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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종이달》,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BOOK 《종이달》,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HUMAN,
ALL TOO HUMAN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평범했던 가정주부가 불륜에 빠져 거액의 은행 예금을 횡령한 죄목으로 수배를 당하는 처지가 된다. 19세의 나이에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작가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들 틈에서 자기 파괴적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보니 더 이상 그들이 괴물이나 외계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어쩌면, 지나치게 인간적인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들의 옷을 거의 사주지 않고 얻어 입힌다는 것, 내가 가진 옷 역시 싸구려 티셔츠와 청바지 몇 벌이 전부라는 것, 깨진 도시락을 수년째 계속 쓰고 있다는 것, 외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 4인 가족 최저 생계비의 수준에 맞춰 생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절약 정신이 투철한 사람인 줄로만 안다. 오해다. 나는 헛된 곳에 돈을 잘 쓴다. 소위 기분파다. 애들한테는 7천 원짜리 돈가스도 안 사주면서 밖에 나가서는 7만 원어치 술을 잘도 사 마신다. 100원, 200원에 벌벌 떨면서 100만 원, 200만 원을 들여 해외여행도 잘만 간다. 한심스럽다.
그런 나는 돈에 대해 정말 열심히 생각한다. 돈을 더 벌고 싶다거나 돈을 더 모으고 싶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돈을 벌고 또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나 자신과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는지다. 어떻게 해야 돈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돈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돈을 삶의 수단 중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가쿠다 미츠요의 소설 《종이달》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젊은 남자에 빠져 10억 엔을 횡령한다는 통속적 소재의 소설이다. 그러나 통속의 겉핥기가 아닌, 소비사회에서 돈과 불가분의 관계인 개인의 욕망과 자존감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아이 없이 평범한 회사원 남편과 함께 사는 리카는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그녀는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하고 은행의 시간제 사원으로 취직한다. 가정주부로 남편의 경제력에 의지해 살아가던 리카는 자신의 힘으로 일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쓰면서 짜릿한 유능감에 휩싸인다. 잃어버린 삶을 되찾은 것만 같은 느낌이다. 결코 되어본 적 없던, 진정한 자신이 된 기분이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리카는 근무하는 동안 줄곧 생각했었다. 명함에 적힌 자신의 이름은 가키모토 리카의 극히 일부라고, 늘 느끼고 있었다. 그 일부인 채 나이를 먹고, 어느새 자신의 일부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돼버린 게 아닐까 하고 막연히 공포를 느끼고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직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사후미가 결혼 의사를 넌지시 비쳤을 때는 깊이 안도했다. 자신의 일부를 일부로밖에 느낄 수 없는 부분을 완전히 잘라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리카는 미련 없이 퇴사를 선택했다.
– 가쿠다 미츠요, 《종이달》 중에서
리카는 어느 날 나이 든 고객의 집으로 외근을 갔다가 그의 손자인 대학생 고타를 만난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이들은 어느새 사랑에, 그러니까 불륜에 빠지고 만다. 리카는 돈이 필요하다는 고타를 위해 그의 할아버지가 예금해 달라며 맡긴 돈을 훔친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다. 액수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차피 고타는 고객의 손자다. 다시 채워 넣으면 된다. 그러나 고타를 위해, 자신을 위해 슬쩍한 돈의 액수는 서서히, 그리고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리카는 고객에게 가짜 예금 증서를 써주고 그 돈을 자신의 통장에 입금한다. 언젠가는 갚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남편은 너무 바빠서 벌써 며칠째 저녁을 함께 먹지 못했다거나, 자신을 건드리는 걸 거부한 지 4년이 지났다거나, 결국 조금씩 아이를 포기하고 있다거나, 실은 앞으로 부부가 같이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갈지 모르겠다거나,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진심도 아닐 젊은 남자아이와 잤다거나, 혹은 거래처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거나, 사소한 일로 상사에게 주의를 받았다거나, 지난 한 달 동안 천만 엔의 정기예금을 신규로 받았는데 평가받지 못했다거나, 그런 일상의 이런저런 일을 모두 잊고, 또 그런 이런저런 일과 일절 관계없는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런 류의 유쾌함이었다. 그 유쾌함은 그날 아침의 만능감과 비슷했다. 자신은 선택받은 누군가이며, 살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고,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다. 그런 기분이다.
– 가쿠다 미츠요, 《종이달》 중에서
소설은 수렁에라도 빠지듯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리카의 이야기에 그녀의 횡령과 도피 소식을 알게 된 그녀의 전 애인, 친구, 지인들의 이야기가 곁들여진다. 평범하게 사는 듯 보이지만 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그들의 삶 속에는 리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들 역시 언젠가, 어떤 상황에 처하면 리카 같은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품고 있다. 리카는 어떤 존재일까. 리카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리카는 무엇을 위해 그 일들을 한 것일까.
《종이달》을 읽다 보니 문득 프랑수아즈 사강의 에세이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19살 나이에 소설 《슬픔이여 안녕》을 출간한 사강은 유명세와 돈과 술과 마약, 가십과 스캔들에 휩싸여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마약 복용으로 기소되어 50대의 나이에 선 법정에서는 이렇게 선언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사강은 유명인들과 어울렸다. 결혼을 두 번 했다. 휴양지에서, 나이트클럽에서 흥청망청 즐겼다. 도박을 좋아했다. 스피드광이었다. 약물과 알코올에 중독됐다. 사치와 쾌락을 사랑했다. 그 결과 그녀는 막대한 빚을 지고 파산했다.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사후에 그녀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앞으로 남긴 빚은 그녀의 첫 소설만큼이나 기념비적이었다.
도박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시간이라는 모래시계를, 돈이 주는 중압감을, 사회가 가하는 ‘문어발식’ 속박을 잊게 한다. 도박을 할 때 돈은 결코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 어떤 것, 장난감, 플라스틱 칩, 다시 말해 교환 가능한 본성을 지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또한 진정한 도박사는 심술궂고 인색하고 공격적인 경우가 매우 드물며, 마음속에 너그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잃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소유를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모든 패배를 우연으로 간주하며 모든 승리를 하늘의 선물로 간주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 프랑수아즈 사강,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중에서
가계부를 쓰고 쓸데없이 외식하는 걸 싫어하고 100원, 200원에 벌벌 떠는 나와 프랑수아즈 사강은 완전히 다른 유형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사치와 쾌락에 관한 그녀 자신의 논리나 철학 같은 것에 이해가 되고 만다. 나 자신은 이렇게 살 수 없을지라도, 문득 ‘이렇게 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은 든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았다. 느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느끼려고 했다. 그녀는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삶의 정수를 맛보려 했다. 이 방탕한 삶 속에서 허우적대는 아름답고 가여운 영혼들에 경탄을 보냈다. 실패한 사람들, 타락한 사람들, 파멸한 사람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어루만졌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누구인가? 나는 나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시내에서는 시속 90킬로미터로, 국도에서는 110킬로미터로, 고속도로에서는 130킬로미터로, 머릿속에서는 600킬로미터로 달릴 것이다. 그러나 내 느낌으로는 시속 3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다. 법정이, 사회가 정한 절망의 모든 법칙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자유분방한 측정기들은 대체 무엇인가? 내 인생에, 내 하나뿐인 인생에 부과된 속도는 과연 무엇인가?’
– 프랑수아즈 사강,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중에서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손에 넣었다. 아니, 갖고 싶은 것은 이미 모두 이 손 안에 있다. 커다란 자유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예전에 이른 아침 역의 플랫폼에서 느낀 행복감이 플라스틱 장난감으로 느껴질 만큼, 그 기분은 확고하고 강하고 거대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무엇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지금 내가 맛보고 있는 이 엄청나게 큰 자유는 스스로는 벌 수 없을 만큼의 큰돈을 쓰고 난 뒤에 얻은 것일까, 아니면 돌아갈 곳도 예금통장도 모두 놓아버린 지금이어서 느낄 수 있는 것일까.
– 가쿠다 미츠요, 《종이달》 중에서
《종이달》을 읽으면서 리카의 친구이자 절약 정신 투철한 유코가 꼭 나 같아서 가슴이 쓰렸다. 그러나 나도 과거에는 소비로 공허를 달래는 아키 같은 여자였다. 나 역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시 아키가 될지도 모른다. 가즈키의 아내 마키코처럼 현실을 부정하던 날들도 있었다. 사실 내 속에는 괴물 하나가 숨어 있다. 지금은 용케 잘 눌러서 그놈을 잠재우고 있지만 그 놈은 죽지도 않았고 어디 가지도 않았다. 그놈은 때를 노리고 있다. 내가 약해졌을 때를 노려 불쑥 튀어나올 작정으로.
그 괴물은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기 일요일 밤이면 모습을 드러낸다. 환한 옷가게의 거울 속에서 나를 지켜볼 때도 있다. 누군가를 질투할 때,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나타난다. 이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는, 회오리바람 같은 의심에 휩싸일 때도 나타난다.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그것만 가진다면 내가 더 괜찮은 인간이 될 것 같다고 느낄 때, 사탕발림에 혹하고 비난에 좌절할 때 나타난다. 사는 게 버겁다고 느낄 때, 앞으로의 삶이 막막하다 느낄 때도 나타난다.
그 괴물은 충동구매나 과소비나 무절제나 방탕함의 이름을 하고 있다. 나는 내게도 그놈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기회만 되면 그놈 때문에 패가망신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럴 뻔한 적도 있었다. 신용카드로 돌려막기를 해가며 옷과 구두를 사들이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갖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미워했다. 커다란 여객선이 아니라 작은 파도에도 출렁이는 조각배를 탄 것처럼 살았다. 지금 나는 중간 크기의 여객선에 탄 것처럼 살고 있지만 실은 언제 조각배로 옮겨 탈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살고 있는 것뿐이다.
어쩌면 나 역시 어느 날 리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종이달》을 읽으면서 나는 남의 돈에 손을 대면 안 되겠다거나, 젊은 남자에게 빠졌다가 인생 종칠 수도 있다거나 하는 교훈 같은 건 얻지 못했다. 리카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이 슬픈 파멸은 어떻게 이다지도 인간적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리카가 저지른 일들에 심판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리카는 오로지 자신을 찾기 위해 돈을 썼고 남의 돈을 훔쳤다. 그뿐이다. 내게는 그 몸부림이 오히려 눈물겨웠다. 리카가 이런 덫에 빠진 것은 그녀가 지나치게 인간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동시에 파멸해가는 사람들을 사랑한 것 역시, 그녀가 지나치게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인간성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추잡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우리를 검은 수렁으로 끌어당길 무서운 힘 또한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부정한 채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다. 그것까지 맛보지 않고서, 끌어안지 않고서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다.
스피드에 대한 애호는 스포츠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도박이나 운명과 통한다. 그것은 사는 것의 행복과 통한다. 그 결과 행복 속에 늘 감도는 죽음에 대한 어렴풋한 소망에 이끌린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모든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스피드는 어떤 것의 표시도 아니고 증거도 아니다. 도발이나 도전도 아니다. 그것은 행복의 도약이다.
– 프랑수아즈 사강,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중에서
종이달
가쿠타 미츠요 지음ㅣ예담ㅣ356쪽
인지하지 않았다면 스쳐간 줄조차 몰랐을 일상의 것들을 가쿠타 미츠요의 시선으로 재조명한다. 각 인물은 나름의 불만과 평온을 껴안고 살아가면서 자신을 지배하는 감정의 독에 빠지게 된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자아의 온상을 보여준다.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ㅣ소담ㅣ216쪽
도박, 자동차 경주, 연극, 영화 등 그녀의 열정을 사로잡았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가진 그녀를 통하여 우리 삶을 솔직하게 돌아볼 수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 그녀의 상흔이 드러나는 자욱이다.
글 한수희
사진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