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없는 관계

관계를 맺는다. 좋으면 아껴주고 지켜준다. 싫어지면 마음을 거둔다. 잊으려고 노력하고 다른 관계로 덮는다. 몇 해 전에는 내가 그렇게 살았다. 무언가를 찾고 있으면서 동시에 도망치는 기분. 나는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상황을 바꿔보고 싶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잘 맺고 싶었을 때 내게 가장 많은 질문을 던져준 존재는 ‘말 없는 완두’였다.

조용하고 덩치 큰 질문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완두와 나는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동거를 어느 날부터 시작해버렸다. 이렇게 한 줄로 정리해 보다가 덜컥 겁이 나지만, 사실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그다지 어려운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마 놀란 마음은 생각과 현실의 대비에서 온 것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따로 약속이나 책임을 명시하지 않고 외부의 지원, 허락 없이 조용히 이 생활을 시작했다. 이렇다 할 타인의 축복도 없었다. 이제 거의 5개월이 지났다. 한 공간에서 같이 지낸다는 건 여러모로 특별한 일이다. 불편함과 피곤함 속에서 성취감과 안정감을 함께 느낀다. 아무래도 완두에게 손길이 많이 필요하니까, 이동이 자유롭던 내 생활이 끝난다는 게 가장 걱정이었는데 묶인 생활의 기쁨, 이를테면 가끔 혼자 외출할 때의 짜릿함이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여되지 않는 묘한 해방감 같은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른 상황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면성 같은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크고 작은 변화들. 취소할 수 없는 선택들. 나의 선택이 가끔은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누군가와 동거를 결심해 본 적도 없고 결혼 생각도 별로 없었는데, 어쩌다가 개와 살게 된 걸까. 기쁨 속에서도 고단함 속에서도 이 질문은 종종 나를 찾아온다.

사랑을 담아내는 몸

완두와 내가 사는 집에 종종 친구들이 놀러 오곤 한다. 늘 우리를 보러 온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어떤 경우에는 거의 완두만을 보려고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문 열어주는 나한테 인사하자마자 완두랑 껴안고 뒹구는 모습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외면당해도 흐뭇한 기분이 든다. 반겨주는 개의 기쁨을 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매일 경험하면서도 늘 한 번이라도 더 경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완두는 다른 모든 개가 그렇듯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줄 안다. 사랑을 주는 개.

그런데 요즘에서야 알게 된 완두의 모습 중에는 주는 게 아닌 ‘받는 모습’도 있다. 받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은 종종 그것이 드물고 귀하다는 이유로 막무가내일 때가 있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되돌려주지 못할 것이기에, 자칫 허투루 반응하거나 타이밍을 놓쳐 상대의 기분을 망칠 것이기에 영 어려운 기분이 든다. 지나치게 선명해서 모른 척하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그것이 너무나 필요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나 자신이 참 변덕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모든 걸 늘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는 완두가 신기하다. 아무리 사랑을 퍼부어도 완두는 그것을 작은 몸에 다 받아두었다가 현관문이 열리면 나와 친구들에게 다시 쏟아낸다. 받은 것보다 더 많이.

친구들은 그런 완두를 길에서 만나면 자신을 알아보는지 궁금해서 인사 없이 지나쳐 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완두는 어떻게 모르는 체할 수 있느냐, 힘껏 달려든다. 여러 번 본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격한 인사를 하고, 유독 자신을 예뻐해 준 사람에게도 그만큼 알은체한다. 완두의 몸 어딘가에 그들에게서 받은 사랑이 전부 다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런 완두를 보다가 문득 나는 생각한다. 내 몸에도 나를 사랑해 주던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게 아닐까. 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며 발견한 내 여러 모습도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언젠가 쌓였을 그 기록들을 나는 지우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상대를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그 모든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까. 왜 나는 지우고 다시 쓰려고 노력했을까. 왜 새로운 사람에게 앞서 받은 사랑들을 숨기려 했을까.

완두처럼

완두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것이 나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인지 가늠해 보게 된다. 불가능할 것 같아서 지레 포기하지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완두처럼 살고 싶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형성해 주는 세계에서, 더 멀리 가보라는 지지를 받으며, 그들이 보여준 마음들을 내가 또 다른 이에게 전해 주며, 고이지 않고 계속 흐르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이미 일어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나길 원하는 일들 모두를 지지해 주는 마음을 경험해 보고 싶다. 이별 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완두처럼. 그리고 내가 완두에게만은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어떻게 나는 완두와 함께 살아보기로 결정했을까. 어떻게 가장 중요한 일을 아무 허락도 없이 담담하게 결정하고 겪어왔을까. 그런 완두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주고받는 모습에 어떻게 내가 기뻐할 수 있었을까. 완두 몸에 쓰인 여러 이름이 왜 나의 기쁨일까. 나는 어떻게 내 친구들에게 완두를 잠시 맡길 생각도 했을까. 물건처럼 생각해서일까. 연인보다 덜 소중해서일까. 이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는 순간에 나는 내가 얼마나 완두를 사랑하는지 새삼 깨닫는다. 얼마나 소중한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안다. 완두가 죽을 때 내가 울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나는 완두에게 배워서 잘 알고 있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사진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