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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차보다는 쨍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대세인 이 바쁜 나라에서, 꿋꿋이 차를 마시는 나의 쿵후 관장님을 보며 차 마시는 일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일주일에 세 번, 일 년째 동네 쿵후 도장에 다닌다. 나를 뺀 회원은 두 명뿐인 것 같다. 아니, 다른 요일이나 시간대에는 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열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 혼자일 때도 부지기수다. 나는 정적 속에서 홀로 궁보와 마보 같은 것들을, 그 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온갖 동작을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화교인 관장님은 하루 종일 방에서 차를 마신다. 관장님의 찻잔은 아예 갈색으로 물들어 있다. 어느 날 관장님은 ‘회원 모집’이라는 글씨를 새긴 손바닥만 한 나무판을 입구에 걸어 두셨다. 그러나 (당연히) 회원은 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장님은 계속 차를 마신다. 차만 마신다. 이 도장,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관장님, 뭔가 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원데이 체험 클래스를 열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하다못해 동네 축제 때 나가서 쿵후 시범 쇼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닐까요? 계속 차만 마시다가 딱 5분 일어서서 가르치고 나머지 55분은 혼자 알아서 해야 하는 이 도장의 시스템이 요즘 시대에는 맞지 않는 거 아닐까요? 그 비싼 PT도 척척 받는 세상인데, 좀 더 적극적이고, 좀 더 세심하고 집요하게 회원들을 ‘케어’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러나 나는 이 도장이 마음에 들고 쿵후라는 운동(내게 쿵후는 무술이라기보다 운동이다)이 마음에 든다. 남에게 이끌림 당하고 지적받는 것이 딱히 달갑지 않은 성격인 나는 55분 동안 혼자 배운 것을 연습하고, 딱 5분 지도편달을 받는 이 시스템이 마음 편하다. 아무도 없는 도장에서 혼자 연습하니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내 몸짓을 보는 이 없어 더 마음 편하다. 과한 열정과 과한 친목과 과한 애정이 존재하지 않는 이 내향적인 도장의 풍경이 나에게는 더더욱 마음 편하다. 그러니 관장님, 아예 밖에다 ‘내향인 환영’이라고 써 붙이면 어떨까요? 하지만 내향적인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꿀꺽 삼키고, 오늘도 입을 꾹 다문 채 이런저런 동작을 연습하다 도장을 나설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게 될 때는, 어떤 글에 빠져들게 될 때는 바로 이런 문장들을 만날 때다. 이런 문장을 만날 때 나는 똑똑 문을 두드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말하는 낯선 손님을 떠올린다. 나는 약간 경계하면서도 기대에 차서 그를 집 안으로 들이는데, 그는 내 집의 소파에 단정히 앉아 차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너무나 흥미롭고, 그 이야기 속의 감정들은 나도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는 지금껏 내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작은 진실들, 그러니까 옷에서 떨어진 실밥 같은 그런 진실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주워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일본의 소설가 오가와 요코의 《완벽한 병실》이라는 소설집을 나는 그런 마음으로 좋아한다. 그중 〈식지 않는 홍차〉라는 이야기의 주인공 ‘나’는 중학교 동창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다른 동창 K군을 만나게 된다. 중학교 시절과 달라진 게 없는 K군은 ‘나’를 집으로 초대하고, 그의 집에는 여자친구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여자친구는 맛있는 식사를 대접한 뒤 홍차를 내온다. 그들은 홍차를 마시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나’에게 여자친구를 기억하지 못하느냐며, 그녀는 그들이 다니던 중학교 도서관의 사서였다고 말한다. 중학교 때부터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집에서 따뜻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낸 ‘나’는 자주 그들을 찾게 된다. 반대로 함께 살고 있는 남자친구 사토와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간다. K군의 집에서 보낸 시간이 꿈처럼 완벽했다면, 사토와의 생활은 현실적이고 무덤덤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K군이 내려준 홍차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식지 않는다. ‘나’는 의심한다. 어쩌면 K군 커플은 오래전 도서관 화재 사고 때 죽은 게 아닐까? 그들의 집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아닐까? 사실 이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나’에게 어린 시절 약방에서 본 인체 해부도와 뇌의 모형을 떠올리게 한다. 내장과 혈관과 근육 같은 것들이 온갖 색으로 얽혀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은 어쩐지 구역질 나는 것이다. 마치 사토의 입안처럼.
살아 있는 것은 무섭고 징그럽다. 그러나 죽음은 깨끗하고 아름답다.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하다. K군 커플에게는 결점이 없다. 살아 있는 것들은 결점투성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완벽한 죽음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영원히 식지 않는 홍차의 향기에 매혹되고 마는 것이다.
한 여자가 건 전화를 받는다. 호텐스라는 이름의 여자는 자신이 신시아가 오래전 입양 보낸 딸이라고 말한다. 기억에서 지워버린 10대 시절의 출산을 떠올린 신시아는 기겁을 한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호텐스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두 사람은 만날 약속을 잡는다. 그런데 막상 신시아의 앞에 나타난 딸 호텐스는 흑인이다. 백인인 자신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아이인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던 신시아는 순간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는 경악한다. 출산 후 아기 얼굴도 보지 않고 입양을 보냈던 것이다.
별다른 기술 없이 박스 공장에서 일하는 싱글맘 신시아와 고등학교만 마치고 거리의 청소부로 일하는 딸 록산은 전형적인 영국의 하층민이다. 늘 남들 눈치를 보고 불안해하면서도 호들갑을 멈추지 못하는 신시아는 늘 화가 나 있는 듯한 록산과 사이가 좋지 않다. 반면 호텐스는 평범한 가정에 입양돼 사랑받으며 자랐다. 대학을 졸업한 후 검안사로 일하는 호텐스의 집은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 호텐스와 록산은 같은 어머니를 두었다기에는 외모부터 성격, 라이프 스타일까지 좀처럼 비슷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신시아와 호텐스는 만난 그날부터 서로 끌리게 된다. 이제 신시아에게는 즐거운 비밀이 생겼다. 신시아는 처음 만난 딸과 자주 통화하고 만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너무 들뜬 나머지 남동생 모리스가 열어준 록산의 생일 파티에 호텐스를 초대하기에 이른다. 잘 꾸민 모리스의 새집에서 그들의 비밀과 거짓말은 모두 폭로된다.
〈비밀과 거짓말〉의 감독인 마이크 리의 영화는 언제나 나에게 미스터리다. 줄거리만 요약하면 딱히 어려울 게 없는 단순하고 통속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영화가 끝나면 질문이 가득 남는다. 마이크 리는 절대로 이건 이거야, 저건 저거고 그건 그거야, 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과 저런 사람과 이렇고 저런 인생을 보여준 후 그냥 그렇게 끝내 버리는 것이다.
비밀과 거짓말이 사라진 후에도 문제는 계속 남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햇살 아래 작은 마당에 모여 앉아 차를 나눠 마신다. 신시아가 만족스러운 듯 다리를 뻗으며 이렇게 말한다.
“이게 인생이지.”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그렇지. 영국 사람들에게 따뜻한 햇볕과 홍차 한 잔이면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는가.
세 모녀는 행복해 보인다. 다만 이게 인생이란 말이 흰 셔츠에 번진 홍차의 얼룩처럼 오래 남는다. 무엇이 인생이란 말일까? 생각이 짧은 신시아한테는 어찌 됐든 이렇게 다 함께 앉아 차를 마실 수 있으니 된 거 아니냐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비밀과 거짓말은 말끔하게 해결된 걸까? 이렇게 다른 세 모녀는 영원히 햇살 아래서 차를 마시며 웃을 수 있을까?
나는 약간 다르게 생각해 본다. “이게 인생이지”라는 말을. 일단 차부터 한잔하고 한숨 돌리자. 한숨 돌린 후에 생각해 보자.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들에 대해서. 복잡하고 골치 아픈 것, 그게 인생이니까. 비밀과 거짓말은 언제든 또 우리 삶을 뒤흔들 테니, 일단 지금은 차부터 한잔하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차를 마시는 시간은 내향적이다. (내향인 환영!) 차를 급하게 마시기는 쉽지 않다. 뜨거운 차의 김을 불어 호록호록 마신다. 목구멍으로 따뜻하고 향긋한 물줄기가 부드럽게 내려간다. 음, 하고 가만히 허공을 바라본다. 음, 하고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아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한 모금을 마신다. 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인생은 흘러간다.
아마 나의 관장님도 같은 마음으로 차를 마시는 것이리라.
글 한수희
일러스트 점선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