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백미는 미술관이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 근래 나는 일본 나오시마와 테시마 섬에 푹 빠져 있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직접 꾸민 예술 섬 나오시마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명상할 수 있다는 테시마 미술관은 그야말로 이번 주제를 위한 맞춤 공간이었다. 2박 3일의 두근거리는 건축 여행. 모든 게 다 괜찮을 줄 알았다.
건축 없는 건축 여행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여행은 실패했다. 미술관 건축의 백미를 보고 오겠다던 내 기대는 일본의 골든위크 덕에 산산조각 났다. 그러니까 ‘쇼와의 날’부터 시작된 9일간의 연휴 기간에 미술관 개장 날짜가 변경된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다카마쓰에서 나오시마로, 다시 테시마로, 빼곡한 일정을 세웠지만 모든 게 무산됐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공항에서 주운 100엔짜리 동전이 이번 여행의 실패를 알리는 일종의 암시였던 걸까. 나는 지역의 명물이라는 사누키 우동을 먹으며 궁리했다. 거짓말로 여행기를 지어낼까? 체류 기간을 늘려서라도 미술관에 다녀오는 게 맞는 걸까? 그러다 문득 몇몇 유명 건축가의 말을 떠올리며 계획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자연은 신이 만든 건축이며, 인간의 건축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는 안토니오 가우디의 말처럼 이곳의 자연을 눈여겨보고, “건축의 출발점도 도달점도 사람”이라는 프랭크 게리의 뜻을 생각해 사람이 머무는 풍경을 바라보는 거다. 이름하여 ‘건축 없는 건축 여행’.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웃는데, 불현듯 편집장님의 목소리가 들린 건 기분 탓이었을까.
예술의 섬 나오시마
다카마쓰 항구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면 나오시마 섬에 닿는다. 나오시마에는 커다란 공장이 있어 과거 산업폐기물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베네세라는 기업에서 나오시마를 예술 섬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함께 섬의 풍경을 바꿔나가기 시작한다. 지추미술관을 비롯해 베네세하우스뮤지엄, 이우환미술관까지 그야말로 안도 다다오 특유의 절제된 건축미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지만, 불행히도 나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다만 마을 사람들이 직접 참여한 ‘이에 프로젝트家 Project’를 감상하기 위해 골목을 돌았다. 이에 프로젝트는 일본식 전통 가옥을 현대미술과 접목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한 건축 작품으로 어둠과 빛, 물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카도야’를 비롯해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미나미데라’까지 모두 일곱 개의 작품이 골목 곳곳에 숨어 있다. 고요한 어둠으로 잠긴 집, 카도야. 나무 턱에 가만히 앉아 물속에서 점멸하는 숫자를 지켜봤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어둠이 눈에 익기만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자 조명을 밝힌 듯 주위가 환해졌다. 함께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일본인들이 무어라 속삭였고, 가만히 눈을 감고 듣고 있자 해독할 수 없는 일본어마저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식물이 있는 골목
나오시마 골목을 걷다 보면 이곳 사람들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을 짐작하게 된다. 대개의 경우 낮은 담장 안에 정원을 두고 나무와 꽃, 흙, 바위만 한 크기의 돌로 구성된, 작지만 완벽한 자연을 조성해놓았다. 혹여 마당이 없는 집은 집 앞에 작은 화분들을 늘어놓는다. 그러고는 햇빛이 강한 오후가 되면 약속이나 한 듯 골목마다 노인들이 나와 식물에 물을 준다. 이곳에서 식물을 만나는 일이란 비단 노인만의 일과가 아닌 여행자에게도 다정한 풍경이다.
타쿠미 씨의 오래된 집
일정 중 하루는 타쿠미 씨의 집에 묵었다. 그는 수염이 근사한 아저씨로 이곳 나오시마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길고 좁은 복도와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된 이곳이 일본의 전통적인 가옥 형태라고 했다. 걸음마다 삐거덕 소리가 나는 바닥과 은은한 색깔의 벽지, 네모반듯한 욕실 타일이 단정한 느낌을 준다. 특히 집 안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나무 무늬였는데, 따뜻하고 묵직한 문양과 색감이 집을 더욱 고즈넉하게 만든다. 오후의 어떤 시간, 나무 바닥 위에서 산란하는 햇빛의 일렁임을 보고 있으면 지난 몇 십 년간 볕이 머물던 바닥은 또 얼마나 따뜻했을지 상상이 간다. 마침 고양이 치즈 군이 볕이 머물던 자리에 누워 노란 바닥에 꼬리를 친다.
건축의 출발점도 도착점도 사람
사실 건축에 대해서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다. 다만 사흘간 이곳 나오시마에 머물며 발견한 건 좋은 건축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시이 카즈히로가 설계한 나오시마 분교 지구(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건물이 모여 있다)에는 아이들이 수업을 받고 있고, 삼부이치 히로시의 나오시마 홀 안에도 사람이 있어 더욱 생기를 갖는다. 조그만 대문에 걸린 아이의 젖은 운동화나 바닷가 미술관의 웅성거림 역시 사람이 있어 가능한 풍경이다. 학교는 학교대로의 소란이, 미술관에는 그만큼의 정숙함이, 오래된 집들이 모인 골목에는 느린 걸음의 노인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가지고 건축을 완성하는 듯 보인다. 내 지갑 속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미술관 사진 한 장이 들어있다. 커다랗고 하얀 타원의 천장으로 빛이 들어오는 자체로 완벽한 공간이다. 그리고 빛의 그림자 가장자리에는 건축, 아니 자연을 완성하는 하나의 점으로 사람이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