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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양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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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양진석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아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도 건축과 관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친숙한 건축가를 꼽으라면 단연 이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러브하우스>의 그 남자, 자유로운 건축가 양진석이다.
Interview
건축가 양진석
“건축에는 ‘원리’와 ‘기술’이 담겨 있어요. 원리는 곧 인문학이라는 뜻이고요. 결국에는 사람의 예술이라는 거죠.”
건축가님을 처음 접한 건 2001년에 방영한 <러브하우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어요. 예능에서 건축가가 전면에 드러난 것도 아마 그때가 처음이 아닐까 싶어요.
<러브하우스>는 사회 소외계층, 그러니까 주거 환경이 열악한 분들을 위해서 방송이 공익성을 갖고 집을 지어주는 프로그램으로, 제가 설계와 디자인을 맡았어요. 아주 오래된 얘기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기억해줄 정도로 인상적인 프로그램이었어요.
20년 가까이 지났는데 여전히 회자되는 걸 보면 당시 인기를 짐작할 만한데요. 이후로도 유사한 포맷의 프로그램들이 있었고, 최근에는 <내 집이 나타났다>에도 출연하셨죠?
<러브하우스> 당시의 연출팀이 맡은 프로그램이었어요. 철거부터 신축까지 스케일이 더 커졌죠. 방송 보셨어요?
그럼요. 모든 회차를 다 봤어요. 두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그 안에 ‘사람’과 ‘사연(이야기)’이 있다는 거였어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 두 가지 키워드가 건축에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싶어요.
정확하게 보셨어요. 건축이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른 점은 그 안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건축Architecture의 어원을 보면 ‘원리’와 ‘기술’이 담겨 있어요. 원리는 곧 인문학이라는 뜻이고요. 결국에는 사람의 예술이라는 거죠. 단순 기술로만 볼 수도 없고, 순수 인문학으로만 볼 수도 없어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응용예술, 응용과학으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본격적인 건축 이야기는 조금 뒤에 더 하고요. 방송에서 별명이 ‘양파고’였어요. 양진석과 알파고의 합성어였죠.
이경규 씨가 지어준 걸로 기억해요. 방송 당시 어려운 요구가 많았거든요. 건축가는 직업 특성상 어떤 요구가 있으면 거기에 맞는 솔루션을 제공하고 고객을 설득해야 해요. 오랜 회의 끝에 결국에는 연출팀을 설득하죠. 그래서 붙은 별명 같아요.
방송을 보니 과한 요구가 많기는 하더라고요.
엄청 많죠. 게스트들이 막 던지니까(웃음). 그게 건축가의 업보죠.
협소주택의 도면을 그릴 때 블록 게임에서 아이디어를 얻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나요?
너무나 다양한 것에서 영감을 받아요.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고요. 책도 많이 읽는 편이에요. 가만히 앉아서 바깥을 쳐다볼 때도 있어요. 상상의 날개를 달고 혼자 여행을 다니는 거죠.
영화라면 주로 어떤 장르를 즐기나요?
공상과학 영화를 보기도 하고, 전 세계 다양한 도시를 다니는 영화도 좋아해요. 시각적으로 자극을 주는 영화를 많이 보죠.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료이고요.
텍스트가 이미지화되어 나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도 궁금해요.
저한테 들어온 자극들은 상상을 통해 스케치가 되어 나와요. 저는 늘 작은 노트를 가지고 다녀요. 필요할 때마다 꺼내 스케치를 하죠. 여기 보시면 안에 살짝 비밀이 있어요. 제 딸이 그린 그림인데요. 제가 일할 때 옆에서 자기도 그리고 싶은 걸 그린 거예요. 아빠가 호빵맨이래요.
기분이 좋아지는 노트네요.
오늘 저를 만나러 여기까지 와주셨으니까 제가 스케치를 하나 선물할게요. 오늘 우리가 있던 건물과 장면이에요.
고맙습니다. 잘 간직할게요.
별말씀을요.
예전에 쓰신 글을 보니 르 코르뷔지에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근대 건축의 거장이기도 하고, 제가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그가 죽음을 맞이한 4평짜리 별장에 대해서 글을 쓰기도 했고요. 르 코르뷔지에가 말한 건축의 5원칙이 지금 보면 너무 당연한 건데 당시에는 거의 발명 수준이었죠.
보통 건축가라고 하면 설계만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인테리어뿐 아니라 기타 다양한 요소까지 신경 쓰는 것 같아요. 실제 건축가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요?
가장 기본적인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건축을 위한 디자인과 도면을 제공하는 것이겠죠. 모든 건축가가 그런 건 아니지만 저는 토탈 디자인을 추구해요. 건축에 관련한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결국 건축이나 실내 인테리어도 동일한 선상에 있다고 보거든요.
대표로 계신 와이그룹을 이야기해주시면 이해가 빠를 것 같아요.
일반적인 건축사무소와는 조금 결이 다르죠. 기본적인 건축설계 사무소의 기능을 하되, 건축부터 인테리어, 가구, 토탈 디자인을 추구하려고 애를 많이 쓰는 편이라서 건축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함께 일을 하고요. 또 한쪽에서는 개발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컨설팅 파트를 두고 있어서 특이점이 있죠. 컨설팅이라고 하면 무엇을 지어야 할지부터 어떻게 활용하고 디자인할지까지 건축을 기본으로 하는 모든 솔루션을 제공하는 일을 말해요.
사실 건축은 꽤나 전문적인 분야라는 생각 때문에 접근이 마냥 쉽지는 않아요.
그럴수록 건축을 더 이야기해야 해요. 우리가 도시를 살며 건축 없는 풍경은 상상할 수 없잖아요. 우리 주변의 건축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건 하늘과 땅 차이죠. 외국에서는 건축이 기본 교양 상식으로 다뤄져요. 모든 사람들이 도시의 새로운 건축을 화두에 올려서 이야기하고 관심을 표명하죠.
새로 개봉한 영화를 이야기하듯 말이죠?
그렇죠. 건축은 모든 예술의 기본이라고 이야기하곤 해요. 영화감독, 작가, 미술가, 모두 건축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경우도 많고요. 쭉 공부하다 보면 건축이 왜 중요한지를 느끼게 되고, 더 나가서 무엇이 좋은 건축이고 안 좋은 건축인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화여대 안의 ECC(Ewha Campus Complex)를 좋아해요. 일종의 영감을 주거든요. 하지만 나쁜 건축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아직 잘 모르겠어요.
ECC는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했는데, 이대 캠퍼스 경관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방문객에게 새로운 공간적 경험을 선사하는 좋은 건축이죠. 나쁜 건축이라는 건 쉽게 말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가령 너무 장식을 많이 했다거나 도시 경관을 해치는 건축을 말하는데요. 딱히 하나의 요소만으로는 규정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겠네요.
동대문에 DDP(Dongdaemoon Design Plaza)가 처음 생겼을 때, 그리고 서울시청 신청사의 경우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논란이 있었어요. 그것도 나쁜 건축으로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는 논쟁 자체는 아주 위험해요. 주변이 뭐지? 주변과 어울리려면 어때야 하지? 고민해보자면 사실 어울림은 위험한 논쟁이죠. 제가 고등학생 때 칼라가 없는 라운드 티셔츠를 입었다고 맞은 적도 있어요. 어떻게 옷이 칼라가 없을 수 있어? 하고요. 남자가 귀걸이를 하거나 염색을 하면 예전에는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혼났잖아요. 건축도 똑같아요. 주변과 다르다고 모두 나쁜 건축은 아니에요. 이걸 형태적으로만 봐서는 안 되는 거죠.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보면 아시겠지만 주변 경관과 결코 어울린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당시에는 정말 파격적인 건물이었거든요. 초등학생과 피카소의 그림을 단순히 그림체만 놓고 판단할 수 없듯, 건축 역시 철학적, 인문학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봐야 해요. 공간적 개념과 맥락을 이해한다면 형태에만 집착하지는 않을 거라고 봐요.
건축가로서 자신의 대표작, 그러니까 ‘좋은 건축’을 이야기해주세요.
단연코 지금 계신 양양의 설해원을 첫손에 꼽을 것 같고요. 용평의 더 포레스트 레지던스도 완성도 높은 고급 별장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에요. 종로 그랑서울의 청진상점가는 디자인뿐 아니라 총책임자로 식당 선정부터 전체 디자인 조율까지 맡은, 와이그룹의 모든 업무를 총괄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었죠. 그 외에도 넵스 사옥과 디사모빌리 사옥, 제이에스코퍼레이션 사옥까지 최근에 작업한 사옥 삼총사 시리즈도 대표작으로 꼽고 싶네요. 지금 말한 작품들은 사용자의 반응이 특히 좋았어요. 그들의 만족도가 높으면 건축가로서 기분이 좋죠.
사용자의 만족이 곧 건축가의 만족인 거네요.
사업주도 좋아해야 하고 사용자도 좋아해야 해요. 둘 모두의 만족도가 높은 건축을 했을 때 가장 보람 있고요. 제이에스코퍼레이션은 사용자가 직원이잖아요. 거기를 골조만 남기고 리모델링했는데, 건물의 가운데 네 개 층을 오픈 스페이스로 개방했어요. 그러자 모두 계단으로만 다니세요. 만족도가 높은 거죠. 사업주의 만족, 사용자의 만족, 건축가 저 자신도 만족하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어요.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우선하겠지만, 그래도 건축가로서 고집하는 부분이 있나요?
명동성당에 가면 높은 층고 특유의 성스러운 분위기가 있잖아요. 절에 가면 편안함 속에서 나오는 공간적 경험이 따라오고요. 저는 이곳 설해원의 계단처럼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곳을 만들어요. 건축이라는 건 인상에 남아야 하고, 어떤 방향이든 방문자에게 영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건축가로서 일관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있나요? 가령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는 그의 시그니처가 됐잖아요.
그건 아마 건축가 저마다의 특징일 것 같은데, 저는 소재를 동일하게 쓰지 는 않아요. 용도마다 소재를 다르게 하지만, 한 가지 제 기준이라면 일상에서 자주 발견할 수 없는 공간적 경험을 우선시해요. 어떤 때는 계단이 될 수도 있고, 편백나무를 사용한 공간이 될 수도 있고, 건물 외관이 중첩되면서 새로운 느낌을 줄 수도 있고요.
건축에도 흐름이나 유행이 있을 것 같은데, 지금 현재 이곳의 건축은 어떤 모습인가요?
최근 건축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는 컴퓨터 기술 발전에 따른 설계 방식의 변화예요. 3D 방식으로 다양한 형태의 건축 디자인이 가능해졌죠. 동대문의 DDP를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지속가능한 건축이 계속 시도되고 있어요. 유지와 관리가 용이하고 지구 환경에 영향을 덜 주는 건축이죠. 아직은 검증이 필요한 일이에요.
일반인의 경우라면 자신의 생활권 안에서 건축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아요.
카페를 생각하면 쉬울 것 같아요. 사람들은 평소와 다른 이색적인 경험을 위해 카페에 가는 거 아닐까요.
요즘에는 이색적인 공간이 너무 많아졌죠. 사실 조금 비슷한 모습이 많아서 오히려 특색 없다는 느낌을 받기도 해요.
그래서 제가 항상 주장하는 게 있어요. 공간을 만들 때 영화 세트장을 만들면 안 돼요. 가로수길, 삼청동, 서촌같이 사람 많은 길에 가면 영화에서 많이 본 듯한 공간을 구현해놓은 곳이 있어요. 처음에는 예뻐서 한두 번 가보지만, 그거 금방 싫증 나요. 거짓말 공간이잖아요. 어떤 ‘스타일’이라고 이름 붙인 공간, 건축가로서 아주 경계해야 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가는 건축이 아니라 점점 더 멋있어지는 건축을 만들어야죠.
그럼 스타일의 반대말은 뭘까요?
어디선가 본 듯한 건축, 어떤 하나의 형태, 과거 건물의 형태, 아니면 현재 어디선가 존재하는 도시적 공간의 형태를 갖고 와서 연출하면 그게 스타일인 거고요. 어디서도 보지 못한 창의적인 걸 했을 때 기억에 깊게 남겠죠.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데서 새로운 게 나타날 수는 없을 테고요.
그래서 건축가가 존재하는 거겠죠. 이렇게 설명해볼게요. 한때 공장이던 곳을 개조해서 카페로 바꾸면 특별해 보이잖아요. 용도를 바꿨을 때 느껴지는 의외의 감동이 있죠. 그건 그 공장이 가진 시간성, 그러니까 오랜 시간을 머금은 공간에 가면 저절로 떠오르는 감정이 아닐까 싶어요.
건축 설계가 일종의 창작이잖아요. 25년 경력의 기성 건축가로서 그 흐름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일단 경험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동안 겪어온 수많은 프로젝트를 통한 시행착오나 경험이 중요하겠죠. 건축가는 자기 설계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농익은 건축이 또 나오게 돼요. 젊은 건축가들이 새롭고 신선한 설계를 할 수는 있겠지만 농익는다는 건 그 깊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거니까요.
시행착오라고 한다면 실패한 건축도 있나요?
너무 많죠. 저 자신에게 만족을 못 하기 때문에 늘 부족함을 느껴요. 다만 경험을 통해서 실수의 확률을 줄여나가는 거겠죠.
건축 이외에도 다양한 이력이 있으시잖아요. 저술가이자 교수, 5집 앨범을 낸 뮤지션, 음악 프로듀서, 방송 출연과 영화배우 이력까지. 이유가 뭔가요(웃음)?
일단 저는 호기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제가 특별히 다양한 분야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연극, 연기, 음악 모두 건축과 똑같은 선에 있다고 보거든요. 계속 쌓아가야 하고, 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안에서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하고요.
사실 한 번에 하나를 성취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너무 많은 일에 정신이 분산되어 있는 거 아니냐고, 많이들 오해하시는데요. 그런데 전 그만큼 안 하는 것도 많아요. 일반적으로 그냥 노는 것, 쉬고, 당구 치고, 술 마시고, 멍 때리고, 텔레비전 보고, 그냥 노는 걸 안 해요. 그렇다고 각박하게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놀 듯이 일해요. 주말에 일하러 현장에 가는 것도 즐기고요.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러 갈 때도 가족과 함께 가요. 시간이 많아요. 잠도 푹 잔다니까요(웃음).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의 에세이를 보면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는 놀면서 공부한다’고 흔히들 말하잖아요. 그때 그 주인공이 여기 있었네요.
저는 건축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들이 누워서 야구 보고 즐기듯 저는 스케치하고 디테일 그리고, 곡 만들고 가사 쓰는 게 똑같이 재미있어요. 남들보다 시간을 더 많이 써서 다양한 걸 하는 게 아니라 약간 방향이 다른 것뿐이죠. 혼자 노는 스타일이라고 할까요.
자기 취향을 아는 거네요.
이 나이가 되니까 싫어하는 걸 안 하는 방법을 아는 거죠. 제 딸에게도 하는 얘기가 있어요. 너무 길게 공부할 생각하지 마라. 집중해서 하면 훨씬 효과가 좋을 거야. 그러다 보니 제가 저를 많이 알려고 애쓰고 계속 그렇게 맞춰가는 거죠.
“나는 건축을 음악한다.”라는 표현을 봤어요. 방금 이야기와 통하는 의미 같기도 하고요.
건축을 음악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리듬을 가지고 즐기면서 하는 것을 말해요. 그게 곧 저인 거 같아요. 이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겠죠.
음, 좋네요. 그렇다면 자기만의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집’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건축가 양진석의 집은 어떤 공간인가요?
불행히도 제가 아직 단독주택에 못 살고, 엄청 오래된 아파트를 보수해서 20년째 살고 있는데요. 거기에서 혼자 살다가 결혼했고, 딸이 생겼고, 혼자 살 땐 제 서재이던 곳이 아내의 바이올린 연습실이 되었다가 이제는 딸의 방이 됐어요. 점점 저는 갈 데가 없어졌어요(웃음). 아, 얼마 전에는 식탁을 바꿨어요. 기존 4인용 식탁에서 10인용 식탁을 들여놓았는데요. 도서관처럼 길게 놓았더니 생활이 바뀌더라고요. 밥도 거기서 먹고, 일도 거기서 하고, 가족이 다 같이 모이는 장소가 된 거예요. 빅 테이블이라는 개념이 집 안의 풍경을 바꾼 거죠. 꽤 권장해요. 그다음에 제가 실험한 건 거실 소파를 벽에서 떼어내는 거예요. 소파 뒤로 사람이 다니면서 조금 더 아늑한 공간이 되었죠.
가구 배치 하나만으로도 생활 습관이 바뀌는 거네요. 천장의 높이나 해가 드는 창의 위치만 달라져도 그 사람의 삶이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건축이 사람에 끼치는 영향이 아주 커요. 집 얘기를 하자면 아파트에서 살다가 주택으로 옮기면 부지런해진다고 하잖아요. 아이들의 공간적 상상력이 풍부해진다고도 하고요. 같은 아파트라도 인테리어를 다시 하면 집이 달라 보이죠. 사무실은 안 그런가요? 내가 앉아 있는 책상이 오픈되어 있으면 집중도 안 되는데 구석에 가 있으면 안정적이잖아요. 그런 것들이 모두 공간에 대한 얘기죠.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좋은 집, 좋은 건축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좋은 건축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해요. 가령 아까 계단을 얘기해볼게요. 계단을 처음 봤을 때 독특하고 오묘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잖아요. 수영장의 회색 돌과 물을 보면서 또 다른 얘길 하기도 하고요. 그런 게 좋은 건축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공간의 문제만은 아니고 사람이 있는 풍경을 말하는 거네요.
그래서 제가 영화 세트장 같은 건축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거예요. 모조의 공간은 단순히 예쁘다는 감정 외에는 불러일으키는 게 없거든요.
그렇다면 좋은 건축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요?
잘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아까 보여드린 호빵맨 노트는 낱장으로 찢어서 보관할 수 있게 디자인됐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점선이 보이지는 않죠. 그런 디테일을 보면 감동이잖아요.
일종의 세심함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라는 말을 했어요. 저 역시 디테일 있는 건축을 좋아해요. 세심하게 잘 만든 건축은 모두 디테일에 강점이 있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요. 저희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이곳 설해원은 어떤 곳인가요?
이곳 강원도 양양은 새로 뚫린 고속도로 덕분에 교통이 편해졌고, 미세먼지가 없다고 유명세를 탄 곳이에요. 거기다 조금만 나가면 서퍼들의 장소가 나오죠. 아주 하이브리드한 도시예요. 시니어와 젊은 사람이 모이는 독특한 이 지역만의 분위기가 있어요. 그런 곳에 상징적인 건물을 건축하고 있으니 제가 얼마나 흥분되겠어요. 설악산의 ‘설’과 동해의 ‘해’를 붙여서 동해를 품은 정원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죠. 오십이 넘은 건축가가 그동안의 경험을 모두 쏟아부어 만든 작품이에요.
기존 프로젝트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설계부터 완전히 달랐어요. 다른 데는 설계가 다 끝나고 공사하잖아요. 여긴 공사하는 도중에 설계를 끊임없이 수정했어요. 건축가에게는 너무 힘든 작업이에요. 특히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실수의 책임이 모두 설계 쪽으로 올 만큼 리스크가 있었죠. 하지만 다른 현장과는 다르게 수영장과 클럽, 온천과 콘도, 단독주택 등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어서, 건축가로서는 놀이터나 다름없는 작업이었죠.
놀이터라고 표현하시네요.
건축가는 작업의 호흡이 길어요. 빌딩을 만들면 1~2년 정도를 작업하는데 한 건물만 하면 지겨워 죽어요(웃음). 나중에는 지쳐요. 하지만 이번 작업은 지칠 새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재미있었죠.
건축가로서 기쁨과 두려움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주세요.
흔히 얘기할 수 있는 건 제가 죽어도 작업물은 남는다는 점이죠. 건축은 기본적으로 백 년, 이백 년은 거뜬히 버티잖아요.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이 자식 같은 아이가 내가 떠나도 남는다는 자체가 보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워요. 내가 이렇게 건축해도 되나. 이런 걸 만들어도 되나. 평생 죄의식 가지고 살죠. 스트레스 받아서 병 걸릴 거 같아(웃음). 또 하나의 감정은 이 건물이 제 스케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잖아요. 그리고 지금 저는 이 공간에서 즐기고 있는 거고요. 이게 정말 큰 보람이에요. 아마 건태 씨에게도 보람이 아닐까 싶어요. 이 건축물을 만든 건축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잖아요.
저도 나중에 누군가와 함께 오게 되면 조금 거들먹거려볼게요. 여기 만든 사람 내가 잘 알지, 하면서요.
꼭이요(웃음).
건축가로서 마지막 단 하나의 건축만 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요?
르 코르뷔지에처럼 아주 조그만, 숲속에 있는 나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혼자 사색할 수 있고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집. 별장이라고 할 것도 없죠. 열 평 미만의 조그만 공간을 가지는 게 제 마지막 숙제예요.
에디터 김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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