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춘몽

이십 대의 연애

01

또 하나의 연애가 끝났다. 일장춘몽 같은 사랑이었다. 여름에 시작된 로맨스는 가을이 오기도 전에 막을 내렸다. 성인이 된 후, 세 번의 연애 모두 순탄치 않았다. 왜 나의 연애는 유독 힘든 걸까.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연애라는데, 마음은 내 것인데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연애가 시작되면 좋기도 했지만 얼떨떨했고, 심지어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당시에는 내가 상대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혹은 사랑에 무지한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건 속도의 문제였다. 마음의 문이 열리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는 사람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애정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다. 그에 비해 그들은 연애 초반부터 감정을 열렬히 쏟아부었다. 감정 과용으로 체할 지경이었지만 나는 참고 또 참으며 그들의 속도에 맞추려 노력했다. 그것이보편적인연인의 속도 같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타인에게 잘 맞추며 살아온 것처럼 연애에서도 그 방식이 통할 줄 알았다. 관계에 유연한 나, 사랑받기에 마땅한 나. 좋은 모습만 보여주며 연애하고 싶었다. 그러나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관계는 불편해졌다. 아무래도 나 자신을 위한 연애가 아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들 앞에서 나는 내가 아니었다. 단지 사랑받기 위해 만든 허구 였을 뿐이다.

 

그 시기에는잘 울지도 못했다. 실컷 쏟아내고 나면 속이라도 시원해질텐데, 나는 꽉 막힌 하수구처럼 아무것도 내보낼 수 없었다. ‘나는 ㄱㅏ끔 눈물을 흘린ㄷㅏ….’는 겉멋 들은 말조차 몹시 부러웠다.

눈물샘이 막힌 건 언제부터일까. 기원을 찾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어린 나에게 엄마와 아빠의 싸움은 세상의 붕괴였다. 울고 싶지 않아도 눈물이 나고, 내가 울면 한 살 터울 여동생의 울음도 터졌다. 그들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동생의 훌쩍이는 소리도 커져 갔다. 불행으로부터 아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선 우는 일 대신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우는 동안은 감정을 감출 수 없고, 나의 두렵고 약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니까 그때부턴 슬프거나 화가 나도 눈물을 참았다. 어쩌면 그때의 무의식이 눈물을 잡아 가둔 것일 수도 있겠다.

 

세 번의 연애가 지나가고 우울감에 침몰당하기 일보 직전의 일이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모아둔 돈을 다 털어서 유럽에 갔다. 콧바람을 쐬는 한 달 반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뜨문뜨문 한국의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그중 일요일마다 내게 주일 설교를 요약해서 보내는 이가 있었다. 설교 한 바닥과 그 밑에 덧붙인 편지를 읽으며 월요일 아침을 시작하는 것을 습관으로 만들 만큼 성실한 전송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그 애가 내 삶에 들어온 것은.

 

우리는 같은 교회를 다녔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친구처럼 지냈다. 나와 달리 그 애는 눈물에 솔직했다. 기도하면서 우는 그가 조금은 우스웠고 또 신기했다. 열린 공간에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태도는 내게는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약해 보이기도, 용감해 보이기도 했다.

그 애는 잘 울기도 했지만 웃기기도 했다. 어느 모임에나 망가지는 사람이 한두 명쯤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애는 서슴지 않고 망가졌다.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면서도 무례하지 않았다. 나는 잘 울고, 재밌고, 나한테 잘해주는 그 애가 좋았다. 무엇보다 편안했다.

유럽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그에게서 꾸준히 연락이 왔지만, 나는 어떤 관계도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 좋은 관계를 망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영원히 이대로이길 바랐다. 그렇지만 결국 친구 사이를 뒤집는 결정적인 사건은 일어나고야 말았고, 그 이야기의 배경은 무려 아프리카다.

We Around Project

결혼, 문을 열다

 

브런치에 글을 연재해 6,600명의 구독자를 모은 에세이스트입니다. 어떤 문은 큰 노력없이 쉽게 열리지만, 어떤 문은 문고리를 잡는 것조차 버거운데요. 재산이라곤 200만원의 잔고뿐인 이혼가정 자녀에겐결혼이라는 문이 딱 그랬습니다. 무거운 문을 열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 속 안개를 걷어주는 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그림 윤지영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