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의 연애편지

축하의 자리에 놓여

Love
letter of my aunt
이모의 연애편지

군대 시절, 여자 친구는 언제나 빨간색 봉투에 편지를 담아 보내곤 했다. 대단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손으로 편지를 쓰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 하나만을 생각했을 거라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군대를 전역한 후로는 편지를 쓰거나 받아본 사실이 손에 꼽을 정도가 됐다. 그러다 언젠가 영화 속에서 누군가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읽어주는 장면을 보게 됐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반복해서 돌려보기도 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어머니께 간직해 둔 연애편지가 있느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모두 불태워서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당황해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사랑꾼(?)으로 유명했던 애란 이모를 추천했다. 그리고 며칠 뒤, 제주에 사는 이모는 귤 상자에 한 가득 오래된 편지들을 보내왔다.

애란의 편지

사랑하는 승만 씨 읽어주세요.
승만 씨를 보내고 5일 만에 이렇게 서울에서 편지를 띄우는 저의 마음은 시들어버리는 소나무 같은 기분이에요. 그러나 금방 싱싱한 소나무로 성장하겠지요. 승만 씨가 저에게 어떤 사람이기에 항상 그 사람만을 생각하며 내 인생의 전부이듯 느껴질까요. 만남이 있기에 헤어짐은 당연한 일인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만남은 반갑고 헤어짐은 왜 서러울까요. 이제는 만남조차 두려울 정도네요. 우리의 이별이 잠시 이별이 아닌 영원한 이별이라면 과연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

공항에서 멀지 않은 방배동에서. 승만 씨를 사랑하는 란.

승만의 편지

그동안 안녕.

이 몸은 몸 건강히 잘 있습니다. 그대는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는지. 일을 그만두고 몸이 근질근질하겠지. 나는 아직도 대기 상태이다. 자대와 내무실 배치는 됐는데 그래도 아직은 대기 생활이 연속이다. 아마도 내일이나 오늘 저녁이면은 이 생활도 청산할 것 같다. 대기 중에 편지라, 참 꿈 같은 소리지. 다행히도 선임 해병님께서 특별히 시간을 주어서 이렇게 안부 소식을 몇 자 적어본다. 

생각보다는 그리 힘든 것이 없다. 위에 있는 선임 해병님들도 잘 대해준다. 집에 있는 동생 대하듯이 말이야. 이곳에는 제주 출신 선임 해병님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같은 중대에는 없고 옆 중대에는 같은 동기와 선임들이 있어 별 걱정은 없다. 그리고 승택이 형과 조영이는 오늘날 서로 떨어졌다. 여기는 나 혼자 왔다.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안부 전해다오. 무사히 잘 있다고 말이야. 시간이 없어서 일일이 편지는 못한다고, 그리고 많이 이해하고 또 많은 편지 부탁한다. 어머님께는 어제 안부 편지 올렸다. 그리고 주민등록등본 한 통 부탁했는데,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고 전해주라. 휴가는 다음주나 다다음주에 꼭 나가니까 그때를 꼭 기다려주기 바란다. 그럼 여기서 이만 줄인다. 몸 건강히 잘 지내기 바라면서. 

포항에서. 만.

애란의 편지

그리운 승만씨에게.
내일의 일과를 슬그머니 정리해야 하는 늦은 밤이에요. 오늘 전화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전화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어요. 영화가 재미는 있는데, 승만 씨하고 같이 보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그건 그렇고 투정 좀 부려야지. 그전보다 저한테 관심이 되게 없나 봐요. 다른 애인하고 영화를 보러 갔다는데 왜 그냥 웃기만 해요. 전화를 자주하라는 얘기도 안 하고, 직장을 옮겼는데 전화번호도 안 물어보네요. 나도 안 알려드려요. 사실 아직까지 전화번호를 몰라요. 그럴 정신이 없었어요. 내일을 위해 꿈나라로 가야 되니까. 언니와 대화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드리며 오늘은 이만 할래요. “요즘 승만 씨한테서 편지 자주 오니?”, “아니.”, “승만 씨 마음이 변했나 보다.”, “그런가 봐요.”, “어머 가여워서 어쩌나.” 이 순간에 제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요? 승만 씨 상상에 맡기고 안녕. 건강 유의하시고 안녕히 주무세요.

란이가.

승만의 편지

보고 싶은 란.
실은 오늘 이 편지는 안 쓰려고 했는데 란이가 보내온 편지를 보니 마음에 파동이 생겨서 보내온 넋두리에 대한 답장을 몇 자 적어볼까 한다. 이 편지가 도착할 때쯤이면 이번 주 일요일에 그리던 전화벨 소리를 란이가 들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요번 달 이십팔 일 날 잠깐 밖에 나갈 기회가 생겼다. 앞 전 편지에도 예고했듯이 말이야. 란! 데이트 신청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 몸도 좀 예약하자. 한 구월 칠일부터나 해서 말이야. 어찌 안 되겠나? 예약 접수 되면 예약란에 적어둬. 마! 그리고 내가 어디가 바람둥이처럼 생겼다고 보는 사람마다 그런 소릴 한대. 이다음에 나 좀 보자 해. 왜 남 혼사길 망치게 그런 소릴 하는지 한 번 물어보게. 이 몸은 아직 친구들 중에 장가 간 놈들이 없어서 란이의 그런 기분을 잘 모르겠는데, 그 친구가 무척이나 부러웠던 모양이지. 부러워할 것 하나 없다. 란이도 머지않아 그런 시절이 올 것인데. 그런데 무슨 친구인데 벌써 애가 뛰어다닌다고 하냐. 어지간히 바빴던 모양이지. 이런 얘기는 차후에 만나서 얘기하고 오늘은 여기서 줄일까 한다. 저녁 자유시간도 거의 다 됐다. 오늘밤도 즐거운 밤이 되길. 그리고 또 내가 데이트 신청한 것이 이루어지길 바랄게.

빠이. 포항에서. 만.

애란의 편지

사랑하는 승만씨.
그 동안 안녕. 너무 오랜만에 쓰는 편지인 것 같아요. 훈련 중에 별 일은 없으셨는지요. 아마 별 일은 없었으리라 믿어요.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해드려 볼까요. 토요일 날 어머님께서 전화하셨어요. 집에 전화기 놓으셨대요. 제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하셨대요. 집에 별 일은 없으시고 형님들이 바쁘셔서 편지를 못한다고 전하래요. 그전에는 가끔 전화 드렸는데, 이제는 자주 드릴 생각이에요. 그 다음은 창피한 얘기 해야지. 어제 친구하고 남대문 시장에 구경 갔는데 족발이 보이길래 족발을 사먹었어요. 얼마나 맛있는데요. 승만 씨 서울 오면 먹으러 가요.(아,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이러겠지?) 

그 다음 순서는 재미있는 이야기. 남대문 들르고 여의도에 사진 찍으러 갔는데 둘이서 번갈아 가며 독사진만 열심히 찍었어요. 한참 찍다가 독사진은 그만 찍고 둘이서 몇 장 찍어요, 그랬는데 필름이 다 됐지 뭐예요. 결국은 필름 한 통에 독사진만 들어있다는 사실. 이래서 촌놈 촌년인가 봐요. 사진 나오는 대로 예쁜 사진 골라서 보내 드릴게요. 아마 쉬는 일요일 기분이 어땠냐고 묻고 싶으시죠? 승만 씨 계셨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하나도 재미없었어요. 저녁에 집에 오니까 너무 걸어서 피곤하고 발에서 피가 날 정도였어요. 그래서 편지 쓸 시간도 없이 잠을 잤는데 세상 모르게 잤네요. 그런데 훈련은 왜 이렇게 자주 받아요? 날씨도 덥고 힘들 텐데 날씬한 몸이 더 빼빼해질까 봐 걱정스러워요. 승만 씨 편지는 훈련 끝나서 쓰면 금요일쯤에 도착할 것 같은데 그때까지 기다리고 오늘은 이만 해야 할까 봐요. 그럼 안~녕.

님의 편지를 기다리며. 란.

승만의 편지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만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기다림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읽는다는 것은 골짜기도 빠져가는 산울림과 같은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숙녀 아가씨 보시오.
란이 선물을 만들던 도중에 서두를 시작하려니 할 말이 없고 해서 란이가 작년 이 맘 때쯤에 적어 보냈던 편지 내용 중 일부를 옮겨보았다. 토요일 오후 따분하기도 하고 해서 어제 편지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또 몇 자 적어본다. 란이는 지금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한 궁금하구나. 위 까지는 란이에게 전화하기 전에 쓴 것이고 지금부터는 전화하고 바로 와서 쓰는 것이다.할 얘기가 많았는데 막상 수화기를 잡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더라. 아마도 란이 목소리를 들으면 반가운 마음이 커져서 그런가 보다. 모처럼 듣는 목소리여서 반가웠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오랜만에 사랑하는 님이 전화했는데 사랑한다는 한 마디도 못들은 것이 아쉽다. 이따 저녁에 전화 올 때 기대해 봐야지.

애란의 편지

사랑하는 승만 씨 읽어주세요.
어제 저녁부터 시작한 비가 여름의 열기를 깨끗이 씻으려는 듯 지금 이 시간까지 보슬비가 한없이 내려요. 지난 번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무슨 편지 내용이 그래요. 승만 씨는 성의껏 섰는데 무슨 얘기야, 그러겠죠. 내가 듣고 싶은 단어를 찾기 위해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는데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게 뭐냐구요? 사랑이라는 단어예요. 내가 알기로는 승만 씨가 보내준 수많은 편지 중에 이런 편지는 처음 받아 봐요. (별 것도 아닌 것에 다 신경 쓰죠. 조금은 서운했어요.) 내가 그만큼 승만 씨를 사랑하기 때문에 글자 하나에도 신경이 쓰여요. (…) 

이건 특보예요. 제가 머리를 파마했는데, 시집가도 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봐. 중매한다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승만 씨를 기다린 만큼 대가가 있으려나? 그래도 승만 씨를 지금까지 기다렸으니까 끝까지 기다리는 쪽이 낫겠지요. 염려 말아요. 나는 오직 한 사람만을 바라보니까요. 그렇다고 마음 놓지 말아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요. 다음 일요일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홉 시 반쯤에 전화 드릴게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생각해 두었다가 얘기해요. 전화로 제가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못한 얘기를 하면서 오늘은 이만 할까 봐요. “승만 씨 보고 싶어요. 오늘은 비가 와서 더 보고 싶은가 봐요. 승만씨 사랑해요.” 그럼 안~녕.

승만 씨만을 사랑하는 란.
‘하루를 참고, 일 년을 견디고 사 년을 이겨내자.’

승만의 편지

사랑하는 란이 보게나.
안녕은 묻지 않아도 되겠지. 어제도 썼는데.
오늘은 무작정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낙서를 하고 싶어서 펜을 들고 넋두리를 해본다. 미리 얘기해두지만 읽으면서 오해는 하지 마. 나 오늘 술 먹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사랑하는 란이가 보고 싶은 이유가 무엇일까. 술을 먹어서 그럴까. 헤헤헤. 날이 가면 갈수록 그대가 더욱더 그리워지는데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그대가 답변해줄래? 오늘 편지는 되게 재미없지. 이해해주기 바라. ‘인간이 사랑을 시작했을 때 비로소 삶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오로지 란이가 그립고 보고 싶다는 마음밖에 없다. 오늘의 넋두리는 여기서 줄인다. 미안.

사랑해 애란이를. 그대의 님으로부터.

승만의 편지

사랑하는 님에게.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봄을 재촉하는 봄비인가보다 하고 생각하면서 이 비가 끝나면 봄이겠지 했는데 봄은커녕 초겨울마냥 다시 추워지는구나. 아마도 꽃샘추위인 것 같기도 한데 영 날씨가 풀릴 생각을 안 한다. 란. 그 동안 안녕. 이 몸도 안녕.

사랑하는 나의 연인아. 요즈음 이 몸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아? 과연 제대하면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걱정하는 통에 애꿎은 담배만 계속 태운다. 란이가 괴롭고 고달프고 또 님을 그리워할 때, 이 몸은 란을 생각하면서 과연 밖에 나가면 란이를 어떻게 먹여 살리며 또 그 시작은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만을 한다. 이것은 농담이 아닌 진담이다. 병장이고 하다 보니 자꾸 그런 생각이 앞선다. 쫄병 때는 언제면 이 지겨운 생활이 끝나고 좀 더 높은 위치에서 생활하나 하는 생각만 꽉 차있었는데, 어느덧 이 몸도 이제는 제대 후의 걱정을 하고 있구나. 이미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면 진짜 빠르다.

란. 괴롭고 외로울 때는 서슴지 말고 편지를 써. 그래야 한결 낮은 마음이 될 거야. 이 몸 또한 괴로울 때면 얘기할 상대를 찾는데 객지에서 여자 몸으로 생활하는 란이는 더욱 안 그러겠냐. 다 이해하고 받아줄 테니 그런 걱정은 말고, 알았지?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다. 항상 시간에 쫓겨 다니고 하는 몸인 줄은 아는데 그래도 가끔씩은 어머님께 연락 바란다. 집에는 작은 형뿐이라서 집안이 적막을 유지하는 모양이다. 큰형님이 분가해서 집안이 썰렁한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란이도 틈 생기면 연락하기 바라. 벌써부터 시집살이 시키는 것 같아서 어딘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도 있다. 허나 형님 편지에 어머님께서 란이를 그리워한다는 소식이 있어서 적어보았다.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는구나. 오늘은 여기서 줄인다. 아쉽지만 다음에 또 적을게. 그럼 나의 사랑하는 연인아 안녕히.

님으로부터.

애란의 편지

사랑하는 님에게.
그 동안 안녕하세요. 개나리와 목련이 아름답게 피어 봄임을 알려주지만 이곳 날씨는 봄이라고 할 만큼 따뜻하지는 못합니다. 봄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기도 전에 여름이 오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승만 씨가 보내준 추억록을 받아 들고 나도 꽃이 피면 제대한다, 라는 글을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꽃이 피고 제대가 딱 열흘밖에 안 남았네요. (…) 가끔 어머님과 나의 모습을 나란히 두고 상상해 볼 때가 있어요. 승만 씨가 내 짝이 되기까지 길러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싶어요. 내가 부족하지만 장래의 며느리로 생각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실 때면 그전에 느껴보지 못하던 마음의 동요를 느낍니다. (…) 

30개월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이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고생이 많았다는 것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지 않더라도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지난 앨범에 보낸 내용은 혼자서는 실천에 옮기기 힘든 내용일 거예요. 우리의 인생이 결코 길지만은 않을 텐데, 부모에게는 열 아들 부럽지 않은 자식이 되고, 형제와는 화목을 제일로 아는 우리가 되었으면 해요. 끝으로 전역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당신만을 사랑하는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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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건태

포토그래퍼 안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