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기쁨

Movie & Book

다들 책 안 읽는 시대를 탄식하지만, 책 같은 거 굳이 억지로 읽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책이 아니라 ‘좋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지 않은가 싶다. 그럼에도 나는 책이 좋다. 책 읽는 기쁨을 아는 소수의 인류 중 하나라는 사실이 기쁘다. 아, 그 기쁨이 어떤 건지 궁금하시다고요? 그렇다면 한번 뛰어들어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만…….

나는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지만,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적은 없었다.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에세이가 뭔가? 좀 잘 쓴 일기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공저인 첫 책(연애 지침서였다)을 쓸 때였는데, 편집자는 원고를 돌려보내며 개인적인 이야기는 빼달라고 했다. 그가 덧붙인 말은 이거였다. “에세이는 유명해지면 그때 쓰세요.” 그래… 그런데 어떻게 유명해지지? 어디 가서 사고라도 크게 쳐서 9시 뉴스라도 나가야 하나? 몇 년 후 연락한 다른 출판사의 편집자 역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좀 유명해질 방법 없어요? 아쉽다.” 아, 그때 사고를 칠걸……. 그러니까 그들에게 에세이란 ‘유명인의 일기’였던 것이다. 그랬던 시대가 있었다.

 다행히 나의 첫 에세이는 “유명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평범한 당신의 평범한 매일매일에 대해 써달라.”고 청한 새로운 편집자의 격려와 함께 세상에 나왔다. 그 책을 쓸 때 나는 이런 무명인의 일기 따위 아무도 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므로 겁날 게 없었다. 어차피 1쇄도 다 못 팔고 어느 창고에서 누렇게 색이 바래다가 결국 훨훨 타올라 재가 될 텐데 신경 쓸 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 책이 생각보다 잘 팔려서 2쇄도 찍고 3쇄도 찍고 그러다 몇 년 후 개정판도 나오고 그랬을 때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을 안고 나는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솔직히 에세이를 쓰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잘’ 쓰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에세이는 ‘내게 일어난 일’을 위주로 가볍게 쓰는 글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못 하고 게으른 나에게는 잘 맞는 장르다. 실제로 있었던 일과 느꼈던 감정과 떠올랐던 생각에 대해서만 쓰면 되니까. 

하지만 소설은? 어렵다. 나에게 소설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첫째, 거짓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끈한 거짓말을 쓰기 위해서는 울퉁불퉁한 진실을 쓸 때보다 몇 배의, 아니 몇십 배의 공을 더 들여야 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언젠가 소설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인터뷰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작업 방식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매일 책상에 앉아 그 순간 내게 가장 절실한 문제에 대해서 씁니다.” 나는 좀 많이 놀랐다. 소설가들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쓰지 않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소설가들은 어떤 인물을 상상하고, 사건을 만들어내고, 줄거리를 지어내며, 어제 쓴 부분을 고스란히 이어서 쓰는 식으로 작업하는 거 아니었나? 그들이 하는 일은 대체로 거짓말이라는 뭉툭하고 커다란 흙덩어리를 다듬고 또 다듬어서 매끈하게 만드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저 그 순간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에 대해 쓰고, 나중에 그 혼란스러운 메모들을 모아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낸다고 했다. 

얼마 전 전철 안에서 스트라우트의 최신작 《바닷가의 루시》를 읽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별생각 없이 읽다가 어느 순간부터 책 속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돌아올 때쯤에는 남은 페이지가 거의 없었다. 책을 읽고 났더니 뭐랄까, 요즘 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끊임없이 수런거리던 감정들과 생각들이 조용하게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신기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루시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의 막내딸로 태어나 집에서는 학대당하고 학교에서는 외톨이로 자랐다. 다행히 루시는 형제들과는 달리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입학해 집을 떠났고, 결국 작가가 됨으로써 자신이 나고 자란 계급과 결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성취와 달리 루시의 내면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춥고 배고프고 사랑이 없는 집에, 아무도 자신을 반기지 않는 학교에. 

루시는 바람을 피운 남편 윌리엄과 오래전에 이혼했고, 재혼한 남편과는 얼마 전 사별했다. 윌리엄은 그 후 두 번 더 결혼하고 두 번 더 이혼했다. 어느 날 전 세계에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얼마 후 윌리엄이 루시를 찾아와서는 당장 짐을 챙겨 뉴욕을 떠나야 한다고 하고, 그들은 루시의 고향인 메인주의 바닷가에 있는 작은 집으로 향한다. 그리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팬데믹의 기간 동안 늙은 이혼 부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하루하루가 내가 걸어야 하는 넓은 빙판길 같았다. 그리고 그 빙판에는 붙박인 작은 나무들과 잔가지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내가 그 풍경을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세상이 다른 풍경이 되어버린 것 같았고, 나는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큰 불안감을 느꼈다. 종종 나는 밤중에 일어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서 가만히 누워 있곤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몇 시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거기 누워 있을 때 내 삶의 여러 다른 장면이 나를 찾아왔다.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바닷가의 루시》 중에서

루시와 윌리엄은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매일 산책을 하거나 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는 와중에도 루시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상처와 불안, 공포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시에서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딸들을 걱정하는 마음도 그 애들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이나 크다. 반대로 아이들은 제 부모에 대해서 그만큼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시골 마을에서 그녀가 마주치는 이웃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절망과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루시는 끝내 그곳을 탈출한 자신이 누리는 현재의 행운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지럽고 마음 아픈 나날들이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루시를 위로하는 것은 매일 변함없이, 또 매일 변화무쌍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풍경이다.

비가 내린 그날 이후 어느 저녁, 나는 일몰을 보았다. 하루 내내 흐리다가, 해가 지기 직전에 구름이 갈라졌다. 갑자기 오렌지빛 구름이 하늘을 배경으로 찬란히 펼쳐졌고,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색이 물위로 떨어졌다 다시 집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걸 포치에 서서 저쪽 창문을 통해 바라볼 수 있었는데, 태양이 멀어지면서 하늘은 계속 달라졌고 진홍색 하늘은 더욱 높아졌다. 나는 윌리엄을 불렀고, 그가 포치로 나와 우리는 한참 동안 거기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의자를 가까이 붙이고 앉아 일몰을 보았다. 장관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이런 일몰이 또 펼쳐지길 기다렸고, 이따금 목격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금빛 오렌지색, 당시에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 《바닷가의 루시》 중에서

얼마 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파벨만스〉(2022)를 봤다. 스티븐 스필버그처럼 오랜 시간을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호불호 없는 감독이 되기도 쉽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모두가 스필버그를 사랑한다. 아직도 이 노장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하고 입가에는 언제나 다정하고 장난기 어린 웃음이 걸려 있다. 스필버그는 영원히 소년이다. 전쟁터 같은 할리우드에서 수십 년 동안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어 오면서도 어떻게 저런 얼굴로 늙을 수 있을까? 어떻게 수십 년 동안 그 많은 영화들을 꾸준히, 기복 없이 잘 만들 수 있을까? 과연 천재란 저런 존재일까? 

〈파벨만스〉는 영화감독이 되기 전 스필버그의 어린 시절을 그린 자전적인 이야기다. 중산층의 여유롭고 안정적인 가정 환경, 자녀들에게 헌신하는 다정한 부모, 모난 데 없는 아이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사회의 부와 풍요 그리고 컴퓨터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한테서 고르게 물려받은 재능과 감성, 그 자신의 성실함과 열정. 누가 봐도 그는 지금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의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머니는 다정하지만 재미없는 아버지 대신, 가족처럼 지내던 아버지의 부하 직원 베니와 사랑에 빠진다. 아주 오래 지속된 사랑이다. 새미가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캠핑장에서 가족들을 찍은 필름을 편집할 때였다. 그건 아들과 어머니만이 아는 어두운 비밀이다. 얼마 후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서부로 이사를 하게 된 새미는 학교에서는 왜소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고, 집에서는 어머니의 부정 때문에 괴로워한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베니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다. 결국 이 행복했던 가정은 와해되지만 그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새미는 영화라는 꿈을 향해 느리게 전진한다. 결국 새미는 전설적인 영화감독 존 포드의 사무실에서 면접을 보게 되고, 그렇게 세상 모두가 다 아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커리어가 시작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 오랫동안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러다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더 포스트〉와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를 연달아 보면서 느낀 것은 ‘이 남자는 정말로, 정말로 영화를 사랑하는구나.’ 하는 거였다. 이 세상 누구도 스필버그처럼 오랫동안, 변함없이 영화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심지어 사랑하면서도 잘하는 게 놀랍다. 보통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크면 힘이 들어간다. 힘이 들어가면 보는 사람이 부담스러워진다. ‘내가 영화를 이렇게 잘 만들어!’라는 자의식이 관객을 뒤로 주춤 물러나게 만든다. 그런데 스필버그의 재능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고 있을 때면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든다. 뭔가를 판단하기 전에 그저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이 이 천재 감독의 기술이다. 사랑에 기반한 기술. 기술이 받쳐주는 사랑. 스필버그의 영화에 호불호가 없는 이유도 바로 그 힘 빼기의 기술, 사랑의 기술 덕분일 것이다.

책의 미래에 대해서라면 나는 언제나 비관적이다. 아니, 비관적인 것을 넘어서 책의 미래 같은 건 없다고 감히 단언할 정도다(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뭐 그렇게 슬픈 일은 아니다. 댄스 음악과 록 음악이 대세인 가운데서도 여전히 소수의 강력한 클래식 음악 지지자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TV만 틀면 드라마와 영화를 볼 수 있는데도 여전히 어떤 이들은 소극장에 앉아 연극을 보는 것처럼. 책 역시 자연스럽게 수많은 미디어와 매체 중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미디어란 것은, 매체라는 것은 무엇을 운반하는가? 이야기다. 우리가 언제나 듣고 싶어 하는 그것. 우리의 지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주는 것. 지난날의 아픔을 곱씹게 하고, 오늘의 피로를 잊게 하고, 내일의 희망을 품게 하는 것. 이 세상에 우리 하나만 이런 운명에 처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 어두운 밤길 어느 집 창문에서 새어 나온 불빛처럼 밝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것. 바로 이야기. 

나는 〈파벨만스〉가 이름과 약간의 설정만을 바꾼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기록인 것처럼, 《바닷가의 루시》 역시 루시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팬데믹 일기라고 생각하는데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매끄러운 거짓말이건 울퉁불퉁한 진실이건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이야기니까.

《바닷가의 루시》를 읽고 난 후 며칠 동안 내 삶에는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러나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바람의 방향이 달라진 것 같은 조짐이 느껴진다. 그건 아주 희미해서 무척 주의를 기울여야만 알아챌 수 있는 변화다. 좋은 이야기는 그렇게 인생의 풍향을 바꾼다.

Book—《바닷가의 루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문학동네

Movie— 스티븐 스틸버그 〈파벨만스〉(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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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수희

일러스트 규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