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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sop
회복의 기운이 감도는 가을, 이솝 하비스트 캠페인은 인내 끝에 맺히는 결실을 말한다. 일상이 어그러지고 침잠하는 와중에도 삶을 감당해 낸 우리 이야기다.
거리가 멀어져도 쉽게 소원해지지 않는 관계를 되짚는 <오래된 매듭의 무늬>(2020)와 예상보다 길어지는 고된 나날을 위로하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2021). 소중한 사람들과 떨어져 지낸 2년 동안 하비스트 캠페인은 기쁨 대신 그리운 마음을 전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이에게 변화가 들이닥쳤고, 대부분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를 소화하려 애썼다. 나아질 기미가 보인다고는 하지만 여태 버티고 있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정말 나아지긴 하는 걸까.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의미 있는 기억이 될까. 올해의 하비스트 캠페인은 이런 읊조림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안을 지그시 눌러줄 묵직한 무엇이라고, 방짜유기를 처음 본 날 생각했다. 오늘에서 비롯된 내일이 밝는다는 믿음은 희망이 되기도 두려움이 되기도 하니까. 화려하지 않은데도 웅장한 힘이 느껴지는 유기가 궁금해 방짜유기장 이지호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방 장인들이 어떻게, 또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지 보았다. 줄곧 망치로 두들겨지던 것이 금빛을 내며 완성되었을 때 ‘결실’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솝은 이번 추석에 방짜유기를 언어 삼아 삶을 이야기한다. 시련을 견디고 맞서는 방식에 따라 그 형태가 다르더라도, 꼭 아름답고 단단한 결실을 맺고야 만다는 단연한 희망을 전하려는 것이다.
유기는 청동 합금의 일종으로, 구리에 주석을 주재료로 합금한 것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청동 조각이나 장식, 종 등의 기물은 주로 주물 기법으로 제작하는데, 주물 기법은 모래나 왁스 등으로 틀을 먼저 만들고 쇳물을 부어 완성한다. 이에 비해 방짜유기는 동그란 모양으로 용해한 금속 덩어리를 뜨겁게 달구고 여럿이 함께 망치질해 성형하는 공정이다. 방짜유기 기술은 구리와 주석을 정확한 합금 비율로 용해하는 것부터 그 기법의 중요성과 가치를 인정 받아 198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대에 오며 표면을 매끄럽게 가공한 유기를 선호하는 추세지만, 이솝은 두드린 모양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기물로 방짜의 매력을 알린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 비율부터 가마의 온도, 망치질, 물에 담가 식히는 타이밍, 표면을 깎는 것까지 모든 과정에서 기물의 모양이 좌우된다. 그런 만큼 예민한 손길이 필요한 데다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드니 기술은 물론 호흡이 중요하다. 뜨겁고 힘겨운 과정을 거치는 것은 유기와 만드는 이 모두 마찬가지다. 이렇게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거듭 반복하는 방짜유기에는 쉽게 휘거나 깨지지 않는 장인들의 신념이 담겨 있다.
무언가를 전승傳承하는 일이 쉽지도 당연하지도 않은 시대예요. 방짜 기술을 이어받기로 마음먹은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아버지가 멋져 보이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됐어요. 그전까지 가업은 저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주변 어른들이 “너는 유기장이 되어야지.”라고 말씀하실 때도 와닿지 않았고요. 그런데 직장인이 된 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보니, 그들이 일을 대하시는 태도가 굉장히 멋있다고 느껴지더라고요.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고요. 그래서 해보고 싶었어요. 특별한 에피소드가 아니라서 어쩌죠(웃음).
선대 유기장에게서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솔직하고 정직한 태도예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빨간 불에 길을 못 건너게 했어요. 지금도 그걸 지키며 사는데 생각해 보면 그런 데에서 원칙을 지키는 자세를 익힌 것 같아요. 방짜유기는 원재료의 합금 비율이나 불의 온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마지막 과정에서 다 드러나거든요.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꼼수를 부릴 수 없더라고요. 그리고 그게 제 삶에도 참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공방에서도 삶에서도 현명한 선배가 함께인 거네요. 이번 추석도 함께 보내시나요?
네. 할아버지가 계시는 문경에 내려가 가족끼리 쇨 계획이에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우리 명절인 한가위가 작가님께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기도 하고 결과를 돌아보는 시기이기도 하죠. 생각해 보면 농경사회일 때부터 추석은 열심히 경작한 걸 거두는 시기였잖아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그런 계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해요.
이제 이솝에 관해 묻고 싶어요. 평소에도 좋아했다는 게 정말인가요?
진짜예요(웃음). 어느 나라에 여행을 가든 멋진 공간을 찾아다니는 편인데요. 좋은 호텔이나 카페에 가면 화장실에 늘 이솝이 있는 거예요. 그게 이솝의 첫인상이에요. 이솝 제품을 두는 걸로 ‘우린 이렇게 특별한 공간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이솝 스토어도 각각 특색이 달라서 신기했고요. 특별한 것을 상징하는 브랜드라고 생각했어요.
올해 하비스트 캠페인에 함께하는 아티스트로서, 이솝이 어떤 브랜드라고 생각하세요?
대단하다고 느껴요. 이솝 역시 장인이에요.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는데, 집념이 느껴질 만큼 문화에 깊이 있게 접근하더라고요.
어떤 집념을 느꼈는지 좀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처음엔 하비스트 캠페인을 위해서 뭔가 새로운 유기를 만들어야 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런데 공방에 오셨을 때 방짜유기를 날 것 그대로 좋아해 줬어요. 그냥 보고 찍어가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관심 갖고 물어보면서요. 덕분에 예순이 넘으신 공방 분들도 같이 신나 하시더라고요. 더 보여주자고 하시면서 몸소 나서시고요. 그런 걸 보며 이걸 이해하고 알리는 데 진심이라는 걸 느꼈어요. 결국 그 때를 계기로 완성된 유기뿐 아니라 다만 들어지지 않은 기물들도 함께 전시하기로 했죠.
만드는 중간 단계의 유기를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건 정말 새로웠어요. 날 것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사실 그 일이 있기 전에, 옛날부터 만들어 오던 기물을 그대로 만드는 것이 장기적으로 가치 있는 일인지 고민했어요. 그런데 이번 협업을 하면서 그런 고민이 해소되더라고요. 해오던 것을 꾸준히 하면 누군가는 알아봐 준다는 걸 깨달았달까요.
하비스트 캠페인을 통해 방짜유기의 어떤 면이 알려지길 기대하시나요?
방짜유기가 오래된 것으로만 치부되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있어요. 옛것과 오래된 것은 다른데도요. 이솝과 함께라면 방짜유기의 현대적인 매력이 좀더 보이지 않을까 해요. 사람들이 방짜유기를 우리 생활에 자연스럽게 자리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면 좋겠어요.
세대에 관계없이 아름다움에 공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거라고 믿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공방도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고요. 아무래도 새로운 작업자들이 유입되기 어려운 환경이거든요. 그래서 좀더 공예적이고 현대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방짜유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요.
이번 캠페인은 방짜유기와 우리 삶을 아울러 이야기하는 만큼, 사람들이 방짜유기의 과정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보태어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결실’이라는 말이 참 좋아요. 모두 힘들었던 요즘 필요한 메시지고요. 고된 환경에서 작업한 결과로 반짝이는 유기가 탄생하듯이, 지나고 나면 더 단단해지겠죠. 힘든 시간을 견뎌낸 만큼 더 나은 결과가 돌아올 거라고 함께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방짜유기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묵직하고 생동하다. 그 존재감은 궂은 시간을 견디어 낸 힘에서 우러난 것이 아닐까. 이렇듯 견고한 결실을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이솝은 다양한 방법으로 유기를 감각하는 캠페인을 준비했다.
이솝 시그니처 스토어는 삶의 면면을 떠올리게 하는 방짜유기를 선보인다. 먼저 고즈넉한 삼청 스토어는 켜켜이 쌓인 유기의 빛으로 가을을 화사하게 맞이한다. 반면 성수 스토어를 가득 채운 기물들에는 불에 달궈진 그을음이 묻어 있는데, 유기가 만들어지는 동안의 거칠고 묵묵한 시간이 거뭇거뭇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가로수길 스토어는 이지호 유기장이 하비스트 캠페인을 위해 만든 작품을 선보인다. 멀리에서 보면 보름달처럼도 보이는 커다란 대야는 망치질의 질감을 고스란히 살려 제작되었다. 웅장한 멋이 스민 작품을 지나 층계를 오르면 그곳은 결실의 빛으로 환하다. 형태를 갖춰가는 유기의 표면을 깎을 때 뿜어져 나오는 상피를 장인들은 ‘가루쇠’라고 부르는데, 이 금빛 실타래들이 소복이 쌓인 공간은 밝아오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북돋운다.
한편 캠페인이 시작된 주에 한남 스토어에는 좌종, 성수 스토어에는 징, 삼청 스토어는 꽹과리 소리가 울렸다. 깊고 둥근 울림을 내는 이 악기들은 모두 이지호 유기장의 공방에서 두들겨 만들어졌다. 이솝은 그날의 즉흥 연주를 녹음해서 다음날 다른 악기의 반주로 틀었는데, 이렇게 연주가 쌓여 조화를 이룬 음원은 캠페인 기간 중에 공개될 예정이다. 소리와 함께 사유하는 시간을 마련한 것은 공감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이솝의 도전이다. 직접 보고 만지고 맡기 어려웠던 누군가에게 묵직한 음파가 가 닿는다면, 이것이 올해 하비스트 캠페인의 가장 큰 결실이 아닐까. 희망의 기운이 스미는 올가을, 캠페인 기간 동안 이솝 스토어와 카운터에서는 하비스트 시그니처인 보자기 포장 서비스가 제공된다.
김환기 화백의 문장을 읽고, 그것이 내일 우리가 적을 일기가 되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파리에 도착해 세계적인 작품들을 마주한 그는 그동안 걸어온 길이 어디를 향해 있었는지 깨닫고 탄복했다. 무엇을 위해 힘을 내고 있는지 영 모르겠고 고단할 뿐이어도 앞으로 나아가 보는 날들. 모두의 여정에 “아아!” 하고 끄덕일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니 시련이 삶을 두드릴 때 마음이 그저 짓이겨지게 두지 않기를. 함께 먹고 웃으며 시시콜콜한 시간을 보낼, 우리의 추석을 기다린다.
-김환기
에디터 하나
포토그래퍼 윤동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