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벽 건너기

정지돈 ─ 작가

그에게 감히 ‘도시 산책자’라는 이름을 붙여봅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되,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할 때가 제일 좋아요.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카페와 영화관에 가도
아무도 저와 관계하지 않을 때.
그런 가운데 저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지켜볼 수 있을 때.
그게 가장 이상적인 산책 같아요. 철저한 관찰자가 되는 거.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지돈입니다. 

 

소개가 간단하네요. “한국 사회에서 문학은 직업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어서 어떻게 소개하실지 궁금했거든요. 

제가 쓴 글을 미주알고주알 다 알고 계신 것 같아서 조심스러워지는데요(웃음). 그렇게 이야기한 건 약간의 과장이 섞인 거기도 해요. 문학의 현실을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직업이라는 건 결국 경제적인 이야기와 연결될 텐데, 문학 한다는 사람들 대부분이 문학으로 생활할 만큼 돈을 벌지는 못해요. 경제적 벌이는 강의나 강연 등 다른 방식으로 하고, 그다음에 문학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요. 근데 그런 현상과는 별개로 “글 쓰는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뭘 하는 사람이라는 걸 꼭 밝혀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직업이 정체성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럼 정체성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뭐예요? 

음… 조금 다른 얘긴데, 정체성은 고정되지 않은 게 당연해요. 누구나 정체성은 변할 거예요. 여기와 저기에 걸쳐 있어서 규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요. 유동적인 정체성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으니까 설명하기 위해 규정할 수밖에 없지만, 정체성을 고정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이야기가 잘못 전해지면 유동적인 정체성만 강조하는 것처럼 들릴 텐데요. 저는 반대로 정체성을 고정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규정되지 않은 정체성은 자연스럽게 외면받으니까 가능하면 정체성을 고정하거나 국한하는 걸 주의하려고 하는 거죠. 

 

그럼 오늘은 규정하지 않고 ‘지돈 씨’라고 불러 볼게요(웃음). 예전에는 “글을 많이 쓰면 안 된다. 다작보다는 과작이 작가에게 좋은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셨어요. 근데 언젠가부터 다작 작가가 되셨죠. 최근에도 신간이 나왔고요. 

그래서 힘들어요(웃음). 근데 좋은 점은 확실히 있더라고요. 과거의 저는 과작하는 작가가 무비판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열과 성을 다해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작품을 발표하는 사람이 그야말로 진지한 작가라고 생각한 거죠. 근데 어느 순간 이게 문학적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싶더라고요. 음악으로 예를 들자면, 모차르트가 열과 성을 다한 곡도 좋지만 10분 만에 후루룩 쓴 곡도 큰 사랑을 받잖아요.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을 과작이란 틀 안에서 단속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싶었어요. ‘과작해야 한다.’는 생각 아래 오히려 내가 나를 가두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가끔은 우연한 순간에 훌륭한 게 탄생하기도 해요. 외부와의 조응이 만들어 낸 결과겠죠. 그래서 좀 열어놓고 작업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번 호 주제어가 ‘산책’이어서 자연스럽게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이 떠올랐어요. 부제가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죠. 이 글은 현대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에세이로 써보자는 제안에서 시작되었다고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하루에 일어난 이야기예요. 근데 서울에서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한 권으로 엮는 건 너무 억지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서울에만 국한해도 얘기가 단조로울 것 같아서 비교 대상이 될 만한 도시를 함께 써보자 싶었죠. 구보씨에게는 도시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서울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왜 파리였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단… 때마침 파리에 가게 돼서요(웃음). 3개월간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거든요. 워낙 가보고 싶던 도시이기도 했고, 예술적으로 프랑스란 나라를 좋아했기 때문에 괜찮겠다 싶었어요. 만약 파리가 아니라 다른 도시에 갔다면 이 책엔 다른 도시 이야기가 실렸겠죠? 

이 책의 주요 키워드는 ‘도시’와 ‘산책’일 거예요. 두 단어가 지돈 씨에겐 어떤 의미예요?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시골보단 도시가 좀더 편해요. 음… 근데 저 자연도 좋아하거든요. 자연을 걷는 것도 꽤 즐기는데, 자연은 너무 크고, 지루해요. 자연과 인공이 적절하게 조화된 곳이 언제나 산책하기에 가장 재미있는 것 같아요. 도시와 산책은 정의 내리려고 해본 적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어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데요. 이 책을 쓰기 위해 산책에 관해 생각하면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 보면 산책이란 개념이 옛날부터 있던 건 아닐 거예요. 이동 수단이 없던 때는 모두가 걸어 다녔으니 굳이 산책이란 단어가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산책이란 말이 처음에 어디서 탄생했는지 아세요? 

 

어, 아니요. 

그리스 시대 철학자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학파를 소요학파라고도 하는데요. 그 당시 철학자들은 두세 명씩 짝을 지어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며 학당을 걸었대요. 그게 바로 산책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엔 산책에 ‘함께할 사람’과 ‘대화’가 있던 거죠. 근데 지금은 산책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한적한 곳을 거니는 이미지’를 가장 먼저 떠올려요. 도시가 발달하면서 시끄러워지고, 만나는 사람도 많아지고, 스트레스도 생기니까 이젠 한적한 곳에서 나한테 집중하면서 보내는 시간을 산책이라 부르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와의 대화가 아니라 나에게 집중하는 일이니까요. 

 

산책의 정체성도 유동적으로 변하는 거네요. 지돈 씨가 좋아하는 산책은 어떤 유형이에요? 

사람들 사이에서 벽을 느끼는 거요. 벽이 있다는 말은 보통 부정적으로 쓰이는데요. 저는 사람들 사이에 있되,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할 때가 제일 좋아요.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카페와 영화관에 가도 아무도 저한테 말을 걸지 않고 관계하지 않는 산책이죠. 그런 가운데 저는 사람들이 걷고, 뛰고, 뭔가 하는 모습을 자유롭게 지켜볼 수 있을 때, 그게 가장 이상적인 산책 같아요. 철저한 관찰자가 되는 거. 

 

사람들 보는 게 왜 재미있어요? 

사람이란 존재는 참 이상하잖아요. 다들 뭘 하는지 궁금해요. 

 

그럼 사람이 없는 곳은 굳이 산책하지 않아요?

하죠. 사람들이 꼴 보기 싫을 때(웃음). 사람이 없는 곳을 걸으면 좋아요. 근데 금세 지루해져요. 지루해지면 사람 있는 데로 가고 싶고, 사람 있는 데서 산책하면 또 피곤해지니까 다시 사람 없는 곳을 찾게 돼요. 근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게 뭐야. 이도 저도 아니네.” 한단 말이죠. 그런 게 아니라, 전 정말로 사람이 많은 곳도, 없는 곳도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걸 이해시키기가 참 어려워요.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짜 좋은 지점은 사람이 없는 곳과 있는 곳을 번갈아 움직일 때, 그사이의 ‘변화하는 감각’인 것 같아요. 

 

구체적이고 재미있네요.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프라하에 갔을 때 얘기를 해볼게요. 카를교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다리일 거예요. 그만큼 유명하니까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가는 골목이 엄청 좁거든요. 그 틈에서 떠밀리듯 걸어가야만 하는 거예요. 저 멀리 카를교가 보이긴 하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이 관광객의 인파와 인구 밀도를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을 때 시선을 돌렸는데, 텅 빈 골목에 중정이 하나 보이는 거예요. 일단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서 방향을 틀어 무작정 중정으로 피했어요. 사람들로 가득 찬 저쪽과는 달리 쥐 죽은 듯 조용한 공간이었죠. 예전에 프라하의 귀족이 살았던 곳을 시립미술관으로 운영하는 것 같았어요. 마침 전시를 하고 있길래 표를 끊으려고 하는데 부스도 없이 하얀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 있더라고요. 할머니 두 분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요. 표를 끊고 전시장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어요. 작품도 좋고 공간도 멋졌죠. 근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굉장히 묘하게 느껴졌어요. 이 공간만 벗어나도 카를교로 가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는데, 전 바로 옆 공간에서 아무도 없는 전시를 즐기고 있는 거잖아요. 그 기분이 왠지 흐뭇하고 좋더라고요.

책에 구보씨 이야기가 종종 등장해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사는 돈벌이가 시원찮은 성인 남자의 자기 연민”이라는 표현을 보면 마냥 찬양하지만은 않는다고 느꼈어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여전히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습작 시절에 처음 완독했는데, 문체도 특이하고 내용도 좋아서 진짜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작품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건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부터였어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나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이데올로기적인 문학이 있을 수 있나 싶더라고요. 편향성이 짙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게 믿을 수 없을 정도였죠. 그동안 너무 무지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읽어 보았는데, ‘찌질한’ 남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부분이 정말 많더라고요. 그렇다고 이 작품이 여성 혐오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시대적 한계라는 게 분명히 있으니까요. 다만, 제가 이렇게까지 눈치를 못 채고 읽었다는 게 충격적인 거죠. 동시에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인식이 바뀌었다는 지점에서요? 

그도 그렇고, 문학적 태도가 세계를 경험하는 태도랑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요. 소위 ‘남성 산책자 소설’을 떠올려 보면, 고요히 걷거나 정처 없이 방랑하는 이야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여성이 등장해요. 남자 주인공은 성적인 욕망을 보이면서 여성들을 쫓아다니죠. 그 지점이 너무 별로고, 좀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성 산책자인 플라뇌즈flaneuse는 유니콘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한 거군요. “여성은 거리로 나서는 순간 응시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면서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다. 시대가 예술을 반영한다.”고 쓰셨는데 여성 인권이 점차 신장되는 이 시대에… 플라뇌즈가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제가 판단할 수 없는 일 같아요. 플라뇌즈, 여성들이 판단해야 할 일이죠. 아까 제가 사람들 사이에 유리 벽이 있는 게 좋다고 했잖아요. 근데 여성에겐 그 벽이 깨지는 빈도가 훨씬 많은 것 같아요. 애초에 없다고 느껴지기도 하고요. 고요하게 걷고 싶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잖아요. 누군가 쳐다보고, 말을 걸고, 따라오고… 남성에 비해 그 외 많은 위험을 고려해야 하죠. 옛날엔 밤에 외출하면 위험하니 여성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언뜻 들으면 여성을 보호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잖아요. 위험하니까 밤에 집에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여성이 다 같이 나옴으로써 위험을 뚫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처음엔 위험하겠지만 차츰 그 위험은 여성들의 행동으로 깨지게 될 거예요. 사회적인 변화, 모두의 인식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죠. 

 

이런 문제는 비단 여성만의 이야기가 아닌 듯해요. 지돈 씨도 외국에서 산책하며 비슷한 걸 경험했다고 했죠. ‘1세계 백인 남성’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오는 위험 같은 거요. 

제가 밤 산책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지금도 종종 어두울 때 밖으로 나가는데요. 서울에서 밤에 산책하는 건 전혀 두렵지 않아요. 아무 문제도 없거든요. 새로운 길을 걷다 궁금한 곳이 나오면 아무리 으슥해도 겁 없이 들어가 보곤 하죠. 근데, 파리에서는 밤에 산책하기가 좀 무섭더라고요. 동양인 남성이어서 움츠러들었고, 서울과 달리 소매치기가 많은 동네니까 더 무서워지는 지점이 있었어요. 

 

잘 모르는 동네라 더 그랬을 것 같아요. 근데 지돈 씨는 안 가본 길로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죠.

새로운 길을 걷는 건 언제나 재미있어요. 모르는 장소를 걸으며 환기되는 지점이 특히 좋더라고요. 바쁠 땐 어쩔 수 없이 잘 아는 길, 늘 가던 길만 걷게 되는데요. 가끔 옆으로 빠져서 새롭게 길이 이어지는 걸 보면 좀 짜릿하기도 해요. ‘우리 동네에 이런 길이 있었어?’ 하고 익숙한 곳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거죠. 서울 같은 대도시엔 워낙 뭐가 많다 보니 골목골목 안 가본 길들이 의외로 많아요. 안 그래도 엊그제 만난 지인이 이런 얘길 하더라고요. 서울에서 40년을 살아도 모르는 곳이 너무 많다고요.

새롭게 발견한 길이나 풍경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네요. 

작년에 굉장히 신비로운 경험을 했어요. 마포구로 이사 온 지 이제 3년 가까이 돼가는데요. 앞에 홍제천이 있어서 천을 따라 자주 걷거든요. 물길을 따라 걷는데 어느 날엔 폭포를 보게 됐어요. 서울 한복판에 폭포라니, 너무 이상하고 신비롭지 않나요? 심지어 그 앞에서 할머니들이 에어로빅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인공 폭포였어요. 도시 한복판에 있는 폭포가 퍽 기이하다고 생각하면서 좀더 들어가 봤는데, 홍제천 위쪽 언덕 부근에 오래된 호텔이 하나 보이더라고요. 이름도 재밌어요. ‘스위스 그랜드 호텔’(웃음). 1988년에 생긴 호텔이다 보니 건축적으로도 재미있는 요소가 많았어요. 꼭 꿈을 꾸는 것 같았죠. 호기심이 생겨서 계속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거기 ‘유진상가’가 있었어요. 일종의 주상복합으로 과거의 흔적이 남은 세운상가 같은 곳이거든요. 서울 안쪽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낡은 것들이 있다는 게 무척 재미있게 다가왔어요. 온 김에 좀더 깊숙이 가보자 싶어서 더 들어가니 홍제천이 돌아 나오는 북악산이 보였죠. 근데 거기 동네가 하나 있더라고요. 북악산과 강이 있는 풍경을 보며 학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웠어요. 

 

한국화 같은 풍경이 상상되는데… 직접 보고 싶어졌어요. 

시간 날 때 다녀와 보세요. 정말 신비로운 풍경이었어요. 걸어서 가면 힘들 수도 있으니 자전거 타고 가보는 걸 추천해요. 

 

SNS에서 “잠깐 걷기만 했는데 홀린 듯 돈 써버림”이라는 글귀를 보았어요. ‘산책하는 소비자’라니, 공감할 수밖에 없었는데요(웃음). 최근엔 어떤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나요? 

뭘 사겠다는 마음으로 산책하는 건 아닌데 주변 가게들을 보면 꼭 들어가 보게 돼요. 못 보던 가게가 생길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해요. 월세가 만만치 않을 텐데, 장사가 잘 되려나, 싶어서요. 주인이 어떤 마음으로 가게를 만들었나 호기심도 생겨서 곧잘 들어가 보는 편이죠.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면 뭔가 한두 개씩 사곤 하는데 보통은 먹을 거나 펜 같은 가벼운 것들이에요. 최근에도 펜을 하나 샀는데 (연필꽂이를 뒤진다.) 이거예요. 2,500원이었나? 산책하다가 카페에 들어갔는데 구석에 문구점이 같이 있더라고요. 구경하고 나면 뭔가 하나라도 사야 할 것 같아서 또 이렇게 소비하고 말았네요(웃음). 

 

한번 써봐도 되나요? 

그럼요. 

 

되게 얇고 가볍네요. 책에 “도시 산책자는 자연 또는 시골의 산책자와 달리 내면에 집중하지 못하고 현란한 소비문화에 정신이 팔린다. 광고로 눈이 돌아가고 목적지를 잃고 방황한다.”고 쓰셨지요. 

맞아요. 산책하다 자꾸 뭘 사는 저처럼요.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잠재력이 된다.”고 덧붙이셨어요. 어떻게 소비가 잠재력이 될 수 있는지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간단하게 얘기하면, 도시의 다양함이 자기 자신에게 몰입되는 걸 해방시켜 준다고 생각했어요. 이 도시엔 상상도 못 할, 이상하고 신기한 게 정말 많잖아요. 그것들이 내 안으로 매몰되는 걸 어느 정도 깨준다고 본 거죠. 그러나 이런 모습도 무한히 지속되진 않더라고요. 도시의 산만함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한구석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 같아서요. 특정한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거죠. 예전에는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진 상점과 광고를 둘러봄으로써, 도시의 산만함 덕분에 내 안으로 파고들지 않고 잠재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면, 지금은 몇몇 쇼핑센터, 유명한 브랜드, 이른바 ‘핫 플레이스’로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이 많아졌어요. 가로수길이나 망리단길 같은 이름이 이를 잘 나타내죠. 도시의 현란한 소비문화가 오히려 몇몇 군데로 집중돼 버려 산만함이 사라진 거예요.

산만함이 인위적으로 구역화되었기에 “다른 의미의 부정적 몰입과 연결됐다.”고 쓰신 거군요. 

맞아요. 인플루언서들이 방문하는 힙한 곳으로 소비문화가 패턴화되어 버리는 것 같아요. 그게 부정적인 고립을 야기한다고 보고요. 많은 사람이 ‘몰입’을 예찬하지만, 몰입이 가지는 한계는 너무나 명확해요. 몰입이 있으면 반드시 산만함이 함께 와야 해요. 산만함이 있으면 몰입도 동시에 와야 하고요. 그게 건강한 순환인데 이제 도시는 산만함을 잃었으니 부정적 몰입이 되어 버린 거죠. 

 

지돈 씨는 이동 수단을 ‘걷기의 코스를 넓혀주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하셨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면 더 먼 곳에서 다시 걸을 수 있고, 산책 범위가 확장됨으로써 더 많은 재미를 만나게 된다고 했어요. 더 먼 곳으로의 걷기, 새로운 걷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걷는 장소도 중요하지만 계속 걷기만 하면 지루하지 않나요? 자전거나 자동차 같은 기술적 요소의 힘을 빌려 반경을 넓히고 새로운 곳을 걸으면 그런 지루함이 사라지는 게 좋아요. 산책의 반경을 확장함으로써 재미도 넓히는 거예요. 그런 새로운 재미를 위해 걷다 말고 따릉이나 킥보드를 타는 거기도 하고요. 

 

책에 “슬로 라이프, 느림의 미학, 그게 바로 산책 아닌가?”라고 쓰셨는데, 그럼 따릉이나 킥보드를 타는 건 산책인가요? 

그럼요. 기차나 비행기에 비해 속도가 느리고, 그 정도 속도로는 주변 풍경이나 사람을 볼 수 있잖아요. 반면 자동차만큼 빨라지면 풍경은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워져요. 옛날 SF 영화를 보면, 빠르게 지나가는 주변 풍경이 네온사인처럼 선으로 표현되잖아요. 일종의 과장이고 은유지만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아요. 속도가 붙을수록 풍경은 일종의 그래픽이 되고, 진짜 우리랑은 격리된 공간처럼 보이죠. 반면 느리면 느릴수록 하나의 완전한 물질이 되고 부피가 생겨요. 제가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사이 지점을 지니고 있어서예요. 인간의 신체가 도시 전체를 소화하기에는… 버거워요. 속도도 그렇고, 규모도 그렇고요. 그래서 자전거 산책이 도시 산책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가끔 킥보드 타는 걸 즐기는 것도 그런 이유고요. 

 

방금 자동차 속도라면 풍경은 그래픽이 된다고 했고, 책에 “산책과 드라이브는 반대 항”이라고 쓰기도 했는데, 그럼 자동차를 타는 건 산책일 수 없을까요? 

그건 산책이 아니라 드라이브죠. 그러나 자동차가 산책의 반경을 넓혀주는 좋은 기술적 요소는 될 것 같아요. 가장 좋은 산책은 자동차를 타고 모르는 지역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지점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걷는 게 아닐까요? 가장 확실하게 재미있는 산책이 되겠죠. 

 

이 꿈의 코스를 실현할 수 있다면 어디로 가보고 싶어요?

캘리포니아요. 

 

왜요? 

안 가봤으니까요(웃음). 저는 언제나 안 가본 길에서 산책하는 걸 원해요.

걷기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 볼게요. 걷기가 가진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율도가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차, 기차, 마차는 정해진 코스와 규격이 있는 반면 걷기는 정해진 방향성도 없고, 언제든 벗어날 수 있으며 뒤로, 혹은 옆으로도 걸을 수 있다고요.

언제나 자율도가 있는 활동을 더 좋아하지만, 방향성엔 이유가 있는 법이기에 이걸 해치고 싶진 않아요. 특히 속도가 있으면 방향성은 반드시 요구되니까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이동 수단에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해 보세요. 

 

큰일 나겠네요. 

그래서 자율성 예찬론을 펼치고 싶진 않아요. 도로교통법이 방향과 규격을 정해놓은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법이거든요. 근데 이런 방향성 때문에 도시 산책에 문제가 생겼죠. 

 

어떤 문제요? 

자동차가 개발되면서 도시를 속도 위주로 개편해 버린 거예요. 자동차가 생겼으니 걸을 일이 대폭 줄어들 거라 생각해서 빠름과 느림, 방향성과 자율성이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동차의 방향성과 빠름에만 집중한 거죠. 인간은 반드시 실수를 해요. 그리고 이 실수는 50년이 지나서야 인식되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래서 교차와 결합이 중요하다고 봐요. 한쪽으로 휩쓸렸을 때 생기는 문제들이 있거든요. 

 

그 문제 중 하나가 서울과 자연과의 거리라는 거죠. “한강과 생활공간 사이에 놓인 도로가 물리적인, 또 심리적인 거리감을 만든다.”고 하셨어요. 

맞아요. 도시가 자꾸 그렇게 만들어요. 저는 가볍게 쓱 나가서 아무 데나 걷고, 아무 데나 들어가는 게 좋은데 도시가 도로를 놓음으로써 산책의 흐름을 방해하고, 결국 한강으로, 숲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어요. “우리 날씨도 좋은데 한강 가서 산책할까?” 하는 식의 목적을 만들어 버리는 거죠. 도시 계획이 속도 위주로 개편되면서 산책 코스를 규정해 버린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산책은 여기에서 하세요.’ 하는 것 같아서요. 사실 진짜 좋은 산책은 빵 사러 갈 때, 친구 만나러 갈 때, 일하러 갈 때 자연스럽게 걷는 행위가 아닐까요? 근데 지금은 마음먹고 나가야만 하는 행위로 자꾸만 바뀌는 것 같아요. 아무 데나 걷고 싶어도 걷다 말고 도로 때문에 막힌다거나, 인도 끝에 자동차 터널이 나온다거나 하니까요. 100킬로로 차들이 달리는 4차선 도로를 감히 어떻게 건너가겠어요.

도시 계획이 자연스러운 산책을 방해하는군요.

옛날엔 한강 앞에 도로가 아니라 모래사장이 있었어요. 마포구 주민들은 집에서 슬슬 나가 강가를 걷고, 아이들은 헤엄치고 그랬단 말이죠. 근데 이젠 그런 건 상상할 수가 없잖아요. 

 

도시 산책이 순수함을 잃은 것처럼 들리네요. 그럼 지돈 씨에게 특권을 드릴게요. 이 도시를 마음껏 계획해 보세요. 

부할래요. 너무 피곤할 것 같아요(웃음). 계획까지는 무리겠지만 꼭 하나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강과 대지의 레벨을 맞추는 거예요. 우리나라 강을 떠올려 보세요. 예컨대, 요 바로 앞의 홍제천도 옛날엔 대지랑 강의 레벨이 같았대요. 근데 지금은 천의 레벨이 훨씬 낮거든요. 레벨이 같으면 홍제천 바로 옆에 가게가 있고, 길이 있고, 사람이 걷는 풍경이 만들어져요. 파리의 생 마르탱 운하가 꼭 그런 모습이죠. 강과 길 사이를 가로막는 울타리나 철조망 같은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거든요. 사람들이 강가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예뻐 보이더라고요. 근데 우리나라는 자연과 인공물에 레벨을 크게 두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좀더 자연스럽게, 강가 옆에 가게가 형성되고, 자연물 옆을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다면 훨씬 멋진 도시 산책이 가능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좀더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벌써 시간이 훌쩍 흘렀네요. 마지막으로 산책의 원칙을 여쭤볼게요. 산책광인 칸트는 산책 철칙으로 ‘혼자서 할 것’, ‘입으로 숨 쉴 것’ 두 개를 들었죠. 또 지돈 씨의 산책 친구이기도 한 오한기 작가는 《산책하기 좋은 날》에서 “산책의 원칙은 단 하나였다. 우연과 무의식에 의존하기.”라고 쓰셨고요. 그렇다면 정지돈표 산책의 원칙은 무엇인가요? 

무원칙이요. 제가 산책하는 이유는 생각을 하기 싫어서예요. 근데 사람이라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니까요. 원칙이 있으면 그 원칙을 생각해야 하고, 그걸 이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해요. 산책하면서까지 굳이 그래야 하나,라는 생각이 있어서 산책은 무원칙으로 하고 싶어요. 저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걷고 싶거든요. 

 

그럼 지금부터 무원칙의 산책을 나서 볼까요?

좋아요. 이 오래된, 거대한 규모의 아파트 산책길을 구석구석 소개해 드릴게요.

우리는 1986년부터 한 자리를 지킨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이 오래된 아파트는 너른 부지를 안고 있었고, 단지는 말도 안 되게 큰 나무와 수많은 놀이터, 웬만한 관광지 못지않은 산책로, 그리고 목욕탕까지 품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경비가 만들어 걸어둔 듯한 새집, 귀엽게 마련된 누군가의 간이 테이블과 오래된 의자를 보며 이런 풍경이라면 앞으로 30년을 걸어도 질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할머니·할아버지부터 어린아이까지 모두가 편안하게 걷거나 쉬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놓인 건 왜일까. 나지막이 “너무 좋다….” 읊조린 말에 “이 아파트를 좋아해 주니 정말 기쁘네요.” 하던 목소리가 잊히질 않는다. 내 동네를 좋아하는, 동네 산책을 사랑하는 자랑스럽고도 뿌듯한 그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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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