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요청

멀리 달아나며 늘 함께

나는 어떤 기준으로 책을 고를까?

바깥에서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한때 진행했던 팟캐스트 ‘빨간책방’에서는 소설에 관한 깊이 있는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 책의 표지나 번역 상태. 제목 같은 걸 평가하는 코너가 있었다. 늘 김중혁 소설가와 함께했는데 코너명이 따로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가볍게 웃으며 넘길 만한 얘기들과 함께 소설의 중심과 이어지는 책 외부의 이야기도 있었다. 흘려들어도 무방하고 또 손을 집어넣으면 뭔가가 잡혀서 나오기도 하는 그런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책 바깥의 정보는 정말이지 그런 게 아닐까. 무시해도 좋고 의식해도 좋은 것.

보통은 표지를 무시하는 내게 표지로 기억되는 책이 한 권 있다. 표지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책을 다 읽었더니 자연스럽게 그 내용이 표지와 꼭 붙어서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형태로 기억의 책장에 꽂히게 된 것이다. 한강 작가의 수필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바로 그 책이다. 지금은 하드 커버의 개정판이 나왔지만 내가 그 책을 처음 읽었던 20여 년 전에는 가로 14센티미터, 세로 19센티미터 정도의 작고 얇은 책이었다. 책 내용은 작가가 미국 아이오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만난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책이 만들어졌다.

나는 이후에도 늘 기억하며, 언젠가 고요하고 담담한 사람을 구경하고 싶을 때 그 책을 찾아 읽었다. 몇 권은 선물하기도 했는데 선물할 때의 마음도 비슷했다. 그 책에 등장할 것 같은 사람들이 내 곁에 종종 있었던 것이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나는 그 책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책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작가처럼, 또 그 책 자체를 닮고도 싶었다. 책을 닮고 싶다는 말은 다소 틀린 문장처럼 읽힐 수도 있지만, 말 그대로 나는 책 내용과 더불어 그 책이 가진 외형까지도 닮고 싶었다. 보통의 붉은색이 아닌 무척 채도가 높았던 붉은색 표지와 유럽 레스토랑의 메뉴판처럼 세로 길이가 약간 긴 형태의 책. 내지는 거친 질감의 재생지고 그 위에는 글자와 함께 흑백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빨간책방에 소개됐다면 이런저런 할 얘기가 많았을 것이다. “이걸 들고 있는 사람을 멀리서 보면 튤립 꽃다발을 든 것처럼 보이겠는데요.” 어쨌거나 나는 생각난 김에 오늘도 예전처럼 한번 바란다. 고요한 사람과 마음껏 부딪히는 붉은색. 그런 류의 생기를 주세요.

안으로

문득 이 계절이 몇 번 남았는지 세어보는 것처럼 내가 앞으로 읽게 될 책이 사실 그리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는 날을 함부로 가늠해 볼 마음 없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이처럼 우연히 삶을 내려다볼 때가 있다. 여태 완독한 책들은 친한 친구들처럼 참 많은 상황에서 영향을 주던데, 몇 권 못 읽을 거라고 생각하면 잘 고르고 싶다는 유치한 마음도 생긴다.

요즘엔 그렇다. 책을 펼치면 우선 서문과 함께 앞부분 10-20페이지 정도를 꼼꼼하게 읽어본다. 거기에서 연결 고리를 찾으면 마저 읽고 아니면 그저 덮는다. 좋은 책을 판별해 낼 수는 없더라도 성글게나마 체를 거치는 작업이랄까. 그래서 그 과정 속에서는 주제라든지 의미라든지 그런 알맹이를 발견하겠다는 욕심은 없다. 오히려 한 문장이 어떻게 시작해서 끝이 나는지, 혹은 작가가 어떤 단어들을 고르는지, 비유의 대상이 무엇인지 등등을 살펴볼 뿐이다. DNA 구조처럼 작은 것에도 전체의 지도가 담겨 있다는 생각으로 정중하게 읽어 나간다. 10분이나 20분만 읽어보자는 마음은 또 얼마나 가벼운지, 에너지는 늘 충분하다.

문학을 좋아하던 한 친구에게 언젠가 내가 물었다. 요즘 무슨 책 읽어? 그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계발서를 읽고 다시 태어나는 게 나의 요즘 취미야.” 그 장난스러움에 엉켜서 함께 전달되었던 무언가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 서점을 서성이던 나는 처음으로 자기계발서 코너 앞에 멈춰 섰다. 아무 책이나 열어서 늘 하던 대로 서문을 읽기 시작했다. 내 안의 많은 편견들은 몇 페이지가 넘어가기 전에 유쾌하게 부서졌다. 그때 느꼈던 확장의 기분은 참 귀한 것이었다. 내가 집어 든 책의 제목은 맥스웰 몰츠의《성공의 법칙》이었다. ‘자기계발서 영역의 바이블’이라는 띠지를 두른 책. 성형외과 의사였던 저자는 성형외과 의사라면 자질과 상관없이 모두가 심리학자라는 말을 통해 사람의 외면과 내면을 연결 지으며 책을 시작했다.

“환자의 외모를 바꾸는 시술은 그 사람의 미래까지 바꿔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이미지가 바뀌면 성격과 행동, 때로는 재능과 능력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의 존재 전체에 변화가 생긴다.” 

예상하지 못했던 출발점과 이어지는 경험 가득한 전개, 그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의지까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조건이 잘 갖춰져 있었다. ‘서문만이라도 꼼꼼히 읽어보기’ 습관은 자기계발서 읽기를 통해 더욱더 중요해졌다. 물론 나를 다른 세계로 밀어주던 친구의 유머도 잊을 수 없고 말이다.

읽은 책들

오늘도 여전히 이리저리 책을 살펴본다. 열어보고 읽어보며 남은 인생을 함께할 친구를 부른다. 미래의 나는 어떤 책을 읽고 난 인간일까. 우연히 읽은 책들과 읽을 수밖에 없었던 책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읽지 않은 책들의 의미는 뭘까. 왜 내가 읽지 못했을까. 이런저런 이유를 대볼 수도 있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 보면 대답은 이렇게 나온다. “잘 모르겠는데.” 그저 돌아보니 “그랬었군.” 하는 식이다. 내가 읽은 책들을 모아두고 하루 종일 생각하더라도 하나의 이유, 하나의 기준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말한 표지 이야기나 서문을 읽어보는 습관이나 모두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책이 다가오기도 했고, 내가 다가가기도 했다. 지금도 다가오고 있는 책이 있을 것이고, 내가 어딘가로 다가가는 여정에도 끝이 없겠지. 하지만 방향을 알더라도 가능성일 뿐 정말 읽게 되는 책에 관해서는 예측할 수 없다. 

빗속을 걷는 사람을 떠올린다. 어떤 빗방울이 그의 우산 위로 떨어질까. 어떤 빗방울이 신발과 머리카락을 적실까. 또 어떤 빗방울이 그와 상관없이 저 멀리에서 떨어지고 있을까. 무심하게 내려오고 있을 수많은 빗방울을 떠올리면 묘한 편안함이 생긴다. 그러니까 우연과 요청이라는 단어가 어쩌면 모든 물방울에 동시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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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전진우