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이란

세상에 없는 마을

의외의 악마 소굴

“거, 잠 좀 잡시다!” 난데없는 호통이 신호탄이었다. 곰곰 따져보니 그 이전에도 전조 증상이랄 만한 것이 있기는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월요일마다 방영하는 〈우리말 겨루기〉를 보고 있었을 때니까 오후 8시 안팎이었을 테다.

집 안에 별안간 낯선 전자음이 울렸다. 나보다 먼저 상황을 파악한 아빠가 인터폰 버튼을 누르니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19층이죠? 관리사무소인데요. 아래층에서 소란스럽다고 연락이 와서요.” 난처하고 정중한 목소리. 어안이 벙벙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각 세 식구가 하고 있던 건 밥상 정리를 미루고 〈우리말 겨루기〉 정답을 맞히기 위해 머리를 모으던 일밖에 없었으니까.

머릿속이 시끄러우면 그러했지, 몸으로 하던 일은 숨쉬기나 일상 대화 정도였기에 난데없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기분이었다.

관리인께 설명할 자초지종도 없던지라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다.”며, 고생이 많으시다는 이야기로 일단락 지었는데 아래층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 너무 자주 인터폰이 울렸다. 관리인을 통해 들어오던 민원은 세대 간 연결로 이어졌는데, 그때 처음 들은 아래층 아저씨 목소리가 바로 이것이었다.

“거, 잠 좀 잡시다!” 뭘 하는데 그렇게 쿵쿵거리느냐는 말에 책을 읽거나 티브이를 보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던 세 사람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시끄러울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올라와서 확인해 보시라 해도 걸걸한 목소리로 호통만 치는 아래층 아저씨.

좁고 막다른 골목길에 갇혀 일방적으로 자동차 경적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 밤 공부 채비를 하던 때였으니 10시 남짓한 시각이었을 테다. 목이나 축일까 싶어 주스를 따르려다가 플라스틱 뚜껑을 떨어뜨렸다.

육중한 도마, 꽝꽝 언 얼음덩어리, 쌀 한 포대 같은 것이 아니라 내 엄지손가락만 한 플라스틱 재질의 일반 병뚜껑 말이다.

톡 떨어진 그것을 주워 페트병을 잠그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깜짝이야. 아래층 부부였다. 허리춤에 손을 올리곤 지금 뭐 하냐고, 시끄러워 못 살겠다는 아저씨.

오, 예민 보스. 주스 뚜껑을 떨어뜨렸다고 이야길 해도 도통 들을 생각을 않고 시끄럽다고, 살 수가 없다고 고함을 친다. 부부가 똑같은 데시벨로.

 

한낮 우리 집엔 40킬로그램이 채 안 되는 내향형 중년 여성이 홀로 집에 머문다. 집안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라디오를 듣는 정도의 생활을 한다.

소음은커녕 소리랄 것도 그다지 없는 집에 어김없이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두드린다. 시끄럽다고, 생활을 할 수가 없다고. 일어나서 걷기만 해도 인터폰이 울린다.

시끄럽다고, 잠 좀 자자고. 세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을 때도 문을 두드린다. 시끄럽다고, 대체 뭘 하는 거냐고.

밥 먹던 현장, 날 것의 생활상을 보여줘도 ‘내 알게 뭐냐’며 시끄럽다고 막무가내다. 다른 집 소음이 흘러 들어가는 걸까 유추해 봐도 알 길이 없고, 방음이 잘된 아파트라 건물을 탓할 수도 없다.

그저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들이 우리 아랫집에 사는구나 하고 체념할 수밖에.

 

어린 시절, 이웃에게 받은 사랑이 대단히도 커서 이웃과 얼굴 붉히는 상황이 몹시 속상했다. 관계를 개선해 본다고 부모님은 주스 세트를 들고 아랫집을 찾아간 적도 있는 모양인데 여전히 그들은 툭하면 우리 집 문을 두드린다.

이런 마찰과 살아온 탓에 우리 가족은 20년째 집에서 뒤꿈치를 떼고 걷는다. 얌전한 고양이들처럼.

이젠 생활이 되어 불편할 것도 없지만 외부인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왜 발을 그렇게 하고 걷느냐 묻는다.

외부인이 일반적인 걸음(뒤꿈치부터 발가락까지 차례로 바닥을 딛는)으로 집을 걸어 다니면 어김없이 인터폰이 울린다. 쿵쿵거리지 말라고, 시끄럽다고, 잠 좀 자자고.

우리 식구들은 이제 아주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숨죽여 웃는다. 누군가 “거 잠 좀 잡시다!” 하고 아랫집 예민 보스의 목소리를 따라 하는 까닭이다.

아래층 사람들에게 우리 집은 20년 동안 잠도, 생활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소음의 근원이자 악의 발생지일 테다. 기회만 된다면 그들에게 하루 정도 우리 집을 관찰할 기회를 주고 싶다.

놀라울 정도로 평범하고 지나치게 조용한 생활을 직접 본다면 그네들도 의아할 것이 분명하므로.

 

미라는 내 비밀 이웃

내 기억 속에는 세 개의 집이 있다. 소음 논란이 있던 집이 두 번째 집이라면, 첫 번째 집은 이웃 간의 교류와 사랑이 남다르던 동네의 아파트 1층 집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어린 시절 살던 첫 번째 집 마룻바닥에 곧잘 귀를 갖다 대곤 했다.

어떤 소리가 ‘웅, 웅’ 하고 들려오는 것이 매일 들어도 신기했기 때문이다. 1층 집이었으니 그 아래 지하실에서 들려오던 건 각종 설비나 장비가 돌아가는 소리였겠으나 그때 내게 지하실은 아파트 다른 동 입구로 나올 수 있는 비밀 통로 같은 곳이었으므로 조금 다른 것을 상상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엔 친구들과 자주 지하실을 탐험했다. 벽을 더듬으면 스위치가 만져져 불을 켤 수 있었지만, 조금 높은 위치에 있어 어린이가 쉽게 조작하긴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늘 캄캄하던 지하가 주는 공포란 혼자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나는 위험한 탐험을 감행하는 용감한 어린이도 아니었기에 친구들이 권하면 ‘지하실 놀이’에 마지못해 참여하는 정도의 소극적 탐험가로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파트 지하실은 옆 동과 연결되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어떻게든 나아가면 다른 동, 혹은 같은 동의 다른 라인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가면 어느 동이 나오는지 길을 꿸 정도의 정신은 없었기에 우리는 되는 대로 걸음을 옮겨 새로운 입구로 나오곤 했다.

그것은 마치 얼굴이 여러 개인 괴물 뱃속을 쏘다니다가 아무 입으로나 나와보는 일과 같았다. 가느다란 빛이 보이고, 점차 커지는 빛을 따라가면 바깥을 만날 수 있었다.

캄캄한 지하실을 쏘다니는 동안엔 나도 모르는 새 몸이 긴장되곤 했다. 친구를 잃을세라 손을 꼭 잡고 움직인 통에 손가락과 팔뚝이 쑤시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허구한 날 지하실로 돌진하곤 했으니 그곳이 텅 빈 미로 같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나는 바닥에 귀를 댈 때마다 누군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웅, 웅’ 하는 소리가 꼭 어떤 생명이 내는 소리인 것만 같았고, 집 아래 인간은 모르는 세계가 반드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내가 상상한 ‘어떤 생명체’의 이미지는 희한하게도 ‘미라’였다. 영화에서 볼 법한, 썩지 않은, 그러나 보존되었다고도 할 수 없는 시체 형태의 미라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두치와 뿌꾸〉나 ‘미쉐린 타이어’ 마스코트를 닮은, 통통한 몸에 새하얀 붕대를 감은 조금 귀여운 미라.

개미들이 땅속에서 개미만의 길과 집을 만들고 저만의 사회를 만들어 가듯 지하실에도 미라들이 저들만의 언어로 저들만의 먹을거리를 구해 저들만의 질서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왜 지하실에 뭔가 산다고 믿은 건지, 그게 왜 하필 미라였는지 알 수 없으나 귀를 기울이면 미라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꽤 자주 바닥에 귀를 대고 그들의 언어를 들었다. 카펫을 살짝 걷어 바닥에 귀를 대는 한겨울엔 바닥의 따끈한 온기가 뺨으로 전해져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든 적도 있었다. 엉덩이를 천장으로 추켜올리고 두 다리를 구부린 채였으니 다리가 잔뜩 저린 채로 깨는 건 당연했다.

한편, 여름엔 미라들의 소리가 조금 멀리서 들려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아마 바람이 들라고 열어둔 창문 밖 소리가 집 안으로 흘러 들어오면서, 매미나 나뭇잎 흩날리는 소리가 섞이면서 지하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은 것일 테다. 모르는 것도 아닌데 나는 여름의 활기가 사람들을 보다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여 미라들이 겨울에 비해 숨죽여 생활한다 믿었고, 그들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더운 계절엔 여느 때보다 안테나를 쫑긋 세우곤 했다.

그렇게 믿어간 계절이 쌓일수록 지하실로 들어가는 게 그다지 무섭지 않아졌다. 어딘가에 미라들이 줄지어 음식을 옮기고, 저들끼리 사랑 다툼을 하고, 여왕 미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솜씨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귀여운 세계를 엿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들과 지하실을 탐방할 때면 미라의 붕대가 등 뒤를 스쳐 지나갔다는 상상을 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미라는 여전히 내게 요괴나 악마, 좀비 이미지보다 포켓몬처럼 또 다른 형태의 친구처럼 느껴진다. 내 미지의 비밀 이웃.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젠가부턴 지하실끼리 연결되는 통로가 막혀 다른 동으로 머리를 내미는 탐험은 불가능해졌고, 친구들은 한껏 좁아진 지하실 탐험에 흥미를 잃었다.

더는 그 아래 두 다리를 들이미는 일도 없고, 머리가 커가면서 땅바닥에 귀를 대어보는 일도 줄었지만 나는 여전히 거기서 미라들이 요령껏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때때로 붕대 끝자락을 흩날리면서 지금도 뭔가를 바지런히 하고 있다고.

 

얼굴 없는 부지런한 이웃

첫 번째 집이 미라 위층 집, 두 번째 집이 예민 보스 위층 집이라면 지금 사는 집은 아랫집 없이 윗집들만 있는 그런 집이다. 윗집에서는 24시간 소리가 난다.

쿵쿵, 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

운동 기구라기엔 템포가 너무 빠르고, 생활 소음이라기엔 도무지 상상이 불가능한 둔탁하고 빠른 리듬.

나는 대단히 예민한 사람은 아니어서 소음에 생활이 방해받는 일은 잘 없지만 무감한 만큼 궁금한 게 많다.

저 빠르고 일정한 소리에 가능한 상상은 그나마 마늘 빻기 정도인데, 어느 누가 마늘을 한 번에 세 시간 이상, 하루에 도합 일곱 시간 가까이 빻는단 말인가. 한밤에도, 새벽에도, 이른 아침에도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가끔은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도 들린다. 방음이 잘 안되나 싶긴 한데 목소리가 큰 것도 분명한 듯하다.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라기보단 광기 어린 웃음처럼 들리는 건 과한 상상일까.

 

어린 시절 《제인 에어》를 읽으며 로체스터의 배우자 ‘버사 메이슨’ 이야기를 맞닥뜨렸을 때 상상한 웃음소리와 꼭 닮았다.

캄캄한 다락방에 갇혀 울부짖고, 쉴 새 없이 웃어 재끼던 로체스터의 반려자. 한 달에 서너 번쯤 간헐적으로 자지러질 듯한 웃음이 20분가량 지속될 때면 무서우면서도 궁금했다. 뭘 하는 걸까.

웃음 사이사이 강아지 소리도 들려오는 걸 보면 강아지와 놀아주는 걸까 상상하게 되는데 오히려 강아지가 인간을 놀아주는 것이거나 ‘놀아준다’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를테면 강아지가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려주어 너무 기쁜 나머지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거나…. 그런 식의 상상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평일 13시 53분, 윗집에선 아침 9시쯤부터 뭔가를 줄곧 굴려대고 있다. 드르륵, 드르르륵, 드르르륵….

마른 식기들을 찬장에 넣으며 끊임없이 상상한다. 윗집에는 밭이 있나? 바퀴 달린 쟁기로 흙밭을 갈아엎는 소리 같은데?

나는 자그마한 화분들을 살리기 위해 물이 차지 않은지, 습도는 괜찮은지 꼬박꼬박 확인하기 바쁜데 윗집은 집 안에서 농사를 짓는다니! 그렇게 생각하면 새벽부터 들리는 소리들도 어쩐지 납득이 된다.

작은 생명 하나를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지 몸소 겪고 있는데, 하물며 집 크기만 한 밭을 가꾸고 있다면 소리가 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상상의 풍선만 나날이 몸집을 키워간다.

 

합법적일 수만 있다면 위층 사람들의 하루를 남몰래 관찰하고 싶다. 주의를 주어 소음을 멈추게 하는 것보다 소리의 근원을 탐험하는 일이 내겐 훨씬 더 중요하다.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는 건 얼마나 생산적이고 즐거운 일인가. 소리로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는 데선 사람 냄새가 난다. 귀로 들을 뿐인데 생명의 냄새가 난다.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위층 사람들을 상상하는 것 또한 그렇다. 큰 손과 큰 발을 가진, 어딘가 튼튼하고 까무잡잡할 것 같은 사람들.

큼직하게 움직이고, 큰 보폭으로 걷고, 손보다는 양팔을 쓰며 적당한 데시벨로 이웃의 부름에 응대할 것 같은 사람들. 구체적인 장면으로 상상을 깨뜨리기 싫어 나는 소리의 뿌리를 찾는 대신 수많은 선택지를 만들어 둔다.

내 머릿속 윗집은 거대한 밭이다. 배추도 있고, 마늘도 있다. 벌과 나비가 놀러 오고 비가 내리면 개구리도 간간 들렀다 간다.

수많은 생명이 윗집에 들락거려 여자는 생의 즐거움에 미친 듯이 웃는지도 모른다. ‘아, 살아 있어서 즐겁다! 아,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 하면서.

 

15시 8분, 여전히 ‘드르르륵’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문득 그런 상상을 한다. 벌컥 윗집 문을 열어보는 상상.

나는 그만 너무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릴지도 모른다. 의외로 작은 사람들이 조용조용, 안온하게 살아가는 집일지도 모르니까. 밥상 치우기를 미뤄둔 채 〈우리말 겨루기〉를 보고, 마룻바닥에 귀를 대고 히죽히죽 웃는 정도의 생활상만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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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주연(산책방)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