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기억들

The Anonymous Project by Lee Shulman

리 슐만Lee Shulman—‘어노니머스 프로젝트’ 디렉터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해 줄래요? 

제 이름은 리 슐만입니다. 사진이나 광고, 영상을 제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예술을 해요. 고향은 영국 런던인데 가족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 25년간 살고 있어요. 한국의 매거진과 이야기 나누게 되어 기쁘네요. 

 

‘어노니머스 프로젝트The Anonymous Project’의 필름들을 인상적으로 봤어요. 우연히 구매한 필름 랜덤 박스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라고요. 

한참 오래전, 아버지가 집을 청소하는 김에 슬라이드를 주신 적 있어요. 제가 예전에 찍은 사진들이었죠. 어릴 때는 사진을 찍고 3주 동안 기다려야 받을 수 있었는데, 그 과정이 설레고 행복했어요. 비록 결과물은 형편없고 초점도 맞지 않았지만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코다크롬 슬라이드에 대한 향수와 애정이 있었고, 우연히 온라인에서 코다크롬 슬라이드 한 박스를 발견해서 구입했어요.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어요? 

누가 찍었는지 알 수 없는 60-70년 전 미국과 영국 사진들이 가득했어요. 스캔해 보니 퀄리티와 색이 놀랍고 사진에 담긴 일상이 친밀하고 매력적이었죠. 스캔본을 주변에 공유하기 시작했고, 뉴욕타임스가 그들이 본 사진 중 가장 좋았다는 연락을 줬어요. 포토그래퍼를 묻는 말에 “아무도 아니에요. 어쩌면 모든 사람이고요.”라고 답했죠. 세상 모든 사람들은 포토그래퍼예요. 누구나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중요한 건 ʻ어떻게 바라보느냐.’라고 생각해요. 자연스레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이후에는 여러 곳에서 저희에게 슬라이드를 보내주고 있어요. 

 

누구 사진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프로젝트 이름도 ‘어노니머스’가 된 거네요. 

사람들은 누가 찍었는지,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에 관심이 많아요. 하지만 저는 아니에요. 날짜와 이름 같은 걸 빼버리면 그 안에 배어든 감정만 남는다는 걸 알았어요. 사진에서 감정이란 가치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머지는 익명으로 두었죠. 부수적인 요소들이 들어가면 보는 이와 거리감이 생겨버릴 거예요.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길 바라며 지었어요. 

 

아마추어의 사진들을 ‘그 시대의 일기Diary Of That Era’라고 표현한 게 인상적이었어요. 

사진들이 당시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 대해서도 말해준다는 의미였어요. 과거의 사람들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우리처럼 젊었고 사랑했고 즐거워했고, 술에 취해 우스운 짓들도 했겠죠. 인생에는 저마다의 층이 있지만 결국 같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 시대 흑백 사진을 보면서 온 세상이 흑백이라고 생각하죠? 사진은 언어가 아닌 색으로 표현되니까요. 하지만 그때도 지금만큼이나 다채롭고 다양한 색이 존재했을 거예요.

컬렉션의 카테고리가 흥미로워요. ‘Sweet Dreams’, ‘Sofa Life,’ ‘Good Times’, ‘TV Nation’…. 

때로는 물리적으로, 때로는 감정적으로 분류해요. 그러니까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한다는 이야기죠(웃음). 웃는 사람, 안는 사람, 키스하는 사람, 또는 바보 같은 상황, 미친 상황, 공휴일이나 크리스마스. 그런 특징에 따라 나누어요. 만약 안경 낀 사람의 사진을 원한다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드릴 수 있어요. 아니면 검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 (인터뷰 당일 참석자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재밌네요(웃음). 수많은 필름 중 좋아하는 것을 꼽아본다면요? 

지금 이 순간을 말하는 거죠? 누군가 그렇게 물어보면 “지금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이거예요. 하지만 한 시간 뒤에는 달라질지도 몰라요.”라고 말하거든요. 딱 떠오르는 건 물속에 있는 소녀의 사진이네요. 살아가는 건 쉽잖아요. 그냥 숨을 내쉬면 되죠. 하지만 가끔씩은 숨을 참아야 살아지는 순간이 있어요. 그걸 표현하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또 할머니 두 분이 바닥에서 술을 마시는 사진도 좋아해요. 다리 한쪽은 공중에 떠 있을 정도로 신나게 마시는데 그렇게 유쾌하게 살고 싶어요. 

 

문득 과거의 것을 그리워하는 분인지 궁금해지네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지금이 좋고 현재를 사는 사람이에요. 다만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겹쳐 있는 세대를 살았죠. 어느 하나가 배제되지 않고 마주하는 상황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모든 아날로그 필름을 디지털로 스캔해 작업하는 것처럼요. 아날로그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미완성이라는 점 아닐까요? 삶의 아름다움은 미완성에 가깝잖아요. 물론 어릴 때도 디지털카메라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돈이 덜 들었을 테니까요(웃음)

 

얼마 전 한국에서의 첫 전시가 마무리되었어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정말 즐거웠기 때문에 끝날 때 슬펐어요. 처음에는 배경이 다르니 관객들이 무엇을 느낄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케이크를 앞에 둔 사진을 보고 “나도, 나도!” 하면서 각자의 생일상을 떠올리더라고요. 우리는 역시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죠. 한국의 ʻ가족’과 관련된 사진이 사랑스러워서 모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1950-60년대 전쟁으로 힘든 시기였죠. 수집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한국은 필름을 슬라이드가 아닌 인화된 사진으로 보관하기도 하고요. 

 

다양한 곳에서 전시를 열지만 같은 구성은 찾아볼 수 없다고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표현을 위해 장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장소에 맞게 표현하고 싶거든요. 각각의 공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 프로젝트와 하나로 이어주고 싶어요. 전시 준비는 옛날 방식처럼 진행되는데요. 여기저기서 받은 슬라이드들을 책상에 깔아두고 작은 돋보기로 하나씩 봅니다. 선택된 사진은 스캔해서 보관하고요. 그 작업이 하루의 반을 차지한다면, 남은 반은 전시와 관련된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구상하는 데 써요. 입구에서부터 출구까지, 모든 것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합니다. 영화 대본을 쓰는 것처럼 아이디어를 기록해 둬요.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져요. 

아뇨. 저는 그냥 어린이예요. 좋아하는 것들로 놀고 싶어 하는 커다란 어린이(웃음). 박물관에 가면 사람이 있고 그림이 있죠. 저는 둘 사이를 좁히려고 노력해요.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일부분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요. 작품과 전시에 담긴 의미를 느껴주시길 바라요. 

 

당신의 사진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가장 묻고 싶은 것은, 왜 저를 좋아해 주시죠(웃음)? 아마 같은 시대를 공유하고, 그 시대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 아닐까 싶은데요. 정말 감사하고 행복해요. 저에게 그들은 사진으로 만난 넓은 의미의 가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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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