최종 후보는 뉴질랜드 출신의 굉장한 건강 미인이었는데 면접을 오는 날 음,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굉장한 노 브라였다. 뉴질랜드에선 자연스러운지 몰라도 일단 교사인 인표의 눈길도 자꾸 쏠리는데 사춘기 애들을 이 서구적인 건강함에 노출시킬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은 보건 선생이 불을 뿜으며 브래지어가 유방암을 유발한다느니, 인생을 살며 한 가지 운동에만 투신하라고 한다면 노 브라 운동일 것이라느니, 이제부터 자기라도 실천하겠다느니 펄펄 뛰었지만 그런다 한들 임팩트가 같으리오 싶었던 게 인표의 속생각이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이거지. 누군가 나에게도 인생을 살며 한 가지 운동에만 투신하라고 한다면 ‘노 브라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안은영 보건교사와 함께 평생 그 운동에 투신할 생각을 하니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바르셀로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여자들 반은 ‘노 브라’ 차림이다. 아주 평범한 패션의 여자들이 연령 불문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외출을 한다. 바르셀로나 거리에서 그들과 수없이 마주치며 자연스럽게 알았다. 이렇게 외출할 수도 있는 거구나, 특별한 일이 아니구나. 그리고 곧장 따라오는 생각. 와, 얼마나 시원할까. 언제부턴가 두꺼운 겉옷을 입는 겨울이면 나도 ‘노 브라’로 다닌다. 하지만 정작 노 브라가 더 필요한 건 겨울이 아니라 여름인데, 나는 과연 어느 여름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외출할 수 있을까. 더운 여름에도 속옷 없이 외출할 수 있는 날 우리는 지금보다 한 뼘 더 행복해질 것이다. 확실하다.
마네킹 살 찌우기
운동
얼마 전 포르투 여행을 갔다가 어느 옷 가게 쇼윈도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있었다. 쇼윈도 너머에 나와 비슷한 체형의 마네킹이 옷을 입고 서있다. 낯설었다. 그러니까 사실 이게 자연스러운 건데, 우리는 마르지 않은 마네킹이 낯설다.
런던 여행 중 우연히 알게 된 브랜드가 마음에 들어, 여행에서 돌아와 웹사이트를 찾아보았다. 사이트에 접속해 옷을 구경하다가 꼭 포르투에서처럼 낯선 기분이 들었다. 옷을 입고 있는 모델이 다 표준 사이즈였다. 키를 불문하고 늘 스몰 사이즈 옷을 입은 모델들만 보다가, 중간 사이즈 옷을 입은 모델이 있는 사이트를 보니 나는 또 낯설다. 이 브랜드는 마침 한국에도 매장과 웹사이트가 있는데,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라지 사이즈를 아예 판매하지 않는다. 반면 남성복은 스몰부터 엑스라지 사이즈까지 판매되고 있다.
한 가지 운동을 더 할 수 있다면, ‘마네킹 살찌우기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마네킹도 모델도 더 이상 깡마르지 않다면, 우리는 옷에 맞춰 살을 빼려는 노력 같은 건 덜하게 될 테니까. 그러면 한 걸음 정도 우리는 더 행복해질 것이다. 분명하다.
천국이
있다면
바르셀로나 거리에서 만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하루 종일 할 수 있다. 그들은 키가 크고, 작고, 마르고, 뚱뚱하고, 피부색이 밝고, 어둡고, 머리가 짧고, 길다. 타투를 하고, 타투를 하지 않고, 화장을 하고, 화장을 하지 않고, 젊고 또 나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겉모습과 전혀 상관없이 입고 싶은 옷을 입는다. 백발의 할머니도 여름이면 비키니 위에 원피스를 입고 지하철을 타고, 깡마른 여자도 뚱뚱한 여자도 짧은 바지에 민소매 셔츠를 입는다.숏팬츠와 점프수트를 한국에서도 입을 수 있을지 바르셀로나에 사는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생각은 그렇다. “대체 입지 못할 이유가 뭐야?” 언젠가부터 옷을 살 때 “이 옷을 한국에서도 입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입고 싶은 것을 입는다.
바르셀로나가 좋은 수많은 이유 중 하나. 이곳에선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의 시선에서도 자유롭게,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수 있다. 만일 천국이 있다면, 그곳이 모두 행복한 곳이라면, 천국의 조건에는 이런 것도 포함될 것이다. 겉모습에 따라 남을 평가하지 않는 곳.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곳.
이 글을 쓰기 위해 포털 사이트에 ‘멜빵바지’를 검색했다가 첫 페이지에서 ‘제가 뚱뚱한데 멜빵바지를 입어도 될까요?’ 하는 글을 만났다. 어린 시절 내가 수없이 던진 질문과 닮았다. 그럼요. 돼요. 우리 입고 싶은 건 입고 살아요.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