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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 아직 나이테는 흐릿하지만 초록빛을 내뿜으며 힘차게 자라난다. 대구에서 만난 네 사람은 그런 존재였다. 세월을 품은 고목 같은 대구의 역사와 장소들 사이에서, 저마다의 꿈을 갖고 한 발씩 나아가는 사람들. 이 도시의 새 장면은 그렇게 빚어지고 있었다.
최수진 CSO
“이상하고 아름다운 씨소.” 소개 문구만큼이나 개성이 돋보이는 식물들은 흔하지 않은 조합과 형태로 최수진 씨의 손에서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토록 이상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엮어내고 있을까. 대구 중구 동인동의 한 3층 건물. 널찍한 창이 건물 한 바퀴를 빙 두르고 있어 식물 사이사이로 비치는 해가 좋았다. CSO를 가꾸고 매만지는 수진 씨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취향을 담아 꽃을 엮는 중이었다.
문구사나 장난감 코너, 길가의 빈티지 상점…. 수진 씨는 알록달록한 색과 다양한 모양이 가득한 공간에서 취향을 우연히 마주치는 일을 좋아한다. 마음에 닿는 물건을 수집하고 조합해 작품을 만드는 일은 오랜 취미. 처음부터 꽃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오랫동안 어머니가 운영하던 꽃집도 곁에 놓인 익숙한 장면일 뿐이었다고. 하지만 어머니를 도우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재료로 꽃을 다시 인식하게 됐다. 플로리스트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추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그렇게 수진 씨는 CSO를 열었다. 하루 종일 꽃을 엮는 건 그에게 놀기와 다름없었단다. 흙을 주면 자라나는 식물의 생명력에 감탄하고, 아름다움을 보며 내면의 무언가를 해소할 수 있었다. “이 일을 일로 여기지 않는 이유는 재밌어서예요.” 열띤 목소리로 꽃과 함께하는 삶이 재밌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이곳은 그에게 놀이터와 다름없구나, 생각했다.
CSO라는 이름은 수진 씨가 자주 쓰던 인터넷 아이디에서 첫 세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곳의 색깔과 방향이 곧 CSO이길 바라며 연상되는 의미가 없는 이름을 선택했다. 가게가 자리한 동인동은 관공서와 회사가 많아 직장인들이 자주 오가고, 동성로도 가까워 젊은 사람들도 쉽게 들를 수 있는 곳이다. 수진 씨는 그들과 대화하며 작품을 만들어내길 좋아한다. 손님들이 바라는 색감과 분위기에 CSO만의 스타일을 불어넣어 개성을 한 스푼 담는다.
CSO는 꽃집을 넘어 수진 씨의 취향과 꿈에 맞닿은 형태로 나아가고자 한다.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더 재미있는 작업을 마음껏 해나가는 것이 목표다. 자유로운 아름다움을 좇아 CSO는 한 걸음씩 대구에서의 날들을 내디딘다.
백기호 할타보카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익히 들은 대로 곳곳에 학원이 가득하다. 우르르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작은 가게에 도착했다. 아이와 어른 너나 할 것 없이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나오는 이곳. 수제 젤라토 전문점 ‘할타보카’다. 대구에 젤라토 전문점이 전무하던 무렵, 백기호 씨는 노점에서부터 10여 년 동안 묵묵하게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매일 하루를 충실히 보내며 만촌동 사람들의 손에 시원하고 행복한 기억을 쥐여준다.
백기호 씨가 아이스크림 스쿠퍼를 처음으로 손에 들었던 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을 때.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는 시드니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우연히 젤라토 제조법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멜버른에서 젤라토 수레를 끄는 한 남자를 만났다. 달콤하고 낭만적인 장면에 반한 그는 대구 안지랑 곱창 골목으로 가 노점을 열었다. 젤라토 전문점 하나 없던 대구에서 원재료를 아끼지 않고, 기성 아이스크림에 없던 맛을 선보이기 위해 애썼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맑게 거리에서 디저트를 선보이는 젊은 청년은 손님들의 응원을 듬뿍 받았다.
만촌동에 지금의 가게를 내고도 더 맛있는 젤라토를 선보이고 싶었다. 정통을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지만, 생각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젤라토는 클래식하고 멋있었지만, 다녀오니 오히려 저희 가게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싶었어요. 만촌동 사람들이 매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젤라토를요.”
할타보카는 유행으로 손님들을 자극하기보다, 기본에 충실하되 창의적인 맛을 선보이려 애쓴다. “제가 가수 장기하를 좋아해요(웃음). 일상적인 언어로 재밌고 세련된 음악을 만들잖아요. 할타보카도 비슷해지고 싶어요. 우리를 그의 음악에 비유한다면 맛은 멜로디, 신선하고 독특한 재료는 가사일 거예요.” 오래 고민한 답변이라며 웃는 그에게 자부심과 애정이 비쳤다. 소박한 재료로 근사한 젤라토를 만들어내는 이의 꿈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큰 계획을 세우기보다 매일에 충실하는 것.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으로 자리한 가게가 되는 것. 손님을 다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할타보카에서는 진심이 넘쳐 흐른다.
강경민 더커먼
“What Is The Common Life(보통의 삶은 무엇인가)?” 대구 중구 동인동에 자리한 ‘더커먼’의 간판에 새겨진 문구다. 이곳을 운영하는 강경민 씨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이들에게 더커먼은 문을 활짝 열고 다정한 한 끼와 필요한 만큼의 물건을 내어준다. 작지만 큰 목소리로 대구를 조금씩 밝혀간다.
더커먼에 들어서니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한쪽에는 지구를 아끼는 물건들이, 중앙에는 식재료와 생필품이 담긴 통이 놓여 있다. 불필요한 포장을 줄이도록 손님이 직접 용기를 가져와 원하는 만큼만 덜고, 그 무게에 따라 값을 지불하는 방식이란다. 맛있는 음식 냄새도 솔솔 풍긴다. 박스를 재활용한 메뉴판을 살펴보니 채소 기반 요리로 가득하다. 구운 채소 렌틸 커리, 팔라펠 샐러드….
어릴 때부터 동물을 특별히 아끼던 경민 씨는 공장식 사육의 실상을 접하면서 그와 맞닿은 환경, 다양한 사회 문제까지 빠르게 관심을 넓혀갔다. 지속가능성에 더 깊이 빠져들수록 직업과 관심사 사이에서 괴리를 느꼈다. 그는 서울에서 상품과 매장을 매력적으로 연출해 소비를 유도하는 일을 했기 때문. 수많은 제품이 일터에 들어왔다가 단숨에 버려지는 모습을 보면서 회의감이 쌓여갔다. 결국 고향 대구의 한 사회적 기업으로 이직했다.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은 여행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커져갔다. “사람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제가 충만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떤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오프라인이라는 걸 깨달았죠. 사람들에게 좋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더커먼은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고 문화예술인들이 삶을 공유하는 커뮤니티, 모임 장소로도 기능한다.
“서울로 본거지를 옮겨볼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최근에 종종 오시는 손님이 딸에게 남긴 방명록을 읽고 생각이 달라졌죠. ‘딸, 엄마는 여기가 좋아. 네가 앞으로 자랄 세상은 이런 공간으로 가득한 골목이었으면 좋겠어.’ 대구에 있는 분들에게 이곳이 의미 있는 공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민 씨가 이야기하는 주제들은 비교적 서울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기에 대구에서의 활동은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
배현재 페이퍼보이스튜디오
신문 배달부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문을 배달한다. 그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문구를 소개하고 싶은 사람. 문구 편집숍 ‘페이퍼보이스튜디오Paperboy Studio’를 운영하는 배현재 씨다. 여행이나 인턴 생활로 타지에 잠시 머문 때를 제외하면 대구를 떠난 적이 없다고. 애정을 쌓고 부은 자신의 터전에서 ‘트래블러스 노트’를 중심으로 매력적인 문구를 선보인다. 유쾌하고 친절한 사장님 덕에 손님들은 문구를 한 뼘 더 알아간다.
대구 중구 봉산동은 1980년대부터 화방과 갤러리가 많이 들어선 동네다. 문구 편집숍을 열 공간을 찾던 무렵 배현재 씨는 이곳을 떠올렸다. 대학교 졸업 전시회가 봉산동에서 열렸을 때, 동네 분위기와 매력이 인상 깊게 마음에 남아 있었다. 당시는 고시원도 많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카페와 편집숍이 들어서며 젊은 층이 모이는 곳이다.
현재 씨는 일본의 문구 회사 ‘디자인필Designphil’에서 제작하는 트래블러스 노트를 대구에 소개하고 싶어 숍을 열었다. 트래블러스 노트는 여행자의 노트를 콘셉트로, 내지와 표지를 자유롭게 선택하며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세계 각국에 파트너숍을 유치하는데 국내에서는 페이퍼보이스튜디오를 포함해 단 네 곳뿐이란다. 현재 씨는 그림을 유난히 좋아하던 아이였다. “낙서를 좋아해서 공책보다 그림 그릴 연습장을 더 많이 샀어요(웃음). 친구들이 제가 어떤 문구를 쓰는지 물어보더라고요. 그때부터 새로운 문구에 관심을 많이 가졌죠.” 미술대학에 입학하고 디자이너가 된 후로도 필기류와 노트를 향한 애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손님들에게 재밌고 친절한 사장님으로 기억된다. 손님이 관심을 보이는 제품은 활용법과 특징을 세세히 설명해 준다고. 유쾌한 사장님만큼이나 가게 곳곳에는 “과도한 예술혼은 집에서.”, “보물: 보시고 물어보세요.”처럼 재밌는 문장이 걸려 있다. 일본 문구 브랜드 ‘미도리’ 제품과 다양한 펜, 스탬프, 리빙 브랜드 ‘HAY’의 소품까지 다양하게 선보이는 이곳. 앞으로도 개성 있는 제품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고자 한다. “문구 숍은 손님들이 들어오면 감탄사부터 시작하세요. 그분들을 보면서 힘을 얻죠. 더 다양한 볼거리를 보여주고 싶어요.” 굿즈와 행사까지, 재밌는 공간을 만들어가기 위한 계획은 오늘도 계속된다.
글 차의진
포토그래퍼 장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