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비일상 사이의 다정

남궁인 — 응급의학과 의사·작가

‘의사’라는 단어에 어떤 이미지가 생각나는가, ‘작가’라는 말에 어떤 얼굴을 떠올렸는가. 가운을 입은 남궁인은 0.1초가 급박한 응급실 안에서도 다정을 잃지 않고 의학을 번역한다. 환자가 조금 더 정확하게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환자를 다치게 한 사회를 세상에 알릴 수 있게. 가운을 벗은 남궁인은 내 이야기를 뿌리 삼아 쉬지 않고 뭔가를 쓴다. 무지개 빛깔이 흐르는 게이밍 키보드 위에서 ‘타닥 타닥’ 리듬을 만드는 손가락은 타건감을 만끽하는 호기심꾸러기 같다. 비일상이 펼쳐지는 응급실과 온전한 일상에 가까운 내 방을 오가는 남궁인에게서 나는 또 다른 얼굴을 본다. 판에 박힌 듯 그려지던 의사와 작가가 아닌 얼굴을. ‘음’보다 ‘움’에 가깝게 발음하며 짓는 무구한 표정을.

결정적으로 제 몸이 거부하는 것들을 해내고 나면 분명히 달라져 있어요.
사람은 대체로 익숙한 것만 하려고 하는데,
적극적으로 달라지려는 경험들이
나를 다른 모습으로 이끌어가게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오늘 대화를 돌아보면 의사와 작가를 이야기할 때 온도가 달랐다는 인상이 있어요. 작가에 관한 내용은 바로바로 다양한 이야기를 꺼내주시는 반면, 의사로서는 한참을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두 일을 대하는 마음에 어떤 차이가 있나요? 

두 직업은 달라요. 그러니까, 작가로서의 저는 끝없이 자기를 개척할 필요가 있어요. 오늘은 무슨 글을 쓸지, 어제 완성되지 않은 글은 언제까지 마감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해요. 계속 쓸 수만은 없어서 ‘이쯤 되면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쓰자.’라는 생각도 해야 하고요. 그래서 작가란 무엇인지를 계속 고민하게 돼요. 그런 덕분에 ‘무엇을 쓰고 있습니까?’라든지 ‘작가로서 가장 기쁜 순간은 언제입니까?’ 같은 질문에도 비교적 쉽게 답할 수 있어요. 반면, 의사로서의 저는 출근한 시각부터 퇴근할 때까지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사실상 의사는 더 많은 걸 익히고 공부하는 역할은 아니에요. 의사가 되기까지 저한테 필요한 지식은 모두 익힌 상태거든요. 틈틈이 새로운 내용은 공부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익혀온 것들로도 하루를 보내는 데는 충분해요. 그러니까 더 중요한 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기보다도 환자들의 아프다는 말을 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번역해서 치료법을 안내해 드리고, 이를 번역하여 환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인 거죠. 그걸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하면서 해야 하는 건데요. 그러다 보면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하게 돼요. ‘내가 아는 걸 정확하게, 또 다정하게, 놓치지 말고 안전하게 진료해야겠다.’ 그 일이 때로는 꽤 끔찍하고 긴박하지만 모든 일이 그 범주 안에서 벌어지는 거죠. 결국 작가와 의사는 발전하는 방향이나 고민 지점이 조금 달라요. 작가가 진보하고 발전해 나가는 영역이라면, 의사는 수호하고 지키는 영역이죠. 

 

작가로, 의사로 이루고 싶은 것이 있나요? 

의사로서는 동료들에게 다정하고 지식을 제대로 공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 혼자만 생각할 게 아니라 팀워크를 생각하며 잘해 나가고 싶죠. 가끔 상처받게 행동하고 거침없이 발화하는 교수들이 있는데, 저는 마음 상하지 않게 다정히 말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반면 작가로서는 ‘이 사람, 자기가 쓸 수 있는 건 진짜 끝까지 다 썼다.’라는 평을 받고 싶어요. 그러려면 더 치열하게 쓰고 발표해야겠죠. 아직은 작가로서 한참 뭔가를 써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제 역량은 정해져 있을 테니까 일단은 힘이 닿는 대로 열심히, 최대한 써보려고요. 아, 4년간 써서 모은 글이 6월 〈서울국제도서전〉에 맞춰 출간될 예정이에요. 교양서인데, 4년 동안 쓰다 보니까 이제는 저한테 감각이랄 게 사라졌어요. 미발표 글들이라 어떻게 가닿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요. 앞서 많은 사람에게 보여줘야 더 좋은 글이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누구한테도 보여주지 않은 글이다 보니 제가 판 함정에 빠진 듯한 기분으로 출간을 기다리고 있어요. 

 

책이 나오고 나면 또 이야기를 청해봐야겠는걸요.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에요. 지금부터 돈을 벌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재력을 드릴게요. 어떻게 살아가고 싶어요? 

저는 물욕도 없고, 혼자 살고 있어서 돈 쓸 일이 그리 많지도 않아요. 뭔가를 산다고 하면 책밖에 없거든요. 실은 그래서 병원에 취직한 후로 월급을 쓸 일이 별로 없었어요. 작가 수익도 있으니까요. 지금부터 돈을 안 번다고 해도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일시금으로 이보다 풍족하게 평생 먹고살 돈을 준다면… 그래도 저는 병원으로 출근하고, 퇴근하면 글을 쓸 것 같아요. 저는 동료와 같이 일하고 사람들을 도우면서 삶의 위안을 얻고 있어요. 제가 쓸모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가끔은 제가 이것 때문에 살아간다는 생각도 하는데요. 아주 오랫동안 생각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저는 돈이 훨씬 더 많아져도 계속 의사와 에세이 작가로서 하던 일을 해나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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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산책방)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