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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지옥〉
다큐멘터리 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김승일의 <지옥>이다. 거기엔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시인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으면 좋겠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영상 다큐멘터리 감독이 우리 둘의 일생을 촬영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 시를 수년 전 어느 연극에서 먼저 접했다. 이 시에 나오는 ‘우리 둘’이 김승일과 황인찬 시인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니까 이 시에는 얽힌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궁금한 마음에 시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옥>에 관한 에세이를 써줄래요? 그럼 제가 질문을 할게요. 김승일이 답했다. “좋아요.”
Book—《여기까지 인용하세요》
김승일 | 문학과지성사
김승일
시인이다. 《에듀케이션》, 《여기까지 인용하세요》라는 시집을 냈다. completecollection.org를 운영한다. 영상이 있는 세계에서 영상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하지만 거의 찾아내지 못하며 살고 있음. 영상을 좋아함.
<지옥>이라는 시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시라서 누가 이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 좋아진다. 갑자기 내가 이 시를 왜 좋아하는지 알겠다. 이 시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아주 많이 등장한다. 나는 그리스에 살았다고 하는 궤변 지식인 집단인 소피스트를 좋아하고, 다큐멘터리 감독 중엔 베르너 헤어조크를 좋아하고, 여기가 지옥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인 시인 황인찬을 좋아한다. 자기 연극 공연에 쓰기 위해 지옥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하나 써달라고 부탁한 이랑이라는 사람은 내게 아주 각별히 자랑스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지옥이라는 공간도 좋아한다. 나는 절에도 다녔고 성당도 다녔는데, 큰 절이나 성당에는 책방이 있었고, 그 책방에는 자기 종교에서 믿는 사후세계를 그린 만화책을 팔았고, 나는 만화책을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만화에 묘사된 지옥을 많이 보았다. 긴 젓가락이 나오는 지옥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지옥이다. 극락에서는 긴 젓가락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여주는데, 지옥 인간들은 서로 먹여줄 생각을 못 한다. 긴 젓가락으로는 음식을 집어서 자기 입에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굶는다. 젓가락을 짧게 잡으면 되지 않나? 늘 너무 답답했다. 자살한 자들의 지옥도 좋아한다. 자살한 사람들은 지옥에서 나무가 된다.
그러나 내가 정말정말 좋아하는 지옥은, 어떤 동화에 나온 지옥인데 그 지옥에서는 또 죽을 수 있다. 또 죽으면 다음 지옥으로 간다. 먼저 죽은 사람들이 계속 먼저 죽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계속 다음 지옥에 있다. 그래서 빨리 죽어야 나보다 먼저 죽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무슨 동화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만든 동화인가. 어쨌든 갑자기 마음에 드는 시를 쓰는 방법을 알겠다. 좋아하는 것들이 나오는 시를 쓰면 되는구나.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쓴 시들의 거의 대부분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오는 시였구나. 그걸 몰랐네. 그래서 좋아하는 게 없을 때는 시를 쓰지 못하는 것 같다. 너무 우울하면 좋아하는 게 잘 떠오르지 않아서 시를 쓰러 카페에 가기를 주저하는 것 같다. 근데 아무리 우울해도 카페에 가서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좋아하는 것들만 쓰다 보면 노벨상을 못 타게 되는 거 아닌가. 약간 걱정이 된다. 나는 노벨상을 좋아하는데. 그 상을 받은 사람들은 안 좋아하는 것도 자기 작품에 쓴 사람들이 태반이다. 싫어하고, 욕하고 싶은 것들도 다뤄야 한다. 그렇지만 내가 뭘 내 작품에 넣으려면 내가 싫어하는 것도,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도 일단은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들어야… 쓸모를 가질 것 같은데. 내 글에 아직 등장하지 않은 것들은 지옥보다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이다. 지옥은 마음에 든다.
지옥이 왜 마음에 드는가. 내 생각엔 지옥에선 도망을 갈 수 있다. 만약에 도망을 갈 수 없는 지옥이라고 해도. 도망을 가고 싶다는 마음은 내 것이고,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도망갈 마음을 없애는 지옥이 있다면. 거기에선 좋아하는 것들이 없겠군. 만나고 싶은 것들이 없겠군. 나랑 사는 고양이에 대한 기억이 없겠군. 그럼 뭐. 거기서는 내가 내가 아니겠군. 아내를 만나고 싶지 않은 나라면 거기서 그렇게 도망갈 마음 없이 영원히 좌절해도 별 상관 없어. 그건 내가 아니니까. 아, 나도 알거든요. 나라는 게 본래 없다는 걸. 착각에 불과하다는 걸.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를 잊은 나는 싫거든요. 그리고 나는 요즘 한지(나랑 사는 고양이) 나오는 시를 엄청 많이 쓰는데요. 고양이 나오는 시를 엄청 많이 쓴다는 문장도 엄청 많이 써요. 나는 이 문장이 좋아요. 나는 고양이가 나오는 시를 쓴다. 더 정확히는 시를 쓰다가 막히면. 우울해지면. 내 시에 고양이가 나오거든요. 그럼 좋아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살다 보면 좋아하던 것만 좋아하게 되고, 좋아했던 것을 기억해 내서 아 그거 좋아했지? 다시 꺼내서, 아직도 꽤 좋군. 그러고 살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새로운 뭔가를 좋아하려고 애쓰고 있는데요.
그런데 사실은 내 시에 지옥만 나오면 좋겠어요. 소피스트가 나와서 궤변을 늘어놓다가 플라톤 같은 완고한 사람에게 혼나고, 혼나는 건 참 싫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꾸고. 황인찬도 계속 좋아하고 싶고. 베르너 헤어조크가 안 죽고 계속 영화를 만들면 좋겠고. 고양이도 영원히 살고. 그렇게 지옥, 소피스트, 황인찬, 헤어조크만 나오는 시만 계속 쓰다가 죽어서 지옥에 가서 거기서도 지옥, 소피스트, 황인찬, 헤어조크, 고양이만 나오는 시를 계속 쓰면 좋겠어요.
그런데 계속 자기들 나오는 걸 쓰면 걔네가 싫어할 수도 있고. 날 싫어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싫어하겠지. 지옥이 날 싫어하고, 황인찬이 날 싫어하고, 헤어조크가 날 싫어하고, 고양이가 물기만 하고, 나만 보면 숨고.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진 않겠지만 일어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좋아하는 것들에겐 잘해야 돼. 너무 질척이면 안 돼. 그래서 새로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 만들어야 돼. 그래서 요즘에 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고. 책도 샀어요. 그러니까 당신들이 먼저 죽어도 괜찮아요. 날 싫어하지만 마요. 아니다. 싫어해도 괜찮아요. 다음 지옥에선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당신은 지옥에서 누구랑 있습니까. 아직도 난 자꾸 궁금합니다.
소개말에 “영상이 있는 세계에서 영상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하지만 거의 찾아내지 못하며 살고 있음. 영상을 좋아함.”이라고 썼어요. 영상이 우리한테 줄 수 없는 걸 왜 찾으려고 해요?
시를 쓰는 사람이라서 문자 언어로만 전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해요. 그러니까 영상이 줄 수 없는 걸 찾으려는 건데, 영상을 좋아해서 언제나 영상을 보고 있어요.
문자 언어로만 전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어요?
판단이요. 영상은 카메라로 그것을 담은 사람의 판단이 담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사람의 판단을 넘어선 것들도 함께 담겨 있어요. 하지만 문학에서의 판단은 오로지 화자가 하는 판단뿐이죠. 그래서 영상 언어가 우리에게 주는 것보다 폭이 넓지 않은 것 같고, 유연해 보이지도 않아요. 하지만 여기엔 판단들이 서로 엮어서 만들어내는 형언할 수 없는 부분도 있어요. 저는 문자 언어가 서로 간섭하여 만들어내는, 언어로 표상되지 않는 어떤 것을 독자에게 건네기 위해 시를 써요. 예컨대 많은 시가 마지막 구절에서 무언가를 판단하거나 중얼거리면서 끝나죠. “나는 왜 항상 네가 누구랑 있는지가 궁금하지?” 같은.
그럼 영상을 왜 좋아하는지도 물어봐야겠네요.
문학은 스트레스 풀려고 보는 때가 거의 없어요.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죠. 웹소설을 대중적인 콘텐츠라고 여긴다 해도 저는 좀더 집중하고 몰입해서 보게 돼요. 설득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참을성 있게 허용하고 넘어가 줘야 하는 부분도 많고요. 하지만 영상은 그냥 소파에 누워 볼 수 있어요. 보다가 잠들어도 좋고, 약간 놓쳐도 좋고. 극장에 가면 좀 다르지만요. 그래도 저는 영상에 기대하는 바가 문학에 기대하는 것에 비해서는 크지 않아요. 물론 영상 역시 영상만이 전달할 수 있는 걸 고민하는 사람들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겠죠. 그런 노력들을 보는 것도 좋아요.
최근엔 뭐 봤어요?
<릭 앤 모티> 시즌6랑 <비 앤 퍼피캣Bee And Puppycat>이요. 저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요.
에세이에 다큐멘터리 감독 ‘베르너 헤어조크’에 관한 이야기를 썼잖아요. 검색해 보다가 그가 <릭 앤 모티> 시즌2 에피소드8에 나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알고 있었어요?
그럼요. 목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죠. 헤어조크는 제가 좋아하는 어딘가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저를 웃겨요. 우린 취향이 비슷한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웃긴 순간들도 좋지만, 헤어조크가 감독한 작품을 더 좋아해요. 저는 그 사람의 판단이 마음에 들어요.
앞서 “영상에는 그것을 담은 사람의 판단을 넘어선 것들도 함께 담겨 있다.”고 했어요. 헤어조크의 판단을 넘어서는 어떤 것들에 관해서도 들어보고 싶어요.
헤어조크는 언제나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녀요.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죠. 그들을 마냥 동경해서가 아니라, 세상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예요. 그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아요. 하지만 분명히 판단을 하죠. 위험에 너무 가까이 간 사람을, 누군가에게 쉽게 폭력을 저지른 사람을, 대중문화가 잠식해 버린 외로움들을. 반대하고, 긍정하고, 기록하면서요. 그의 최근 작품은 화산에 관한 다큐인데요. 화산은 결국 모든 걸 집어삼키잖아요. 헤어조크는 담담하게 활화산의 마그마 영상을 찍어요. 그건 우리 인식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는 화산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요. 화산이 우리 모두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요. 세계엔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고, 어떤 폭력은 마그마처럼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건 우리의 판단을 넘어서는 것인데도 우리는 판단을 하려고 해요. ‘자,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저 의도 없는 힘 앞에서. 재앙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결국 판단을 넘어서는 이미지를 따라다니면서도 그 이미지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것. 광인을 따라다니면서도 광인이 넘을 수 없는 한계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헤어조크라는 엄정하고 위트 넘치는 감독이 하는 일이에요.
이제 <지옥> 얘기를 해볼게요. 이 시를 2014년 ‘언리미티드에디션’에서 처음 들었어요. 이랑 감독의 연극 <게이 시인 시집 제목 정하기>에 사용되었지요.
저는 정작 그 연극을 못 봤어요. 이랑은 제 친구인데요. 처음 같이 해본 일인데 안 왔다고 이랑이 슬퍼했어요. <지옥>은 연극에 시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럼 써줄게.” 하고 쓴 시인데, 제안을 받고 이틀 후에 작업실에서 쓴 기억이 나네요. ‘지옥’이라는 제목으로 써달래서 지옥이 나오는 시를 썼어요. 연극에서는 게이 시인이 이 시를 짓지만, 연극에서의 화자성은 고려하지 않았어요.
제목이 정해져 있던 거군요. 에세이에 이 시에는 좋아하는 게 많이 등장한다고 했죠. 소피스트, 헤어조크, 황인찬. 궤변론자라 불리는 소피스트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궤변이 뭐라고 생각해요?
궤변은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예요. 궤변은 이어지기 힘든 대화도 이어지게 하고, 가끔은 궤변이 궤변이 아니게 되는 때도 있어요. 저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저에게 시는 일종의 대화예요. 저는 살아 있는 동안 그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고자 해요. 그래서 종종 우울해요. 인식의 한계에 사로잡히기도 하고요. 그럴 때 대화를 이어가려면 헛소리를 하거나 장난을 쳐야 하거든요. 경도된 의식에는 언제나 장난이 필요하니까요. 그러니까 궤변은 장난이에요. 저는 장난꾸러기고요(웃음).
‘궤변’을 검색하니 “당신이 무엇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뿔피리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뿔피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가장 먼저 보이네요. 정말 장난 같아요.
장난을 친다는 건 장난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거예요. 저는 장난치지 않을 때가 아주 많아요. 하지만 장난을 치지 않는다는 건 장난을 칠 때가 있다는 뜻이죠. 장난이 좋아요. 장난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은 피곤해요. 하지만 장난만 친다면 장난이 재미가 없겠지요.
그래서 헤어조크를 좋아하는군요. “엄정하고 위트가 넘친다.”는 건 장난을 치는 것도, 장난을 치지 않는 것도 모두 할 줄 안다는 말 같아서요. <지옥>이 연극에 쓰였으니 물어볼게요. 연기를 하는 것도, 연극을 보는 것도, 나아가 영상을 접하는 것도 내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관심 갖는 일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왜 걸어 다니면서까지 영상을 보는 걸까요?
연기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보는 일인 동시에 내가 다른 누군가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기도 해요. 영상을 보는 것도 비슷하죠. 몰입할 수는 있지만 저 배우나 저 캐릭터가 될 수는 없어요. 그런 입체적인부분을 모두 느끼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술은 단순히 픽션이기만 한 것도, 현실이기만 한 것도 아니에요. 그 끼인 느낌이 좋아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우리가 결코 타인이 될 수 없음을, 화산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전쟁 중에 죽은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알아요. 그러나 더 알아야 해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해야 하죠. 그러나 그걸로 모든 걸 이해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요. 예술은 그러한 행위를 하는 데 도움을 줘요. 우리는 그들을 알고자 하고 상상하려 하지만, 그 무엇이든 우리가 상상하는 그것은 아닐 거예요. 저는 그런 복잡함이 좋아요.
에세이에 쓴 만화책도 예술이겠지요? 지옥이 나오는 만화들이요.
지옥이 나오는 만화들은 겁을 주기 위해서 만든 게 많아서 싫어요. 교훈적이라서. 저는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보면서 ‘참 웃긴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렇지 않은 지옥도 있어요. 끝나지 않는 지옥, 이를테면 단테의 <지옥> 같은 거요. 그 지옥은 웃기기보다는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뭐 저런 데를 만들었나 싶고. 그래서 항상 끌리는 거고요.
에세이에 나온 ‘동화에 나오는 지옥’도 끝나지 않는 지옥 아닌가요?
아, 맞아요. 그 동화의 지옥은 교훈이라는 게 없어요. 교훈이 나쁜 건 아니지만 겁을 주는 건 별로예요. 교회나 불교의 지옥은 “말을 잘 들어라.” 하면서 실제로는 별로 무섭지도 않은 지옥만 보여주거든요. 반면, 끝나지 않는 지옥은 정말 좋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계속 다음 세계로 가는 건 슬프지만, 만날 거라는 희망을 주니까요.
에세이에 자살한 사람이 나무가 된다는 이야기도 적었죠. <You can never go home again>의 한 대목 “자살한 자들의 지옥에는 왕동백나무가 분명히 있다”를 떠올렸어요.
자살한 사람이 나무가 된다는 것도 단테의 《신곡》에 있는 이야기예요. 대학생 때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는 선생님이 계셨는데요. 정말로 암에 걸려서 돌아가셨어요. 근데 저는 선생님이 죽어서 나무가 되는 게 싫었어요. 어떤 정서인지는 알겠는데, 나무를 왜 좋아하는지도 알겠는데, 그래도 나무 말고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왜요?
모르겠어요. 제가 지옥에 갔는데 선생님이 나무가 되어 있으면 대화도 안 통할 것 같고, 무서웠고, 애초에 안 돌아가시면 좋겠어서 속으로 ‘나무가 되지 마세요.’ 생각했어요. 근데 나중에 ‘나무 지옥’이라는 걸 알게 됐는데요. 그걸 알고 나니까 선생님은 나무가 아니라 나무숲 관리인이 됐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가장 좋은 목표>라는 시를 썼죠.
그런데 왜 선생님도 승일 씨도 지옥에 간다고 생각해요? 아니, 우선 지옥이랑 천국이 나뉘어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 저는 지옥과 천국의 구분 같은 건 잘 모르겠고, 사후에 뭔가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걸 편의상 지옥이라고 부른 거죠. 저는 고양이와 살게 된 이후로 고양이와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죽더라도 뭐든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슬퍼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계속 재미가 있을 것이고 장난이 있을 테니까요. 음… 없을 수도 있겠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래요. 바라는 건 자유니까요.
그 자유라는 건, 에세이에 쓴 “지옥에서 도망치는” 거랑 비슷한 맥락일까요?
도망친다는 행위는 사실 자유가 박탈된 사람들의 마지막 발악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혁명을 부른다고 생각하죠. 저는 영상과 시가 각자 영역에서 탈출한다고 생각해요. 영상은 글로, 글은 영상으로 탈출할 수 있어요. 모두가 도망을 가죠. 저 또한 지옥에서 탈출한다고 생각해요.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도망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무조건 가장 먼저 도망가는 사람은 좀 비겁하죠. 저는 누군가와 같이 도망가고 싶어요.
그래서 지옥이 마음에 든다고 하는 거군요. 도망갈 수 있어서.
맞아요.
갑자기 시의 마지막 구절을 옮겨 오고 싶네요. “너는 지옥에서 누구랑 있나?”
제 아내랑 고양이 ‘한지’요.
요즘은 계속 고양이가 나오는 시를 쓴다고 했는데요. 마지막으로 고양이 한지를 자랑하며 마쳐볼까요?
한지는 다른 고양이를 싫어하고, 다른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요. 오로지 간식과 저만 좋아해요. 겁이 무척 많지만 안전할 땐 자기 자신을 용감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한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요. 그걸 알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영원히 한지가 그루밍 하는 걸 바라보고 싶어요. 헤어조크가 화산에서 마그마에 홀려서 계속 바라보는 것처럼요. 한지는 제게 있어 시와 같은 존재예요. 시를 쓸 수 있게 해주고, 시 쓰는 일을 두렵지 않게 해줘요. 아, 그리고… 한마디 더 해볼게요.
좋아요.
영화를 봐야 늙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극장에 자주 가려고 안간힘을 쓰죠. 무엇보다 극장이라는 공간이 아직도 저를 두근거리게 만들어요. 나이가 들면서 두근거릴 일이 줄어들기 때문에 불이 꺼지고 조명이 켜지는 순간이나 스크린에 뭐가 나오는 순간을 점점 더 좋아하게 돼요. 문화생활을 위해 노력하면 좀 젊어지는 기분이 들어요. 예술 영화를 보러 다니려면 근면해야 하거든요. 늙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을 때 더 많이 느끼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영상은 언제나 저를 추동하죠.
두근거릴 수 있는 영상 하나 추천해 줄래요?
11월에 출간되는 제 시집이요. 거기 영화나 영상에 대한 두근거림이 나오죠. 그 두근거림이 당신을 두근거리게 할 거예요. 영화는 다른 사람도 많이 추천할 테니 저는 제 시집을 추천할게요. 《항상 조금 추운 극장》을 읽어주세요.
에디터 이주연
글 김승일 일러스트 추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