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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누리는 네 가지 방법
지난가을, 서울에서 안면도로 가는 서해안고속도로 위에서 방음벽 너머로 보이는 언덕을 발견했다. 완만한 경사에 촘촘히 박힌 잔디, 주변에 높은 건물도 없고 쓸데없이 나무를 일렬로 심어놓거나 알림 표지판 따위를 꽂아 놓지도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운전하다가 그야말로 평화의 언덕이라 부를 만한 곳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차를 세울 수도, 주소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언덕을 스쳐 지나가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 키는 말도 안 되게 작지만 똑똑한 나의 동료 한 명이 애인과 통화할 때만 꺼내던 핸드폰을 내게 보여줬다. “제가 지피에스 찍어뒀어요.”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위성의 도움을 받으며, 스마트하게 시작되었다. 모든 게 다 잘될 줄 알았다.
서울에 돌아와서 다시 차분한 굴레로 들어왔을 때에도 그 언덕은 뜬금없이 생각나 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천국의 엉덩이가 있다면 그렇게 크고 둥글게 생겼을까,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염없이 걷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왜 단순한 모양에 그토록 마음을 빼앗겼을까, 한동안 이래저래 화려한 풍경에 취해 있던 탓이거나 단순히 언덕 자체의 멋을 슬쩍 목격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언덕 생각만 하면 한동안 기분이 좋았다.
“요즘 눈썰매 타려면 다들 어디로 가?” 언덕에 가자는 계획을 세운 건 그런 질문이 나온 당일이었다. “눈 쌓인 언덕이라면 최고의 엉덩이지. 아니, 최고의 썰매장이지.” 내가 외쳤다. 우리를 다시 출발선으로 올려다 줄 리프트는 물론 없겠지만, 나머지는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한 장애물도 없고 여러 언덕의 경사가 제각각이니 다양한 속도와 풍경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시끄러운 꼬마들도 없고 녀석들을 부추기는 극성스러운 엄마들도 당연히 없겠지.
티켓을 끊고 오세요,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귀찮게 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어묵이나 라면을 파는 가게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큰 보온병을 들고 가면 될 일이었다. 언덕을 발견하던 날 함께 있던 회사 동료들 몇몇이 함께 가겠다며 나섰고, 가뿐하게 눈썰매 대 작전의 막이 올랐다. 때는 한파에 움츠려 보내던 겨울의 한가운데, 이번에 내린다는 큰 눈이 일주일 뒤까지 녹지 않길 바라며 우리는 한 주를 더 보냈다. ‘하루쯤은 썰매나 타도 괜찮겠지.
이틀째 야근도 했고 고양이는 이제 다 커서 나를 반기지도 않아.’ 계획은 그렇게 1박 2일로 정해졌다. 출발하기 하루 전, 예약해 놓은 민박집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엉덩이 위에 눈이 아직 남아 있느냐고 재차 확인했다. “응, 있지.” 이틀 간격으로 세 번이나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을 해줬는데, 그걸 또 의심해볼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차에서부터 눈 위를 신나게 미끄러질 때의 표정을 하고 충청남도 서산으로 향했다
눈은 없었다. 서산시 운산면은 눈 대신 온통 마른 풀들이 뒤덮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둘러봐도 눈이 쌓여있다고 말할 만한 언덕이 없었다. 화가 나기보다 막막했다. 눈썰매 타는 모습을 찍어 오겠다며 나무로 만든 접이식 눈썰매도 다섯 개나 빌렸고 필름도 다섯 통이나 챙겼는데, 눈 위에서 탭댄스를 춰도 물 한 방울 들어오지 못하게 긴 부츠를 신었는데, 눈은 없었다. 절망적인 마음을 잠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어 민박집 아주머니를 찾았으나 내내 통화했던 분은 무슨 검사를 받는다며 병원에 가고 없었다. 병원 근처 언덕에 눈이 잔뜩 쌓여있었던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민박집을 대신 봐주고 있는 아주머니는 약간 무섭게 생겨서 얘기해도 소용없을 말은 붙이고 싶지 않았다. 5만원에 방을 예약하고 왔는데 늦게 도착했다며 6만원을 내라고 할 때도 나는 별말 없이 꺼내줬다. 인생이 다 그런 게 아닌가. 방에 수건이 없길래 넉살을 부리며 “만원 더 드렸으니 수건 좀 몇 장 주세요.” 했다가 괜한 욕만 한 바가지 먹었다. 서랍에서 수건 대신 장총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와중에 다행이랄 게 있다면 우리 일행이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럴 때 크게 낙담해 우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정말 곤란해질 텐데 생각해 보면 참 괜찮은 친구들이다. 잔디 위에서 썰매를 탈 수는 없나, 위기 앞에서 그런 식의 농담이나 던지며 키득키득대는데 상황이야 어찌 됐든 웃어서 좋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문제랄 게 있다면, 우리는 결국 잔디썰매인지 뭔지를 타보자는 데 마음을 모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에 모두 동의할 수 있는지, 물론 나도 찬성했지만 정말 문제가 많은 친구들이 아닐 수 없다. 언덕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노력해 봤지만, 당연히 썰매는 미끄러지지 않았다. 밀어 보기도 하고 제일 가벼운 친구에게 힘을 더 빼보라며 응원도 해봤으나 소용없었다. 카메라를 잘 다루는 한 친구는 간단한 조작으로 사진에 속도감을 넣을 수 있다며, 멈춰 있는 썰매 위에서 박진감 넘치는 연기를 요구했다. 취재를 무사히 마쳐야 한다는 압박감에 잠깐 손도 올리고 고개도 뒤로 제쳐봤지만, 바보 같아서 금방 그만뒀다. 나만 한 건 아니고 다 같이 열심히 하는 바람에 나름 재미를 보기는 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있었던 일을 그대로 쓰자. 나름 재미있는데 뭐.” 열기구만큼 큰 엄지손가락이 우릴 누르는 것처럼 분위기가 잠시 무거워졌지만, 다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막상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편했다. 한껏 밝은 표정으로 잔디에 누워 쉬기도 하고 햇빛도 가득 받고 주변도 여유롭게 둘러봤다. 움직이지 않는 썰매에 앉아서 준비해 간 핫초코를 마시는 동안에는 정말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언덕과 하늘을 이용해서 친구들의 얼굴만 보이게 우스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바보처럼 뛰어다니기도 했다. 민박집 아줌마의 무서운 얼굴도 잊을 만큼 즐거웠다. “저희 4시에 돌아가니까 그때 밥 먹을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닭볶음탕이 먹고 싶어요.” 그런 전화를 하고 나니 기분은 거의 최고로 좋아져서 애써 누르느라 혼이 났다.
어쩐지 설명하는 타이밍이 지난 것 같지만, 이 아름다운 언덕은 사유지도 국유지도 아니었다. 축협에서 관리하는 땅으로 겨울을 제외한 3계절 동안 소나 돼지들이 뛰어놀 수 있게 꾸며놓은(?) 땅이었다. 가축들이 250일 동안 실컷 놀다가 가버렸다고 생각하니 마치 텅 빈 놀이동산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잠시 들떴지만, 역시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썰매도 여전히 멈춰있고.
우리는 한껏 여유를 즐기다가 민박집으로 돌아가 닭볶음탕을 먹고 맥주도 마시고 마당에 나가 강아지들을 구경했다. 하얀 진돗개 백구(백구가 바로 하얀 진돗개라는 걸 저도 알지만 개 이름도 정확히 백구입니다)는 얼마 전에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았는데, 강아지들은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볏짚 위에 몸을 포개고 누워있었다. 앞도 보이지 않으면서 내가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백구가 들어가는 걸 잘도 알아챈다. 백구처럼 사뿐사뿐 걸으며 들어가 봐도 역시 내가 들어왔다는 걸 알고 알은체를 안 한다. 그런데 그러든 말든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멋진 책을 한 권 다 읽은 것보다 심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봤을 때보다 기분이 좋다. 꿈틀꿈틀, 어쩌면 나보고 우리에서 나가라고 거부감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렇게 여유로운 한때는 금세 지나가 버리고 주변이 어두워졌다. 이제 짐을 챙겨 떠날 일만 남아 있었다.
나는 떠나기 전 민박집 아주머니와 사이 좋게 사진을 찍었다. 어쨌든 그 아주머니가 눈이 있다고 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늦어 제시간에 잠을 못 자게 한 것도 사실이고, 실제로 장총을 꺼낸 것도 아니고, 닭볶음탕도 맛있었으니까. 오묘한 정이 조금 들어버렸다. 사진을 핑계로 내가 옆구리를 껴안았더니 오른팔로 멋있게 내 목을 감는다. “다음에 또 올게요.” 맘에 없는 소리를 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쨌든 차는 출발했고 처음 언덕을 스쳐 지날 때처럼 민박집에서도 빠르게 멀어졌다.
어차피 솔직하게 말했으니 조금 덧붙이자면, 천국의 엉덩이는 도착하기 전의 마음이고 한 시간 정도 머무르기 좋은 곳이다. 샌드위치나 커피, 돗자리 등의 피크닉 용품을 가져가면 또 모를까, 과거의 나처럼 하염없이 걸어 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말리고 싶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다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나는 눈이 오면, 좀처럼 녹지 않을 폭설이 내리면 그곳에 한 번 더 가볼 작정이다. 눈이 내린 언덕은 어쩌면 천사의 무릎 같지 않을까? 아빠의 어깨, 아니면 스칼렛 요한슨의…. 어쨌든 썰매는 눈 위에서 타야 스릴이 있다. 눈이 아니라 잔디라면, 썰매에는 누가 앉아도 약간 멍청해 보일 것이다. 여행을 함께하기엔 역시 그런 친구가 좋긴 하지만.
에디터·포토그래퍼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