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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작가 캐롯
이토록 특별한
캐롯
색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 감정의 색깔을 맞추고, 등장인물의 색깔을 완성해나가는. 아무것도 밝히지 않는 이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토록 보통의, 이토록 특별한.
이토록 보통의
캐롯 | 문학테라피
다음 웹툰에서 연재되는 옴니버스 단편 만화. 결코 평범하지 않고 보편적이지 않은 연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랑하는 연인의 전 애인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고백, 허언증을 가진 여자의 진실되고 거짓된 사랑,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에이로맨틱 남자와의 만남 등 쉽게 정의 내리기 힘든 관계가 우리에게 질문을 건넨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 얼기설기 복잡한 연애 감정은 무너진 마음의 둑을 비집고 들어온다. 사랑이란 게 원래 그렇지만.
Interview
웹툰 작가 캐롯
“평범하고 편안해 보이는 연애도 그 안에 엄청난 드라마가 담겨 있잖아요. 각자 상처가 있고, 평범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들만의 트라우마가 있어요. 그래서 반대로도 생각해 봤어요. 겉으로 특수하고 드라마틱해 보이는 연애도 결국 보편적이고 보통인 사랑의 형태일 거라고요.”
캐롯 작가님은 나이, 성별 등 아무것도 공개하지 않고 있어요. 이렇게 미스터리한 인터뷰는 처음이에요.
제가 그린 만화를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내보인 곳이 디시인사이드였어요. 연애나 일상 속 감정에 관한 《삶은 토마토》를 그렸죠. 그런데 게시물에 제 성별이 드러나면 성별 프레임 안에서 댓글이 달리는 것 같더라고요. 여자인 것 같으면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인 것 같으면 남자이기 때문에 만화를 이렇게 그리는 거라는 평가가 많았어요. 그런데 정체를 밝히지 않으니 성별과는 상관없이 만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게 되더라고요. 그게 좋았어요. 물론 이야기 안에 제 개인적인 일화가 담길 수는 있겠지만, 독자들이 만화를 볼 때 저라는 인물 때문에 흐름을 이해하는 데 방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더라고요. 무향, 무취, 무색의 캐릭터를 더욱 내세우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벌어지는 재미있는 일들도 있어요.
어떤 일이요?
제 성별이 불확실하니까, 동성한테서 러브레터가 온다든지(웃음).
앞으로도 작가님의 정체를 밝힐 계획은 없는 건가요?
운명적인 일이 아니라면, 최대한 미루고 싶어요. 독자들이 제 모습을 상상하는 건 사실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분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저를 상상할 테니까요. 그 정도는 제 만화 감상에 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건 조금 다른 얘기 같아요. 실망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피하고 있어요. 그게 가장 큰 이유예요.
《이토록 보통의》는 단편 옴니버스 작품이에요. 에피소드마다 이야기가 신선하고 독특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어요.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는 편인가요?
제가 산책을 무척 좋아해요. 산책할 때 잡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그때 질문이 막 떠올라요. 주로 하루 종일 혼자 있는 편이어서 자기와의 대화를 할 시간이 많기도 하죠. ‘뭐 먹지?’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도 해요. ‘그때 그 사람은 내게 왜 그랬을까?’, ‘걔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하는 것들이요. 가끔은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와 미래에는 자주 만나지 않게 될 수도 있겠다, 하는 상상 섞인 생각도 해요. 《이토록 보통의》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무슨 말을 해도>는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의 전 남자친구가 에이즈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시작되죠. 이 이야기는 어느 날 너무 예쁜 커플을 보다가 떠올랐어요. 사랑에 빠졌을 때 상대방이 너무 예뻐 보이잖아요. 예쁜 걸 선호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니까 아름다울 때 보듬어주는 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만약 이게 오염이 된다면? 그리고 그게 나 또한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다면? 그때도 사랑을 견고하게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했어요. 그런 식으로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편이에요.
죽은 연인의 복제인간과 사랑에 빠지고, 허언증에 걸린 여자애와 연애를 하고, 사랑을 느낄 수 없는 남자를 고통스럽게 사랑하는 등 《이토록 보통의》에 등장하는 연애는 결코 보통이 아닌 것 같아요.
사실 평범하고 편안해 보이는 연애도 그 안에 엄청난 드라마가 담겨 있잖아요. 각자 상처가 있고, 평범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들만의 트라우마가 있어요. 그래서 반대로도 생각해 본 거죠. 겉으로 특수하고 드라마틱해 보이는 연애도 결국 보편적이고 보통인 사랑의 형태일 거라고요. 어떤 상황에서 영웅적인 일을 하는 건 작품으로 다룰 게 많을 거예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영웅적인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도망가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냥 보통의 일이죠. 그런 것들에 주목하고 싶었어요.
이런 상상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매번 다르지만, <티타 이야기>를 먼저 보자면,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 허언증이 있던 친구가 문득 떠올랐어요. 그 애는 잘 살고 있는지 궁금했죠. 그런데 홍대에서 그 친구를 마주쳤어요. 진한 보라색 머리를 하고 눈에 띄는 모습으로 “캐롯아, 잘 지냈어?” 하면서 어떤 차에 타더라고요. 그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고, 그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요. 그날을 같이 보냈더라면 그 친구의 내면을 더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거예요. 과거에 기댈 수 있기도 할 거고요. 질문에서 시작하는 거죠. 또 어떨 땐 타인의 행동을 구경하면서 생각하기도 해요. 재미있어요.
문득 작가님의 청소년기가 궁금해졌어요.
엉망진창이었죠(웃음). 고등학교 3학년 땐 학교를 잘 못 나갔어요. 건강이 좋지 않았거든요. 중고등학교 때는 엄청 조용하게 만화책만 읽고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하는 학생이었어요. 그게 편했거든요. 그러면서도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못 나가서 혼자가 되면 나 자신을 비운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나갔죠. 우울한 감정이 그때부터 조금씩 생긴 것 같아요.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술과 향락에 빠져 20대 초중반을 보냈어요. 지저분한 연애도 많이 하고 엉망진창으로 살았죠. 그래서 저는 나이 드는 게 좋더라고요. 과거보다 지금이 더 나으니까요.
디시인사이드에서 웹툰 작가로 출발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편이에요. 요즘엔 웹툰 작가가 되는 게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베스트 웹툰에 도전하는 경우는 허들이 조금 높아요. 주목받기도 힘든 편이고요. 커뮤니티는 일단 아무런 경계가 없고, 무엇보다 그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친목 활동이 금지다 보니 개인의 익명성을 완전히 보장받을 수 있었어요. 제가 갑자기 사라져도 흔적이 남지 않는 느낌이었죠. 제가 원래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웹툰 작가가 되려고 한 건 아니었고요, 다만 우울해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당시 회사에는 야근이 워낙 많으니까 ‘닭장’이라고 불리던 숙소가 있었어요. 그런데 같은 방에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까 마음대로 불을 켤 수가 없잖아요. 그때 달빛 받으면서 그린 게 《삶은 토마토》였어요. 해방구 같은 느낌이었죠. 어떻게 하다 보니 지금은 직업이 되었네요.
《삶은 토마토》부터 《이토록 보통의》까지 취미로 그린 것들이 모두 정식 웹툰으로 발행되고 있어요.
일할 때 만화를 그리는 게 유일한 취미였는데, 《삶은 토마토》를 정식 연재하게 되면서 갑자기 일이 되어버리니까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또 다른 취미로 《이토록 보통의》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삶은 토마토》 마감 끝내고 지쳐 있으면 《이토록 보통의》를 그린 거죠. 초반 분량도 아주 짧아요. 웹툰 연재용으로 그린 게 아니었거든요. 나중에 다음 웹툰에서 《이토록 보통의》가 정식 연재된다는 소식을 듣고 알바 하다가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질렀어요. 사람들한테 아이스크림도 막 쏘고. 제 인생이 많이 바뀌었죠.
얼마 전에 웹툰 작가들의 근로 환경이 대두되기도 했었죠.
솔직히 말하면 제가 계약서를 잘 안 읽거든요. 심지어 담당자님이 계약서를 읽어주셨는데도 졸았어요(웃음). 그래서 지각비에 관한 부당 대우를 인지하지 못했어요. 그냥 원래 이 일이 그런가 보다, 생각한 거죠. 눈치가 없었어요. 거기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신 분들은 정말 똑똑하신 분들이에요. 그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의 빚이 있어요. 똑똑하고 적극적인 분들이 바꾼 거잖아요. 저는 그 부분의 수혜자인 거고요. 나중에 지각비를 돌려받았어요. 지각비를 떼인 줄도 몰랐거든요.
지각 많이 하셨나 봐요.
그런가 봐요(웃음). 저는 다들 원래 지각비 내나 보다 생각하면서 살았던 거죠. 저의 무지함과 무감을 깨달은 사건이기도 해요. 제가 조금 비겁했던 것 같아요. 저도 그 한가운데 있던 사람이었는데도 그냥 지나간 거잖아요.
이번엔 만화 안으로 들어가볼게요. <티타 이야기>는 사람들이 많이 동요한 에피소드예요.
작가는 두 가지 업무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먼저 철저하게 사전 설정을 해놓는 작가가 있어요. 만화에 직접 나오지 않더라도 등장인물의 배경이나 습관까지 설정해놓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또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첫 문장을 쓰고 나서 그들이 행동해나가는 걸 쓰는 경우가 있대요. 저는 에피소드를 한 번에 다 써둔 상태에서 작업을 들어가요. 그래서 스토리가 댓글이나 대중의 반응에 영향을 안 받는 편이에요. 이미 써둔 게 있어서 중간에 수정할 수가 없는 거죠. 등장인물에게 맡기는 편이긴 해요. 대화도 자연스럽게 쓰고요. 등장인물이 저는 아니지만 말투는 제 말투와 비슷할 수는 있을 거예요. 티타의 경우, 소녀들의 연애는 소년들의 연애보다 조금 더 로맨틱하다고 생각했어요. 감정 중심적인 부분이 있으니까요. 그런 것들이 공감을 얻을 만한 요소가 되었던 것 같아요. 소녀들이 성장하면서 느낄 법한 감정을 많이 그렸으니까요. 저 또한 그림을 그리면서 독자들의 이야기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저의 트라우마를 쓴 게 아니더라도, 어떤 결핍이 채워지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실제로 웹툰을 보는 독자들도 댓글의 도움을 얻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 연재하고 있는 <불륜 만화>는 반응이 뜨거웠죠.
처음 시작할 때 스토리를 다 써놓기 때문에 댓글이나 독자의 반응에 스토리가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속상할 때가 있죠. 이번에 댓글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반성도 하고, 또 솔직히 변명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요. 어떤 소재의 금기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됐거든요. ‘사람들에겐 다 트라우마가 있고 그 무게가 각각 다른데, 내가 어떤 소재를 금기할 수 있나? 각자 자기의 트라우마가 가장 큰데.’ 하면서요. 그래서 어떤 소재도 금지하면 안 된다고 판단하게 됐죠. 그렇다면 살인도 다루면 안 되니까요. 왜 이런 소재를 선택했냐는 반응은 조금 속상하더라고요. 실제로 불륜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하나의 소재를 다루기 위해서 더 많이 고민하고 신중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앞으로도 소재를 제한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아주 신중하게 고민할 거예요. 시즌3에서는 더 자극적인 소재가 나올 수 있거든요.
댓글의 갑론을박이 엄청 다양했어요.
저도 조금 속상하던 부분이 저는 그 주인공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주인공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주인공이 수긍하는 걸 제가 인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가끔 그 부분을 혼동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는 작가의 작품은 도저히 못 보겠다고 결론을 내리는데, 끝까지 보면 조금 더 크게 볼 수 있어요. 미화의 의도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주인공이 얼마나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려고 그린 거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1인칭 화자의 시점이다 보니까 오해를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작가 생활을 얼마 안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할 기회가 생긴 건 좋은 것 같아요. 웹툰이라는 게 작가에게 엄청 유리한 장치 같더라고요. 비난이든 칭찬이든 독자들에게 바로 피드백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독자들이 제가 생각지 못한 부분을 캐치해낼 때가 있어요.
그럴 때에 기분 좋죠?
너무 좋아요. 종종 미리보기 분량에서 독자들이 오타나 제가 인명을 혼동한 경우를 짚어낼 때가 있거든요. 심지어 결정적인 장면인 적도 있었어요. 그럴 땐 웹툰은 독자들과 함께 만드는 거구나, 싶어요. 그리고 독자들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의견을 남기면, 다양한 방면으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어요. 그 과정에서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기도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준비할 때 많은 자양분이 되어주죠. 제가 성장해나갈 수 있는 형태 같아요.
계속해서 평가를 받는다는 게 두렵지 않으세요?
어려운 일인 건 맞아요. 처음 만화를 시작했을 때 일주일에 두 번씩 평가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도 회사 생활을 했잖아요. 서류를 내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전에 상사한테 보여주는 게 불편하고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일주일에 두 번씩 아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지난 한 주 동안 제가 이걸 했습니다.’ 하고 보여주고 평가받는 느낌이었어요. 초반에는 비판 댓글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 힘들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큰 맥락에서 그것 또한 하나의 대화인 거예요. 친구만 해도 욕해주는 친구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대화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러고 보면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이니셜인 경우가 많아요.
옴니버스 웹툰으로 《삶은 토마토》를 시작했을 때 주인공 이름으로 너무 고생했거든요. 이름을 대폭 줄이고 싶었어요. 독자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대상에만 이름을 주고, 주변 인물이나 관찰자에게는 이니셜을 줬어요. 나중에는 뒤죽박죽됐지만요.
캐롯 작가님 만화의 특징 중 하나는 색연필 색칠 방식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독특하고 아름다워요
제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 꼭 하는 말이 있어요. 못 배워서 그렇다고(웃음). 제가 콘티도 안 만드는 작가거든요. 감각과 기분에 의존해서 작업해요. 약간 놀이하는 기분으로 재료를 선택하는데요, 그 재료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해요. 마커를 쓸 때도 마커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처음에는 물도 묻혀서 써보기도 하면서, 사용법이 조금 더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색깔도 막무가내로 기분에 따라서 쓰거든요. 재미있게 그리고 있어요. 실제로 제 능력 밖이기도 해서….
《이토록 보통의》의 두 번째 에피소드인 <어느 밤 그녀가 우주에서>가 영화로 제작된다고 들었어요. 죽은 연인의 복제 로봇이 나보다 나의 복제 로봇을 더 사랑하는 이야기였죠.
저는 원작자로만 있고 영화 제작은 앞으로 진행될 예정이에요. 사실 원작자가 개입하는 경우도 많다고 해요. 미리 영화 시놉시스와 진행 개요를 보여주는데 저는 잘 안 읽는 편이에요.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을 정해놨거든요. 그건 다른 분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침범하고 싶지 않고 그분의 예술을 존중하고 싶거든요. 개입할 수 있는 능력도 안 되고요(웃음).
영화 제작이라니. 3년 전의 캐롯은 오늘의 캐롯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놀라운 날들의 연속이죠. 어느 날 뮤지컬 제작 관련해서 미팅을 하는데 저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이 저에게 말도 안 되는 대우를 해주시는 거예요. 저를 작가님이라고 불러주시고, 존중해주시고. 그러니까 사람이 이상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아무것도 아닌데 거만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침착해지는 데 일주일이 걸렸죠. 안 그러면 제가 착각하게 될 것 같더라고요. ‘착각하지 말자, 착각하지 말자’, 자꾸 마인드 컨트롤을 했어요. 수익적인 부분도 형편이 나아지면서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는 게 느껴졌어요.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제 모습이 좋았는데 점점 제 모습이 사라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초반에 스스로 다잡으려고,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노력했어요. 우스운 사람이 되는 거 정말 웃기잖아요.
보통 작업물의 영감은 어떻게 받는 편이에요?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한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왜 그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마음속으로 파고들어가서 생각해요.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보기도 하고요. 저한테 “파란색 스웨터 입었네? 파란색 스웨터 잘 어울린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하면, 왜 파란색 스웨터가 먼저 눈에 들어왔을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이곳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상상을 하는 거죠. 그러면서 스토리도 나오고요. 관찰과 상상이 중요하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어때요?
행복하지만 사실 이게 엄청 중노동이거든요. 저 혼자 모든 걸 다 처리해야 하니까요. 자세도 많이 비뚤어지고 골반도 틀어지고 팔꿈치에 습진도 생겼어요. 또 저는 마우스도 많이 써서 손목도 약해졌죠. 실제로 작가들이 암도 많이 걸린대요. 잘 안 움직이고, 컴퓨터 앞에서 세 끼 다 먹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세 끼를 전부 컴퓨터 앞에서 먹거든요. 그래서 규칙적인 생활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일찍 일어나고 규칙적으로 자고 운동하는 생활이요. 그게 저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망가지면 정말 힘들거든요.
만화를 보는 내내, 등장인물들의 입말이 아주 유려하다고 생각했어요. 책을 많이 읽는 편인가요?
책을 많이 보는 건 아닌데 좋아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읽고, 자기 전에 읽어요. 책과 친해요. 그보다 사실 제가 사람을 정말 좋아해요. 쉽게 믿고 쉽게 마음을 주는 편이죠. 너무 사랑해요. 이해를 못 할 사람이 없다고 믿어요. ‘나 강아지 좋아해.’, ‘나 고양이 좋아해.’처럼 저는 사람을 좋아해요. 제 자존감 문제와도 연관이 있을 것 같네요. 원래 저는 자존감이 무척 낮은 사람이었어요. 지금은 충분히 타협하는 부분이 생겼고 나만큼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는 걸 알지만, 옛날에는 자존감이 무척 낮아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멋있어 보이고, 제 옆으로 여자 한 명이 지나치면 그 사람을 저랑 바꾸고 싶었어요. 그래서 연인을 많이 괴롭히기도 했죠. 저는 항상 감정적으로 엉망이었거든요. 제가 3개월 정도 유럽 여행을 혼자 간 적이 있어요. 타지에서 여러 유형의 사람을 만나잖아요. 그때 ‘사람이란 별 같은 거구나. 개개인이 너무 멋있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을 무척 좋아해요.
기질적으로요?
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꽃 보는 거 좋아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하나하나 예뻐서, 사람들 보는 걸 좋아해요.
이름이 ‘당근’이 된 이유도 궁금해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웃음). 제가 빵과 과자를 정말 좋아하는데 디시인사이드에서 만화를 연재할 때 한창 당근 케이크에 꽂혀 있었거든요. 조금 후회해요. 이게 저의 영원한 이름이 될 줄 몰랐거든요. 조금 더 멋있게 지었어야 했는데.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캐롯’ 치면 저보다 립스틱 캐롯색, 캐롯 케이크가 먼저 나와요. 검색하면 나만 나오게 했어야 했는데!
사실 웹툰에서 19금 표시를 다는 게 어려움이 있다고 들었어요.
다음 웹툰에서는 19금을 안 달기를 바랐어요. 수위를 자체적으로 낮춰서 전체연령으로 맞추라고 하셨죠. 19금 달면 로그인을 해야 볼 수 있어서 독자 수가 현저히 낮아지거든요. 그리고 다른 콘텐츠 채널과 연동해서 보여줄 수도 없고요. 제 만화가 야해서 19금은 아니긴 한데, 신체의 부위를 가리는 방식으로 하면 수위를 낮출 수는 있었어요.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연애 이야기에서 남녀가 옷을 벗고 있는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침대에서 옷을 갖춰 입은 모습보다는 조금 더 풀어진 모습이 그런 느낌을 더 잘 살릴 수 있잖아요.
그런 제약이 있는데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너무 감사해요. 제가 독자들 덕분에 그린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정말 진심이에요. 그림을 봐주는 사람들이 없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거든요. 그리고 만화를 시작하면서 제 삶이 정말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계속해서 그리고 있어요. 카프카도 사실 서랍장에 있던, 친구에게 불살라 달라고 부탁했던 원고를 친구가 세상에 선보여서 카프카가 나올 수 있었잖아요. 어쨌건 카프카의 입장에서는 숨기고 싶었던 것이 드러나게 되어서 생각해볼 일이긴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글이어도 사람들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좋은 글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비판을 받더라도 모든 게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어떤 나날을 보내고 싶은가요?
오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요즘 친구들 만나면 나이 얘기를 많이 해요. 두려워하고 있죠. 그런데 저는 나이 먹는 게 기대되거든요. 그래서 더욱 응원해주고 싶어요. 나이 먹으면서 더 성장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나중에 독자들 앞에 서더라도 그분들을 너무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노력이 많이 필요하겠죠.
로우어 가든
A. 서울 서초구 사평대로57길 28 1층
T. 010 7941 7919
O. 11:00~22:00, 월요일 휴무
에디터 이자연
포토그래퍼 박은진 장소 협조 로우어 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